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안내받은 잠자리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의 맞은편에 위치한 쪽방이었다. 처음 쪽방을 안내받았을 때는 좀 놀라웠다. 굳이 망자의 영정사진이 지켜보는 방을 만들어 놓다니. 사실 말이 좋아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지, 영정사진 뒤편에는 할머니의 관이 있지 않은가. 결국 할머니의 시신과 동침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어떤 의도일까? 어떤 사연으로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망자의 사진과 시신이 산자의 꿈자리를 마주하게 두는 건…?
웹툰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망상의 스위치가 마구마구 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구조의 버프라는 것을 좀 받아서 꿈자리에 할머니가 날 찾아와 서운함을 토로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어쩌면 꿈속의 할머니는 현실의 질고를 내려놓고 그 어느 때보다 총기 있고 평안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봐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잠을 청했지만 내가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건 눈곱을 떼고 할머니께 곡을 할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르신들이 곡을 할 때. 시간이 되자 장례지도사님께서 오셔서 가족을 세워두고 곡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손자뻘 되는 사람들은 곡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알았다. 곡을 할 자격은 오직 자식에게만 있는 것을.
나는 연거푸 아이고를 외치는 아버지와 삼촌들 그리고 고모들을 보면서 새삼 효의 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미움은 그런 아버지를 키워낸 조부모에게까지 미쳐있었고, 20살이 갓 넘었을 때는 가출을 위해 시골을 찾아 조부모님께 허락을 구했었다. 어쩐지 무작정 집을 나서는 것이 나를 지나치게 밑바닥으로 떨어드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제조한 원제조자에게 가서 불평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허락은 없지만 조부모님의 허락이 있다면 나는 단순 가출이 아니라, 이유 있는 출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 위안을 위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속상했다.
‘가출이라니. 내가 가출을 하다니….’
그러면서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왜 그런 아버지를 낳으셔서 나에게 이런 불량한 일을 하게 만드냐며 원망을 늘어놨었다.
“내가 배운 게 없어가 안 그렇나. 미안타.”
그때 할머니는 지금까지 내가 본 할머니의 얼굴 중에서 가장 서글픈 얼굴로 날 쳐다보셨다. 어쩌면 나는 그 말로 나의 아버지의 효의 권리에 흠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또한 아버지에 대한 효의 권리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는 할머니의 빈소에서 기운 떨어진 노인처럼 앉아서 밤을 지새우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내 눈에는 그렇게 애절하게 보이지 않았다. 효의 권리가 애초에 손자가 갖는 게 아니라 자식이 갖는 것이라면, 적어도 나보다 오래 살았고, 남자로서 훨씬 많은 상갓집을 드나들었으니, 아버지는 조부모님께 최소한의 도리를 했어야 했다. 나에게 당신으로 하여금 조부모님까지 미워하게 만들어선 안 됐다. 지금 저렇게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당신의 어머니 영정 앞에서 밤을 새우는 모습이 어리석어 보였다.
“어! 니도 와 있었네?”
무뚝뚝하지만 젊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큰 고모의 아들 훈이. 나와는 같은 해에 태어나서 누가 누나인지 오빠인지 생일을 따지던 나의 고종사촌이었다. 그의 모습도 중학생 때 본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훈이는 훈이 특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어리숙하고 부드럽고 순한 분위기. 다행히도 엄청난 반전이 없이 그의 좋은 성품을 그대로 갖고 성장한 것 같았다.
“어. 그럼 와야지. 할머니 장례식인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훈이를 쳐다봤다. 못본사가 키도 상당히 커버려 있었다. 188cm. 그런데 그가 이 정도 클 것이란 건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고모부의 키가 상당히 컸었고, 중학생 때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 급격하게 자라는 키로 성장통을 강하게 앓고 있었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은지는?”
훈이에게는 다섯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몰라. 안 온단다.”
훈이는 자신도 살짝 난처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와? 무슨 일 있나?”
