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32. 영화 <파일럿>
1.
한정우는 항공사를 대표하는 유명 파일럿이었지만, 술자리에서 뱉은 잘못된 발언으로 인해 일자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재취업을 위해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저가 항공사까지 빠지지 않고 지원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답답한 마음에 술을 병째로 들이켜다 충동적으로 동생 이름을 빌려 항공사에 지원하게 된다. 신분 도용도, 경력 위조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동생이 여자라는 것. 어쩌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잡기 위해 정우는 여자가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운다.
위 내용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람들이 영화에 기대한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첫 번째는 영화의 주제로 볼 수 있는 여성 인권에 대한 묘사고, 두 번째는 말도 안 되는 여장을 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조정석 배우의 능청스러운 연기일 것이다. 반은 성공적이고, 반은 실망적이다. 초반부터 직접적으로 보여줬던 주제의식은 깊이 다루지 않은 채로 그저 유쾌한 조정석이 영화를 끌고 나간다. 딱 여기까지다. 부분적으로 성공한 지점도, 실망스러운 지점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쾌하고 보고 나올 수 있을 코미디 영화라는 것이다.
2.
극 중 남자 캐릭터들은 부족한 여성 인권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인물들로 설정되어 있다. 보이는 직원들마다 소위 껄떡대느라 바쁜 현석, 술 마시고 성희롱 발언을 뱉어 상무 자리에서 물러난 정욱, 문제 되었던 사건을 꺼내 살살 성질을 긁으며 동조하던 연차 높은 기장에 심지어 주인공 정우 또한 문제가 되었던 '꽃다발' 발언의 주인공이다.
아이러니한 지점은 이 영화의 최종 악당 격 되는 인물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는 여성 CEO라는 점이다. 영화가 비판하는 지점은 한국 사회 속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가 단순히 성별로 나뉘어 받아들여지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계층 구분으로도 아직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제는 극 속에서 그 문제점을 가장 적극적으로 깨닫고 이를 풀어내야 할 인물인 주인공 한정우가 정작 무엇을 느꼈는지 그 결과가 희미하다는 것이다.
3.
영화 말미, 한정우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이유가 과연 자신이 여성으로 살며 느꼈던 문제의식 때문인지, 그저 자신을 압박하는 몇몇 인물들 때문인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카메라를 들이대며 달려드는 기자들을 뒤로하고 윤슬기에게 달려가지만 정작 윤슬기에게 던지는 사과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불합리함을 느끼고 이로 인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이 주변의 압박 정도로 그의 위기가 고조되니 마지막 해결 장면 또한 그저 시간이 흘러 진행된 정도로 보일 뿐이다.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살아보니 이상한 점이 많다'는 뉘앙스의 대사 한 줄이 어색하게 장면 속에서 부유할 뿐이다.
영화가 주제 의식으로 내밀었던 여성인권에 대한 갈등보다는 그저 한정우가 한정미로 분장을 하게 되며 겪게 된, 다시 말해 성별을 속여서 생긴 문제라기보다는 신분을 속여서 생긴 문제가 훨씬 도드라지며 성별 문제는 그저 몇몇 장면들에서 양념처럼 쳐져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주제 의식에 걸맞은 성장이 이루어졌다 확답하여 말하기 힘들다.
4.
그것과 별개로 앞서 말한 것처럼 유쾌한 영화임은 사실이다. 조정석 배우가 여태껏 보여줬던 능청스러운 연기만 생각해 보더라도 영화가 선보일 포인트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들 또한 배우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기대하고 극장을 향했을 것이다. 그 많은 관객들의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유쾌한 선에서 영화가 진행된다.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과 장면들을 '코미디 영화에서 이 정도는 용인할 수 있지' 정도로 넘어가게 해주는 것 또한 결국 배우의 연기다. 조정석 배우뿐만 아니다, 한선화 배우 또한 자연스러운 생활연기에서 적당히 오버스러운 코미디 연기까지 자신의 몫을 충분히 수행한다. 이주명 배우 또한 신념 있고 당당하지만, 한편으로는 친근하게 자기 사람을 챙기는 윤슬기 역할을 충분히 연기한다.
사실 <파일럿>의 많은 장면들, 아니 대부분 장면들은 '이 정도는 용인해 줄 수 있지' 정도를 넘어서는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그럼에도 이를 용인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배우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영화가 오로지 배우에게만 의존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조정석 배우를 비롯한 몇몇 배우진들의 연기만큼은 칭찬해 마지않는다.
5.
만약 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봐야 할지 모르겠을 때, 가장 무난한 영화로 추천할 수 있을 영화로 보인다. 다만, '다른 영화에 비해 가장 무난한 영화'로서의 추천이 '영화 자체의 만듦새가 좋은 영화'로서의 추천으로 이어질지는 각자 다시 한번 판단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