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슬람 국가는 아랍의 한 유목민 부족에서 출발하였다. '사라센'제국으로 알려진 이나라는 AD 622년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아랍 유목민의 지도자인 '모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으로, 유일신 '알라'에의 절대귀의와 평등의 가르침을 내세웠다. 이슬람은 신분·계급의 차이, 민족·국경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더라도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일원으로서, 알라(신) 앞에서 평등하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이슬람의 '움마'는 모든 무슬림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아랍어의 '국가' 또는 '국민'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이슬람의 역사적 발전에서 '움마'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다양한 지역의 무슬림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슬람은 ‘인간과 신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종교적 교리를 강조하였지만, 특이하게,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나 충성심을 내세우는 ‘국가적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연히, 사회적으로 개인 간의 대인관계는 서로를 독립적인 요소로 생각하였고, 느슨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평적 관계는 독립성을 추구하는 많은 유목민과의 개종을 위한 외교적 협상에서 이슬람을 택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어느 날' 기존 부족사회에 들어서자, 복종과 헌신의 대상은, 자연스레 ‘기존의 부족’과 '이슬람' 종교를 결합한 ‘움마’ 즉, ‘이슬람 사회 공동체’로 이는 이슬람의 양대 축이 되었다.
AD 7세기 초반 이슬람 창설 당시의 세계 각 왕조국가의 왕과 귀족들이, 정복 전쟁으로 정복지 서민들을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 여겼을 때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당시의 일반적인 양상과 달리, 기존 부족의 정치 문화나 행태를 점령지의 법규로 인정해 준 ‘부족주의’ 결과로, 각 부족은 ‘이슬람’ 으로 개종하면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 이래,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이슬람과, 이슬람을 받아들인 새 점령지의 기존 토착세력 (부족이나 가문)을 그대로 활용하여 통치하되, 세금 징수와 군사적 통제로만 제국을 운영하자, 곧 큰 확장성을 제공하여 부족 중심의 유목사회인 북아프리카, 아랍,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슬람이 급속도로 확산하였다. 이슬람은 광대한 지리적인 간격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내에 각 부족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정신적인 주체가 되었으며, 단시간에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였다.
모함마드는 이슬람 포교의 원천을 '무력'에서 찾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지만, 그는 신도 왕도 아니었다. 모함마드가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교단 내부에 혼란이 생겼으나, 아라비아의 부족 전통에 따른 선거제에 의해서 '아부 바크르'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다. 이런 선거제도로 '무함마드를 계승한 자'라는 ‘정통 칼리프’로,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의 정통 칼리프로 이어졌으며, 이슬람 세력은 계속 확산하였고 영토는 급속도로 팽창되었다.
이처럼, 이슬람을 믿는 아랍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자, 제국을 다스리던 '정통 칼리프'들은 광대한 정복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화합과 평등의 통치 철학으로서, 제국의 구성원 상호 간에 가져야 할 윤리적, 법적 규범을, 현실사회의 생활 규범으로 적용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 그 결과, 정치적 신앙공동체로서 ‘정교일치 (政敎一致)’를 내세우며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였다. 뒤이어, 경전인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 의해, 종교가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의 구성원에게 ‘일상생활의 규범’을 요구하려는 정체되고 완고한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이슬람 원리주의’의 출발이었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1,400여 년 전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절 세속적인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갖춘 ‘정교일치’의 국가를 건설할 때, 알라(신)께 구한 사회적 계시인, ‘움마’ (이슬람 ‘사회 공동체’)를 모방한 것으로서, 이상적인 ‘이슬람적’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그에 의해 주창된 일반 대중에 대한 '관용과 규휼'의 '자카트' 방식은 자연스레 '부의 재분배'가 되었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사회보장 제도'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의식변화로, 이슬람은 정복지 서민에 대한 약탈은 금지하는 대신,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인 부족에게는 그들의 규율과 자치를 인정하여 주었고, 세금 감면 등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전쟁에 나선 이슬람 군인에 대한 보상은 정복한 왕국 재물의 4/5를 병사에게 나누어 주고, 1/5만 메디나로 보내었다. 구태의연한 기존 왕국이 이슬람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무슬림 개개인은 이런 종교적 사상의 틀속에서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는 동안, 의식 구조, 신념, 가치관, 사고체계, 관습이나 행동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 사상과 동화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 종교는 자연스레 서민 생활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을 깊숙하게 지배하였다. 이 때문에, 무슬림의 ‘알라(신)’에 대한 ‘신성’(神性)은 오늘날까지 강하게 유지되어 왔으며, 이슬람이 국교인 국가에서는 전 국민이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마치, 수도생활을 하는 것처럼 6 신과 5행을 준수하며 꾸란과 율법에 따라 살아간다.