“몰라. 그냥 방에 틀어 박혀서 그림만 그리고 있다. 내 동생이지만 진짜 이해 하나도 안 간다.”
훈이의 말에 나도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며 뜻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은지가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은지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첫 딸이 낳은 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은지의 존재는 할머니에게 훨씬 가까우면서도 훨씬 아픈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깜깜한 시대의 여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딸에게 물려주고, 그 삶을 이어 태어난 딸.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할머니는 은지를 아꼈다. 분명 딸을 낳아 무엇하겠냐며 아들이 낫다고 말했던 할머니였지만 할머니에게도 은지는 특별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은지는 사랑받을 준비가 이미 돼 있는 빛나는 아이였다. 고모부가 딸이라면 껌뻑 죽는시늉을 하면서 은지를 키웠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의 아버지와 비교하며 은지를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수년 전 할머니가 무릎 수수를 위해 입원했을 때, 은지도 함께였었다. 은지는 간호조무사 시험을 준비 중이었고, 학원에서 배운 대로 자신에겐 외할머니인 나의 할머니의 시트와 침구류를 점검하더니, 할머니의 침대 덮개며 이불을 깨끗한 것으로 갈아주었다. 그것도 할머니가 그대로 누워계신 침대에서 말이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신기하고 대견해 보였다. 은지와도 내가 중학생 때쯤부터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은지의 모습이 세월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할까.
은지도 할머니 사랑이 두터웠던 것 같았다. 그때 병실에서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던 은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난 아버지의 어머니를 그렇게 만지고, 애정을 드릴 수 없는데, 은지에겐 은지의 어머니도 은지에게 주어진 삶도 나름 만족스러웠나 보다. 그러니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 나오는 거겠지.
그런 은지가 할머니께서 마지막 가는 길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엄마의 엄마. 은지에겐 외할머니의 장례식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세상과 문을 닫고,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이유를 사실 알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사실 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매사에 당당했던 은지가 마치 폐관수련이라도 하듯 세상과 단절된 이유.
은지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
분명 은지는 그로 인해 뿌리가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쳐다봤다. 효도는 자식의 몫이니 할머니는 은지를 만나지 못한 걸 서운해하시지 않기를 바라본다.
훈이와 어색한 인사가 끝나고, 장례시장에 하루 더 있었다고 나는 이리저리 음식을 꺼내 훈이에게 한 상 차려줬다. 멸치라기보다 마른 갈치처럼 생긴 훈이는 역시 아직도 입이 짧았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그간 오래 동안 끊어진 시간의 공간을 채워갔다. 훈이와의 대화는 어색하면서도 마음이 편했다. 서로의 기억 속에 우린 한 이불을 덮고 잤고, 시골 길바닥에서 얼음땡 놀이며, 도랑에 가재 잡기를 한 사이였으니까.
‘아… 나도 이런 오랜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속들이 젊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나와는 사촌지간인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의 고종 사촌.
할머니는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장성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가정을 갖고 자식을 얻었다. 그렇게 모인 사촌의 수만 아홉. 물론 오지 않은 은미를 포함시킨다면 할머니에게는 열 명의 손자가 있는 것이었다. 입양이나 바람을 피워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면 할머니의 피와 살을 나눠 가진 이가 열다섯 명이 된다는 것인데, 할머니는 죽어서도 이 모든 이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보지 못하셨다. 은지가 왔더라면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에 가족 모임을 제대로 보고 가시지 않으셨을까?
어느새 또 사람들이 몰려왔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 보다는 할머니의 다섯 자녀의 슬픔을 애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빈소를 찾은 사람들의 각자의 종교적 신념에 맞춰 빈소에 인사를 드리고, 할머니의 다섯 자녀 중 누군가를 찾아갔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했다. 장례식장에 1시간 이상 있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장례식이 산사람을 위해서 간다고 하기는 하지만 진짜였을 줄이야.
