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3년 서구가 이슬라모포비아를 극복한 이후, 서구를 압도했던 이슬람이 점점 약해지는 동안, 서구는 18세기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군사력과 무기체계가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산업 생산력 또한 산업혁명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가 급속히 발전한 서구와 정체된 이슬람 사이에 힘의 균형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던 서구 열강이 점점 무력으로 이슬람에게 공세를 가하는 동안, 기독교는 서구 각국의 국교로서 다시 한번, 식민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서구의 침공이, 『문물교역 – 선교활동 – 식민지 정복전쟁』의 패턴을 답습한 탓이다. 그리고, 이런 패턴은 중동과 아프리카를 넘어 동양으로까지 이어졌다. 1757년,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이슬람군을 물리쳤다. 1798년에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산맥으로 진출했고, 네덜란드는 일찌감치 인도네시아로 진출하였다. 서구 열강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를 압도했다. 이들 대륙은 하나같이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한편, 동로마제국을 차지한 이후, 승승장구하던 이슬람권은 한때 금을 제조하겠다며, ‘연금술’까지 지향하였다. 사실, 이슬람이 창시된 이후의 1,400여 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근세 200여 년 간을 제외하면 줄곧 서구에 대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면에서 우위를 견지하여 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슐레이만’ 대제(1520-1566) 이후 정치적 침체기를 맞이하며, 점점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에도 무심하였다. 그리고, 외부의 도전이 없이 누려온 오랜 평화의 결과 이슬람의 맹주 ‘오스만 터키’는 '이빨 빠진 사자' 신세가 되었다. 서구 열강들이 이슬람을 먹잇감으로 경쟁적으로 침략하며 자신들 지역의 대부분을 식민지화하는데도, 오스만 투르크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 무사안일하게 대처하며 무기력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제1차 대전에서 패퇴한 뒤에는 제국이 완전히 붕괴되어 소아시아 반도에 갇혀버렸다.
서구 역사를 돌아보면, 지난 수백 년간 서구가 세계역사를 주도한 것은 이들의 문화, 예술 수준이 동양이나 이슬람에 비해 뛰어나서 세계를 이끌었다기보다, 강한 군사력의 결과물이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선교와, 전쟁을 통한 정복에 바탕을 둔 폭력을 ‘진취의 기상’으로 삼은 탓이다. 중세 기사의 명예는 '승리'에 있었다. 당연히, 도전하고, 힘을 겨루고, 전술을 단련하는 풍토가 중세 봉건사회 귀족들의 일상이 되었다. 특히나, 영국이 한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지도층의 명예심이 중심이 된 군사력의 증대와 더불어, 무역과 식민지배로 부를 축적하며, 산업 혁명과 과학, 철학 등 사회 과학도 함께 발전하였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서구가, 18~20세기간 약 200여 년간 무력으로 중동, 아랍, 북아프리카 등 많은 이슬람 지역을 지배하는 동안 기독교 선교라는 소명의식과 달리, 서구는 마치 십자군처럼 피지배인의 정서에 무지하여 현지인에게 자신의 기준으로 온갖 박해와 탄압을 가하였고, '움마'라는 지역민의 이슬람 사회 공동체를 와해하려 들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12년 리비아를 점령한 이태리에 저항하던 리비아 주민 6만여 명을 강제로 사막으로 이주시켜 이들을 아사하게 하였고, 땅의 착취와 강간, 가축 도살 등 온갖 악행을 자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힘으로 서로를 짓밟으며 인위적으로 국경선을 긋고, 영토를 더 많이 얻겠다며 지역을 분할하였다. 지배당할 자는 정해져 있는데, 지배할 자를 정하기 위한 전쟁이 곳곳에서 줄을 이었다.
'엘 알라메인' 전적지
이집트 국방무관은 매년 11월 4일에 엘 알라메인에서 거행하는 제2차 세계대전 전몰 연합군과 추축군의 위령탑에서 거행하는 위령제 행사에 초청을 받는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카이로에서 약 200여 킬로를 달려 도착한 지중해 연안 휴양지에서 다시 약 200킬로미터를 더 달리면 리비아 국경 가까이에 있는 '엘 알라메인'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쯤에서 고속도로 길가에 몇 개의 안내판이 나오고 위령탑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린다.
위령탑 입구에는 이집트 군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데, 안내소를 지나 좁다란 직선 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수 만 명의 전사자를 낸 연합군과 추축국의 전사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위령탑이 멀리 떨어진 채 마주 서 있어 파도와 바람 소리를 벗 삼으려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위령제 행사는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가 매년 번갈아 통합으로 주관하는 데, 이제는 모두가 EU라는 틀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므로, 각국의 주요 외교사절과 많은 전몰자의 가족이 참석하여 헌화식과 더불어 엄숙하게 추념제를 거행한다.