이슬람은 먼저 발전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그 종교적인 신앙방식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이슬람은 종교가 사회생활 전반을 망라한 삶의 생존 양식을 가르치므로, ‘내세와 현세를 동일하게 여기면서도, 현세의 삶을 중시’하고, ‘신앙과 실천의 세계’를 주요 관심사로 보았다. 이는, 세속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고 내세관이 뚜렷한 서구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문명의 성격도 대립적이다.
'비엔나'나 ‘카이로'에서 각각 국교로 믿는 기독교나 이슬람은 둘 다 일신교라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이들 유일신교는 자신이 믿는 신 이외의 모든 존재를 부정하므로, 모든 사고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양방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종교만이 진실하고 유일한 신앙이니 모든 인간이 추종해야 하므로, 이교도를 자신의 참다운 종교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라며, 두 종교는 정복과 선교에 커다란 비중을 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구약)과 꾸란은, 정복과 선교의 수단인 ‘전쟁’을 주요 이슈로 보면서도, 모두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강조한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강조하는 보편주의적 측면이다. 바로 이 부분이 꾸란과 성경 이해에 꼭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예컨대, 기독교가 말하는 보편적 소망은 자기 종교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자유, 평등, 생명을 전하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이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자유는 억압으로부터 해방이고, 평등은 차별로부터 해방이며, 생명은 영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모든 민족이 염원하는 가치의 대상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인이 주장하는 보편성이다.
반면, 이슬람적 보편성은 ‘알라’(신)을 같이 믿는 무슬림 형제에게는 한없는 ‘관용’을 베풀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교도는 개종시키거나,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필요에 띠라, 이교도를 포용하기도 한다. 교리의 이중성도 인정한다) 이처럼, 이슬람은 ‘무슬림의 세계’를 꿈꾸는 편협성을 보이는데, 이는 모함마드가 초기 ‘메디나’에서 머물 무렵, 유대교인과 잦은 접촉을 하는 동안, 이방인을 배척하는 유대교도의 ‘선민의식’을 모방하여, “선민의 대상을 이슬람교도로 바꾼 것이 아닌가?”라는 데서 출발한다. 이처럼, 꾸란이나 성경의 내용이 서로 다르고, 자신들의 신앙을 강조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종교 간 상호 불신의 계곡은 매우 깊어, 자연스레, 공존보다 분쟁으로 이어졌다.
정통 칼리프 시대를 거친 이후, 최초의 아랍계 중심의 세습왕조로 출발한 ‘우마이야’(AD 661-750) 왕조는 서쪽으로는 ‘지브롤터’를 지나 71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동쪽으로는‘펀잡’, ‘발루치스탄’ 지역 (현재의 파키스탄)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AD 750년에 건국된 ‘압바스’ 왕조(AD 750-1258, 1261-1517)는, 아랍계와 비아랍계가 이슬람 안에서 더불어 사는 ‘무슬림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고, 사실상 ‘아랍’이 ‘이슬람’으로 진화하여 이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은 두 제국에서도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지도 참조)
동양과 서구의 중간에 위치한 중앙아시아는 끝없이 펼쳐지는 유목지대여서 이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교세 확산은 필연적이었다. AD 751년, 동진하던 이슬람 군과 '실크로드' 확보와 불교세력 확산을 위해,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 장군이 이끌던 당나라 군대가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인 '탈라스'에서 한바탕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당나라 군의 대패였고, 이 지역 일대의 '간다라' 불교문화도 초토화되었다. 중국의 각 왕조는 이 전투 이후 무려 1,100여 년 간 이 지역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청조 대에 이르러 신짱, 위구르 지역으로 진출)
그런데, 서구와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에서 보듯이,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로마의 힘을 빌려 정복 전쟁에 나섰고, 이슬람도 창시 초기부터 '아라비아' 반도 통일 등 '개종'이라는 외교적 협상과 정복을 통하여 교세를 넓혔다. 때문에, 전쟁이 선교의 영역이며 교세 확대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되었으니, 이슬람이 발흥한 이후 기존 세력으로 존재하던 기독교와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슬람이 기독교를 공격하고, 기독교가 이슬람을 이단으로 단정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들이 지금껏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