그리고 놀라웠던 건 작은 고모부의 직장동료들이 그 먼 곳까지 찾아와 문상을 드렸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직장동료의 빙모상을 찾아오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알던 장모에 대한 이미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장모도 어머니다. 아내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낳아준 엄마 이외의 새로운 어머니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니, 어머니는 어머니이다. 물론 그렇게 만만하거나 편한 상대는 아니지만 아내를 얻음으로 효의 권리도 같이 얻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은 고모에게 작은 고모부가 대단해 보인다고 했다. 빙모상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너무 신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나? 이거 다 뿌려놓은 게 있어서 그런 거다. 정이 아빠도 얼마나 쫓아다녔는지 모른다.”
작은 고모는 그저 내가 말을 걸면 웃었다. 당신의 어머니를 여의고도 나는 고모에게 반가운 조카였기 때문일까. 별일도 아닌데 활짝 웃으며 이야기하는 고모. 고모의 과잉 친절이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당숙들도 오셨고 다들 나를 보며 나잇살에 늘어져 있던 눈꺼풀을 힘껏 들어 올려 눈동자를 훤히 드러내고 나를 반겼다.
“헤엣!! 니가 웬일이고. 그래, 할머니 장례식에는 와야지. 아이고… 잘 왔다….”
당숙부나 당숙모들의 힘차고 밝은 인사는 언제 들어도 나를 민망하게 했다. 그리고 나도 그때쯤 알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를 위해 이곳에 왔지만 결국 나의 존재 가치는 산사람들의 평안과 만족감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은지의 부재에 느끼는 내 아쉬움이 그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또다시 해가 서쪽으로 느린 다이빙을 준비하고, 우린 자연스럽게 나이에 맞춰 모여 앉게 되었다. 할머니의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할머니의 손주들은 손주들대로. 하지만 나의 오빠는 할머니의 자식들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근데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빠가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한 책임을 나눠질 어깨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긴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졸지에 할머니의 장남의 딸로서, 사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테이블 가운데 앉게 되었다. 원래라면 오빠가 와서 행사진행이라도 하듯 사촌들과 이야기를 했겠지만 오늘은 그 자리가 갑자기 나에게 온 것이었다. 친가에 찾아가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 나에게 말이다. 모든 사람이 어색했고, 거기 앉은 어떤 사촌은 나와 19살 차이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모습이 상당히 낯설었다. 사실 그 아이가 갓난아이일 때 본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한데 모인 우리는 전부 꿀 먹은 벙어리였다. 다들 조용조용한 내향형 인간들이었다.
“아! 진짜 형님 또 와 그라시는 데요!!”
“오빠 니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우리의 고요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그 넓은 빈소를 가득 채우는 삼촌 고모들의 큰 소리가 귀를 때리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촌 중 그 누구도 전쟁 같이 커다란 제 부모의 목소리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부모 밑에서 하나같이 조용한 자식들이 나온 것이었다.
“이야.. 워리어다. 우리 엄마가 다 이겨 먹을 걸?”
“원래 막내 이즈 온 탑이잖아.”
나의 사촌들은 가열되는 싸움에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제 부모의 목소리를 골라 들으며 누가 이 언쟁에서 우위에 서는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뭐지? 이 웃픈 전개는?’
나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사촌들 사이에 보이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쳐다봤다. 기분 탓일까? 할머니의 얼굴도 뭔가 웃퍼보였다. 슬프지만 웃음이 나오는 모습.
유전적으로 할머니를 제일 많이 닮았을 것이라 추정되는 나는 할머니의 기분을 나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이제 와서 자손들을 모아놓고 자식농사를 떠올리며 슬프거나 기쁘거나 하시진 않을 것 같았다. 할머니도 죽음을 맞은 순간에는 그저 할머니 자신만을 생각하실 것 같다. 온전한 자기 자신.
할머니도 분명 웃프셨을 거 같다.
죽음으로 생의 고통을 벗어서 좋고, 제대로 인생을 배우고 살지 못해서 슬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