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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안 Sep 15. 2020

잡소리 에세이 2020915

 분류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 돈을 주면 좀 잘해진다. 잘해진다는 것은 비문이다. 그러나 적절한 문장이다. 

 오늘 일어난 일에 모두 이름표를 붙여 기록하자니 일을 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그러지 않기로 한다. 남들이 보기 쉬우라고 딱딱 잘라내고 접붙이는 고급 글쓰기는 이제 포기한다. 나는 깔끔하게 적을 수 없고 그저 나불거리고 싶을 뿐이다. "쓰레기를 쓰겠어!" (이경미 감독님, 잘 계시죠!(일면식도 없지만, 작품으로 만나 존경하게 된 감독님)) 말마따나 그냥 쓰레기를 쓴다. 잡소리 에세이다. 잘고 가느다랗고 선명한. 1월에 조금 쓰고 더 기록하지 못하게 된 것들의 연장이다.  


 불릿형 글쓰기는 시와 멀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지극정성으로 쓰면 시가 된다. 가령, YouTube 앱의 새로운 기능 버전 기록 같은 것들이 그렇다. 회자되고 알려지며 사람들에게 자극(이 경우에는 웃음과 경탄)을 준다. 이건 지극정성이라기보다는 밥줄을 걸었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뭐. 취미로 회사를 다니는 자의 아우라에서 비롯하는 여유? 또는 이런 짓을 해도 기술적으로는 결국 내가 TOP이라는, 아니면 이것을 노이즈마케팅으로 쓰면 더 대박이 날 거라는 큰 그림을 그린 자의 느리지만 확실한 스텝이라고 해야하나. 


 


 한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가게 되는 시점이 인생에서는 언젠가 찾아올까 싶었다.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이것도 되고 싶고 저것도 되고 싶다. 욕심 많고 재능도 그닥 부족하지 않은 만능형 인재는 길을 정하지 못한 채 늙어간다. 너 이거 할 줄 알아? 응. 너 이것도 할 줄 알아? 응. 그럼 이거 더 깊이 알아? 아니. 할 줄 아는 건 많은데 깊이는 없는 채로, '이거 내가 하면 더 잘하겠는데.'따위와 같이 의미 없는 말을 하며 늙어간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나는 시와 잠시 멀어지고 시가 아닌 돈벌이에 집중한다.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자본주의의 충실한 종복으로 시간을 팔아 자본을 사고 그 자본으로 얼마간 문화소비를 하며, IT기기를 사고 지구를 오염시킨다. 위악적으로 말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생을 말아감는 진창에서 꾸역꾸역 살아나온 원혼처럼 나는 살아간다. Panic At The Disco의 Impossible Year는 연말이면 그냥 항시 재생해놓는 곡인데, 오늘은 나에게는 새 시작의 날이지만 왠지 연말의 느낌이 나서 한 번 틀어보았다. 새로운 일터에서 적응을 마치면 올해가 끝이 난다. 알아야 할 사실들이 너무나 많고 나는 부족하고 그것을 채우고 싶다는 갈증이 생겨났다. 자발적으로 다시 공부하는 삶의 시작. 공부만 하다 늙어죽을 수는 없다고, 라이선스 따느라 다시 수험공부를 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심으로 버텨왔는데 이제 나 스스로 필요를 느낀다. 누구는 회사를 만들고, 만들어 키웠고, 아이를 만들어 키우고, 소설을 써내고,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될 동안 나는 '살아있기'에 바빴다.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모진 풍파가 있었으나 결국 사랑 타령 하지 않고 살아있게 된 것이 좋을 뿐이다. 내겐 "You are loved." 이렇게 쓰인, 액자가 하나가 있다. 이 액자가 가진 힘이 작다고 생각했지만, 매일매일 볼 수 있는 자리에 두고 보면서 생각한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야." 이 주문이 작지 않구나. 오래 걸려도 결국 사람을 살려 내는구나. 


 나의 신경줄이 닳고 있고, 내장 기관도 그렇고, 외모 역시 닳고 있으므로, 현대인들이 하는 만큼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가꾸어야 비로소 보통처럼 늙을 것이다. SF 문학 작품에서처럼 불로하는 일은 내 생에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 가능성은 아마 활발히 연구되겠지. 나는 그 연구를 지켜보며 기대감을 갖고, 늙어가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세계와의 단절을 갈구하던 나에서 결국 삶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나로 서서히 엔진이 교체되어 간다. 나는 노후대비를 위한 저축을 하고, 당장 죽을 것보다는 '생각보다' 오래 살아 있을 것을 걱정한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기 때문이겠지. 


 편집자들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니까, 나는 일단 쓰기만 하면 된다고 어떤 소설가가 말했다. 어차피 판단은 알아서들 할 것이니까 나는 일단 쓰기만 하면 된다. 나는 쓰기만 하면 된다. 용기를 잃지 말고 잡소리라도 쓰자.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글쓰기로. 늙어서 은퇴를 하면 그림을 배울 수도 있고, 음악을 배울 수도 있다. 어차피 죽을 수가 없다면,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요 몇 년간 진행되었는데, 솔직히 아직도 확인을 좀더 해봐야 하겠지만, 나는 생각보다 일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일터에서 인정 받는 것도 좋아한다. 일이 되게 만드는 상황에 내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필요한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서 꼭 진보할 것이다. 지금은 작아도 꼭 나 스스로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것이 설령 무용한 다짐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글로 남기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자가출판. 사회적 기업. 기본소득. 온라인마케팅.  

 앱/웹 개발(아이디어가 프로덕트가 되는 '실제'의 과정), 자연어 처리, 인공지능. 

 기술의 이해와 사업에의 응용. 교육과 실무의 융화. 


 관심은 옮겨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제만 고민한 것도 물론 있다. 

 뜬금이지만 경영학은 컴퓨터공학에 미래를 온전히 의탁하고 있다. 

 부디 문학은 그저 취미로 하고 다들 컴퓨터공학을 배우길. 


 다음에 잡소리를 쓸 체력과 여력이 남아있는 때는 언제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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