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30. 영화 <너와 극장에서>
1.
새삼스럽다 못해 당황스러운 이야기지만 극장은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이다. 이 단순한 명제는 항상 나를 설레게 만든다. 가끔은 영화를 좋아하는 건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도 있다. 어릴 적부터 극장은 내 주변에 있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멀티플렉스 3사가 모두 자리 잡고 있었고, 독립영화관 또한 따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모든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영화들은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독립영화에서부터 특별관 상영까지, 마음만 먹으면 시내버스 한 번 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특히 집 앞에 꽤 큰 멀티플렉스 지점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 극장은 단순히 가까운 것을 넘어 내 일상 속으로 완전하게 스며들었다. 우리가 매일 숨을 쉬면서도 산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듯이, 언제부턴가 극장 또한 그런 존재로 변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은 물론 알고 있지만, 어쨌든 늘 곁에 있었기에 그 중요성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2.
얼마 전부터 업무 상 이유로 잠시동안 본가와 한참 떨어진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 기차를 타더라도 한 번은 갈아타야 하는, 살면서 이렇게 먼 곳에서 살 일이 있을까 싶었던 곳이었다. 넓은 곳이었다. 사람도 많고, 땅도 넓었다. 지내게 될 숙소가 조금 외곽 부근이긴 했지만 낙후되었다는 말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던 숙소를 청소하고, 커다란 캐리어에 꾸깃꾸깃 욱여넣었던 짐을 풀고, 덥고 습한 날씨에 한바탕 흘렸던 땀도 씻어내고 나니 생각나는 것은 시원한 곳에서 보는 영화 한 편이었다. 그리고 근 몇 년 사이 가장 큰 난관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몇 개월 동안 살게 될 지금 이 집 근처엔, 극장이 없다.
3.
떠난 후에야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듯이, 이별 후에야 그 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이제야 극장에 대하여 또 한 번 뒤돌아보게 되었다. 극장과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것은 어릴 적 군 복무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극장에 가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행동 방안은 나에게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극장이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은 넘게 걸린다는 것을, 그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가더라도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 전용관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몇 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극장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4.
영화 <너와 극장에서>는 제목 그대로 각기 다른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세 단편을 묶은 영화다. 대구의 '오오극장', 서울의 '이봄씨어터'와 '서울극장'을 배경으로 재치 있는 이야기들이 풀어지는데, 영화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 특별히 애착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모든 영화의 배경이 극장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일 배경이 되는 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 중 하나로 기억에 남지 않았을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에서 그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내가 그 영화와 일체화되는 것 같은, 어떤 설레는 지점이 될 것이다.
5.
몇 해 전, 이런저런 일에 치여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내가 나름의 안정을 찾기 위해 했던 것은 전혀 모르는 지역의 전혀 모르는 극장에서 아직 보지 못했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당시 방문했던 곳은 '대전아트시네마'였다. 멀리까지 가서 한 것이라곤 영화 한 편 보고 돌아오는 것뿐이었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큰 위로가 되었다.
6.
바로 작년의 일이다.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의 배경이 되었던 광주광역시의 '광주극장'에 방문하였다. 오로지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이유로 광주에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날 또한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이유로 긴 여정을 시작했다. 같은 날 방문했던 '광주독립영화관' 또한 물론 좋은 극장이었지만, 광주극장이 가지고 있는 세월의 흔적들은 한동안 다른 극장의 존재를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영화 관람 환경이 좋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7.
'특별한 영화관' 뿐만 아니라 '특별한 상영을 하는 영화관' 또한 매력적이다. 내가 매번 영화제에 방문하는 이유기도 하다. 영화제는 언제 어디서나 방문할 수 있던 평범한 멀티플렉스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매번 방문하는 집 근처 멀티플렉스도 물론 좋다. 그러니 매번 방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영화제 프로그램이 상영되는 그 짧은 시기의 상영관은 다른 시기보다 더 사랑스럽다.
언제부턴가 반도 채우기 힘들어진 상영관을 꽉 채우고, 평소엔 영화에 포함되는 부분인지 인지도 못하는 스텝롤을 조명 꺼진 상태로 끝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으며, 눈치 보지 않고 박수를 보내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이 극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묘한 안정감과 동질감까지 느낄 수 있는 그 시기. 이 모든 것은 영화제가, 그리고 그 영화제가 꾸려진 극장이 부리는 가장 큰 마법이다.
8.
극장을 사랑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영화 <너와 극장에서>를 즐겁게 본 사람들이라면 단순히 영화 속 극장만 기억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 극장은 내가 방문했던 극장에 대한 경험으로, 기억으로 확장된다. 그 특별한 경험을 잔뜩 안고 추억하며 살아가는 나는, 극장이 없는 곳에 살고 있다. 나는 영화관이 없는 곳에서 사는 법을 여전히 익히지 못했다. 어쩌면 이 지역을 떠나는 그날까지 배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