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평쯤 되는 빈 공간이 어느새 실험용 벤치와 각종 장비, 시약장, 냉장/냉동고 등으로 가득 채워졌다. 자네, 대학원에 와 보지 않겠냐고 팥차를 끓여주진 않았지만, 같이 연구해 보겠다는 학생들이 하나 둘 생겼다. 병아리 석사과정 학생들과 함께 무궁무진한 실패 스페이스를 탐험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재계약과 승진 심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물러설 곳이 없다. 논문을 쓰자.
듀얼 모니터의 양 날개를 활짝 폈다. 무수한 실패 끝에 마주한 우리들의 작고 소중한 결과들을 그러모아 왼쪽 모니터에 띄웠다. 재료와 실험 방법 (Materials and Methods), 결과 (Results)까지는 그럭저럭 진도가 나갔다. 이태리 장인은 아니지만 한 땀 한 땀, 써 나갔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이미 발표된 다른 연구 논문들과 연관 지어 통찰을 주어야 하는 토론 (Discussion) 부분부터는 제자리다. 어쩐 일인지 영 속도가 붙지 않는다. 끙. 막혔다.
“다른 논문에서는 비슷한 현상을 다르게 해석했는데, 우리 결과로는 이렇게 설명하는 게 더 맞아 보이는데...”
“심사자 (리뷰어, Reviewer) 들이 이 부분에서 추가 실험을 요구할 것 같은데, 미리 언급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일단 우리 주장만 강조할까?”
어떻게 쓰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까, 이렇게 쓰면 너무 비약하는 건 아닐까. 교신 저자 (Corresponding author)로써 처음 쓰는 논문이라 이름 옆에 붙는 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결과는 비록 작더라도 정확하고 정직하게 쓰고 싶은 마음, 여기서 내가 알아낸 것들을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주저함을 만들었다. 모든 판단과 결정이 내 몫이라는 책임감도 크고 새로웠다.
Microsoft copilot에게 '듀얼모니터로 논문 쓰는 그림'을 그려보랬더니 사무실 책상에 튜브를 가져다 놓았다. 이러면 연구안전 위반이야.
괴로움으로 머리를 쥐어뜯던 어느 날, 나는 동료들에게 “하루 종일 일은 했는데 남은 게 없어요. 요 앞 공사 중인 건물들은 매일 올라가는데, 저는 한 줄 썼다가 두 줄 지워요.”라고 말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내가 불쌍했던지 A 교수님이 “얼마 전에 키보드를 ‘기계식 키보드’로 바꾸었더니 논문이 잘 써지는 것 같아요.”라고 농담반, 진담반, 비밀스럽게 말해주었다.
뭐, 기계식 키보드?
키보드는 컴퓨터 사면 따라오는 것 아니야? 키보드의 세계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청축, 갈축, 적축, 새로운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리뷰들은 청축은 경쾌하고 상쾌한 느낌으로 마무리되며, 적축은 부드러운 타건감과 함께 은은한 여운이 남는다는 식이었다. 경쾌한 청축, 부드러운 적축이라니. 키보드는 만져보지도 않고 사용 리뷰만 읽고 있자니, 마치 마셔보지도 않은 고급 와인의 품평만 읽는 느낌이었다. 이걸 읽고 있을 시간에 뭐라도 쓰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고, 논문은 데이터와 논리로 쓰는 건데 키보드 종류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뭐라도 하고 싶었던, (혹은 스트레스로 인해 뭐라도 사고 싶었던) 그때의 나는 ‘적당한 키압으로 장시간 타이핑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꽤 고가의 기계식 갈축 키보드를 주문하고 말았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데 난 아직 멀었다. (이미지 출처: JeongGuHyeok on Pixabay)
배송조회를 하며 기다리던 어느 날, 독일에서 디자인하고 체코에서 만들었다는 키보드가 도착했다. 까맣고 듬직했다. 한쪽 구석에 그려진 체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마치 논문을 대신 써줄 지니가 들어있는 램프라도 되는 양.
마법의 키보드라면 주인님, 무얼 써드릴까요, 이럴 텐데.
한심한 생각도 잠깐. 키를 누르니 찰칵거리는 소리가 나고, 손가락을 떼면 키가 원래대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한 줄 쓰는 중에도 찰칵찰칵. 두 줄 지우느라 백스페이스키만 연타하는 중에도 찰칵찰칵. 찰칵거리는 소리 때문에 지우고 있는데도 일이 착착 되고 있는 것만 같은 괜스레 이상한 느낌. 힘든 일을 할 때 리듬이 규칙적인 노동요가 필요한 것처럼 쓰고 지우고 있다는 걸 내 귀로 들으니, 내가 시간만 죽이고 있는 건 아니구나,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지우는 것도 한 과정이구나. 많이 지우고 고치며 숙고할수록 논문은 조금씩 나아졌다. 밤늦게까지 혼자 연구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쓴 논문을 학생들과 함께 고쳐가며 버전이 10을 넘어갈 때쯤, 더 이상은 못 고친다, 나는 완성을 선언했다. 물론 완성이 끝은 아니어서, 마음 아픈 거절을 몇 번 경험하고, 동료 평가 (peer review)와 수정을 거쳐 논문이 출판되기까지 두 계절은 족히 지난 것 같다.
처음이 어렵지, 한 편, 두 편, 출판되는 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실패 스페이스를 이미 꽤나 탐험한 건지 우리는 좀 더 많은 아이디어를 시험해 보고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시작했다. 병아리를 면한 학생들이 초고를 쓰게 되면서 논문 쓰기의 진도도 한결 빨라졌다. 그러면서 내 판단을 신뢰하는 법도 배우고, 대응하기 어려운 심사평일수록 얼마나 논문을 나아지게 하는지도 배웠다.
“우리 랩이 느리기는 하지만, 뒤로 가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며 동고동락한 학생들과 웃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한 줄 쓰고 두 줄 지우던 그 시간들이 모두 소중했다. 지우고 또 고치며 사라진 문장들을 헤치고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우리가 발견한 작고도 소중한 자연의 비밀을 세상과 공유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린다. 물론, 여전히 거절이 일상이고 재투고가 다반사다. 이 모든 일들을 함께 하고 있는 키보드의 자주 쓰는 키들이 닳아서 반들거린다.
쓸 때도 지울 때도 찰칵찰칵.
그 소리가 꼭, 그래도 너는 잘하고 있어. 말해주는 것 같다.
커버 이미지 출처: StockSnap on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