이집트와 리비아에 걸쳐있는 '사하라' 사막은 세계적인 사막이다. '사하라'는 아랍어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바다”라는 뜻도 있다.) 자동차로 사막 도로를 달려보면 '사하라'라는 의미를 새삼 알게 된다.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달려도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지평선만 보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막의 하늘도 모래 땅과 맞붙어 있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지표면 인지도 착가 할 만큼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무한한 광경이다. 이 거대한 사막의 지중해 연안 끝 부분에서 욕심에 가득한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1912년, 이태리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였던 리비아를 빼앗아 보호령으로 삼다가, 무솔리니는 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엉뚱하게 시작한 이집트 전쟁으로 인하여 1943년에 영국령이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독일이 영국군에 패퇴하던 이태리 군을 지원하였다. 1942년 8월, 독일군의 야간공격으로 8월 31일 시작하여 9월 7일 종료된 '엘 알라메인' 전투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과 몽고메리의 연합군이 격전을 벌인 역사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롬멜은 해안선으로부터 50킬로미터 정도 아래에 펼쳐진 '카타라' 분지에 막혀 자신의 장기인 전차 기동전을 제대로 펼 수 없었고 전차 연료도 떨어져 퇴각하게 된다. 롬멜은 10월 23일부터 11월 4일까지 또다시 일제 공세를 감행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패주 하여 1943년 1월 23일에는 영국군이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까지 장악하게 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 패전의 계기가 되었다.
무적을 자랑하던 롬멜의 전차군단이 패배한 첫 번째 이유는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 식용수는 물론, 전차에 사용하는 연료 부족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롬멜의 장기인 전차 기동전을 엘 알라메인의 사막에서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전차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경도를 지닌 굵은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이 있는가 하면 전차의 궤도를 못 움직이게 만드는 입자가 고운 모래로 된 사막 등 여러 가지 지질로 이루어진 탓이다. 중과부적의 적을 맞이한 롬멜은 기동력을 발휘할 만한 지리적 이점마저도 박탈당한 터라 매우 난감했을 것이다.
‘엘 알라메인’ 근교에 있는 ‘롬멜’ 기념관에는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롬멜’의 지휘훈이 걸려 있다. “사막은 행정가에게는 지옥이고 전술가에게는 천국이다.” 하지만, 기갑 전술의 대가였던 ‘롬멜’조차도 물과 연료 없이 아무런 전술도 발휘할 수 없었다. 에어컨이 없는 전차는 사막에서 불한증 막이다. 독일군 전차는 연료가, 군인에게는 물과 신선한 야채가 필요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주요 보급선은 지중해를 건너는 동안 연합군 공군에게 수장되었다.
반면에, ‘사막의 여우’ '롬멜'과 싸우는 '사막의 생쥐' 영연방 제8군 사령관 '몽고메리'의 항전은 완강했다.
'여우'와 '생쥐'(독일과 영국)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싸우는 공룡들처럼…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피 흘리며 싸웠다. '지배당할 자'는 정해져 있는데, '지배할 자'를 정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전투가 끝나자 '여우'와 '생쥐'는, 지배도 못해 보고 조국으로 되돌아갔지만, 엉뚱하게도 지배당할 처지에 있던 이집트가 ‘엘 알라메인’ 전투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롬멜’과 ‘몽고메리’가 싸우느라, 매설해 둔 지뢰로 매년 수십 명의 인원이 지뢰폭발 피해자로 사상을 당하고 있어서다. 경제력이 약한 이집트는 지뢰제거 활동을 펼칠 형편이 못되어, 영국, 독일 등에 지뢰제거 비용 분담을 요구하지만 이들은 묵묵부답이다. 인천 앞바다에서 매년 1904년 ‘러-일전쟁’에 침몰한 ‘러시아 함정 위령제’를 갖는 러시아 군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러시아와 일본이 ‘지배할 자’를 정하기 위해 싸웠다. 그때의 우리 역사도 이집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서구 각국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주권과 영토만 가진 국가’는 ‘알라 신의 통치권’과 ‘움마의 우위’에 대한 국민의 믿음과 공존하기 어렵다. 제2차 대전 이후 아랍 각국은 독립하며, 서구가 물러간 뒤에 남아있는 이 경계선이 오늘날 각국의 국경선이 되었지만, 유목생활을 하는 원주민 베드원족은 서구가 그어 놓은 국경선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이슬람 경전을 암송하며 선조의 방식으로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우리가 판단하는,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인성 위주의 서구가 물질지상주의를 지향하며 이룩하여 온 산업화가, 지금껏 신성을 지켜온 이슬람에 비해 더 나은 사회라는 확신은 아무데도 없다. 따라서, ‘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당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지나간 긴 역사에서 보듯이 앞으로도 두 세력 간의 물리적인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