2024_29. 영화 <타임 패러독스>
1.
몇 년 전 일이다. 거리감은 있었지만 다소 소박했던 구성원 수 덕분에 대화 나눌 기회가 꽤 있었던 회사 대리님이 어느 날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영화를 한 편 추천해 줬다. '꼭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바로 찾아볼게요'라는 으레 형식적인 대답으로 대화를 넘겼는데, 물론 퇴사할 때까지도 그 영화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키지 않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보지 않는, 왜 그런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고집이 있는 것 같다. 그 대리님께는 참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그렇게까지 좋아했었는데, 그때 한번 보고 같이 좋아해 줄 걸, 그게 길어봤자 얼마나 길다고.
어쨌든 이게 영화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첫 기억이다. 중간중간 '한번 봐볼까?'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어느 날은 그냥 극장에서 다른 영화를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날은 도저히 내키지 않아 다른 영화를 찾았다. 또 어느 날은 계약이 끝났는지 공식 구매가 가능한 방법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차일피일하던 <타임 패러독스> 관람 일정은 몇 년이나 미뤄졌고 희미하게 추억 속에 희미해지고 있었다.
2.
감상 전 관련 내용을 절대 찾아보지 말라던 그때 그 대리님의 신신당부하던 모습과 그런 대리님의 당부가 무색하리만큼 너무도 당당하게 포스터에 박혀있던 '3번의 반전!'이라는 문구를 통해 모르긴 몰라도 내 뒤통수를 칠만한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짐작은 했다. 대리님은 그렇다 치지만, 반전이 가장 중요한 영화에서 '반전이 있다'를 위주로 홍보하는 마케팅팀의 의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반전이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반전을 의식하며 영화를 보게 되지 않나? 어찌 되었든 '언젠가 그 영화를 직접 보리라', '그 반전을 직접 챙겨보고 신선한 충격을 얻으리라'는 생각으로 해당 영화에 대한 정보는 이 악물고 찾아보지 않았다. 언제 보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보게 될 것이라는 본능적인 확신이 있었나 보다.
3.
영화 평점 사이트의 '보고 싶어요' 목록에 남겨뒀던 <타임 패러독스>를 다시 꺼내본 건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단순히 제목의 어감만 좋아도 '보고 싶어요'를 꾹 눌러놓는 습관 덕분에 이미 목록 끝자락까지 밀려나 한동안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도저히 끌리는 영화가 없더라니 이 영화가 있는 곳까지 스크롤을 내리기 위해 그랬었나 보다. 그날따라 극장은 유난히 멀었고, 왠지 이제는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공식으로 영화를 구매할 수도 있었다. 그런 날이 있다. 마치 이 영화를 보라는 듯 온 세상이 돕는 것 같이 딱딱 떨어지는 그런 날.
4.
로버트 하인라인을 알고 있는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를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읽어보진 않았을지라도 <스타쉽 트루퍼스>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스타쉽 트루퍼스>의 원작 소설을 쓴 거장 SF 소설 작가다.
사실 나도 SF 장르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의 글을 열심히 탐독한 적은 없지만, 여기저기 귓동냥으로 들은 정보들이 꽤 있는 편이다. 그가 쓴 단편 중 「All you zombies」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포함된 단편집이 국내에 출간된 적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큰 임팩트를 가진 SF 소설로 언젠가 소개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요약 글로만 읽어보아도 꽤 흥미롭게 느껴졌는지 스토리가 뇌리에 깊게 박힌 몇 안 되는 SF 소설이었다.
뜬금없이 왜 로버트 하인라인의 단편소설을 이야기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답은 간단하다. 영화 <타임 패러독스>의 원작이 바로 하인라인의 단편 「All you zombies」기 때문이다. 사전정보 하나 찾아보지 않고 보았지만, 영화 시작과 동시에 그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대리님께서 이야기했던 '관련 정보를 절대 찾아보지 말라'는 말도, 포스터에 박혀있던 '3개의 반전'이라는 문구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몇 년이나 피해왔던 이 영화의 반전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영화를 봐야지 마음먹은 그날, 결제까지 끝낸 그날, 이미 내가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는 아주 맥 빠지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어쨌든 영화는 보긴 했으나 그 흥미가 몇 년을 끌었던 것에 비하면 그렇게 크지 못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타임 패러독스>는 며칠 되지 않아 쌓인 별점들 틈 어딘가에 놓인 평범한 영화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5.
내용을 모르고 봤을 때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있다. 소위 '스포일러' 당하지 않고 보는 게 더 재밌는 영화. <타임 패러독스>가 바로 그런 부류다. 원작을 알고 있었다는 게 스포일러의 개념은 아니지만, 어쨌든 All you zombies의 내용을 몰랐다면 더 재밌게 봤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스포일러에 민감해지는 관객들 또한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과거의 나 또한 그런 스포일러들에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개봉 당시, 스포일러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극장 화장실도 쓰지 않고, 상영 시작 바로 직전까지 이어폰을 끼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 추태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는다. 10년 가까이 쌓아 올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빌드업을 허무하게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들에게 스포일러가 절대적인 것 또한 아니다. 한 번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 내용을 통째로 들어버린 이후 감상 의지를 잃어 몇 년을 썩혀둔 적이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난 후 <메멘토>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메멘토>는 내용보다 형식과 편집에 훨씬 더 집중한 영화였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고작 내용 조금 알았다고 영화 감상 자체를 꺼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짓이라는 것 또한 함께.
6.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적당히'다. 내용을 미리 알지 않는 게 영화 감상 시 재미를 훨씬 더 살려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다는 아니다. 영화 줄거리에 너무 과하게 포커스를 맞추면 재밌는 영화도 재미없게 보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다. 사실 <타임 패러독스>는 충분히 재밌게 잘 만든 장르 영화였다. 적어도 이렇게 김 빠지게 볼 영화까지는 아니었다. '스토리를 미리 알면 안 된다'에 대한 과한 집착은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도 재미없게, 오히려 시시하게 만들 때가 있다. 과한 집착을 내려놓자. 이건 나 스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누차 말하지만, 만약 2018년 4월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어폰을 낄 것이다. 10년을 기다린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