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은 인간을 세 종류로 구분한다.
먼저, ‘신적인 인간’으로서, 최초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인간이고, 다음은, ‘기계적인 인간’으로서 현대의 서구문화에 들뜬 영리적이고 타산적인 인간이다. 이들은 자신 이외의 인간을 이용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끝으로, ‘동물적인 인간’으로서, 히피족 등 인간성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마약이나 프리섹스 등에 중독된 인간으로서 인간성에 내재하는 신성을 부인하는 인간들이다.
무슬림은 ‘신적인 인간’으로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으로 완성된, 가장 완벽한 종교인 이슬람을 믿는 자신들의 현 위치에 만족한다. 그리고, 종교적 교리에 근거하여 비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보다는 항상 관용의 마음과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즉, 현세에서는 비록 고통을 감내하려는 운명으로 태어났으나, 내세에는 이런 현세의 삶을 바탕으로 신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데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대로 ‘내세’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정명(定命) 의식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오히려,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고 우쭐대는 불신자인 우리를 가엽게 생각하고 구원하려 한다. 즉, 이들은 돈이나 권력 같은 신앙 외적인 조건보다는, 신이 원하는 대로 살려는 경건한 삶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사실, 이런 관점은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다. 언젠가 유엔에서 각국별로 인간의 행복지수라는 걸 조사하였는데, 경제적으로 부유한 한국보다도 삶의 질이 다소 낮았지만 일부 이슬람 국가와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국민이 삶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삶의 가치 기준을 국민소득 등 경제력에 의해 평가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관점이다.
미국에서 교육받을 때, 필자의 반에 수단 공군 대위(조종사)가 함께 있었다. 그는 소련의 공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소련 공군 미그 전투기를 자국에 도입하였던 인물인데, 갑자기 쿠데타가 일어나서 친미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미국 정부에서 원조로 제공하는 공군 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왔었다. 한창 냉전으로 대립 중이던 두 개의 초강대국을 모두 경험한 그가 양국을 비교 평가한 관점은 자못 흥미로웠다.
공산주의자 소련은 비록 많은 종류의 전투기를 주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를 주더라도 주요 본체를 포함해서 수리부속품, 예비 부품 및 필요 공구까지도 한꺼번에 무상으로 주었다. 하지만, 미국은 여러 가지 전투기 기종의 본체를 무상으로 주었지만, 나중에는 각 기종별로 별도로 수리부속이나 공구류까지 별도로 구매해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인은 ‘마음이 따뜻’한데, 미국인은 ‘마음이 친절’하다고 평하였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슬람 국가에서 살아온 그의 입장에서는 세계 적화를 지향하던 무신론적 소련(불신자)에 대해 화를 내어야 함에도, 오히려 물질중심적인 미국(이교도)의 태도에 좀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자본주의자 미국은 그 아까운 물질적 원조를 제공하면서도 그렇게 준 만큼 감사를 받지 못하였다. 아마도, 무슬림에게조차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슬람은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것조차 죄악시하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소유욕을 추구하는 자본 증식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신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미국 등 자본주의는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기계적인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결코 감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슬림은 자본주의와 이슬람 종교의 가치관을 다르게 보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에 삶의 가치를 두는 서구에 비해, 이슬람은 ‘경건한 신앙’에 삶의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 등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이후에 대두할 국제적인 문제로 ‘이슬람’을 거명한 적이 있다. 그의 저서 『역사의 종언』에서, 역사에서 “이상을 위한 투쟁’이 이제 끝난 것인가?” 하는 의제에서, ‘이슬람’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 ‘후쿠야마’는 “어디가 더 행복한 세상인가?” 하는 의미에서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싸움은 공산주의의 패배로 끝났고, 앞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싸움이 주가 될 것인데, 그 내용은 주로 ‘완벽한 종교를 믿는 이슬람주의’와, ‘물질적인 풍요를 지향하는 세속주의’ 문화와의 갈등’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에 앞서, '후쿠야마'의 스승인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문명충돌론’에서 이슬람 종교가 창시된 이래 오늘날까지 여전히 1,400여 년 전의 계시에 충실하여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교적 교리나 사회적 신념만으로 인류문화에 중심에 서기에는 이 종교가 갖는 비무슬림과의 '비화합성'이 최대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는 '지하드(성전)'의 원인을 무슬림 공동체 내에 만연된 종교적, 부족적, 인종적, 정치적 분열들이 진화하면서 서구 등 인접 문명과 충돌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후쿠야마’는, 테러 세력의 ‘지하드(성전)’ 원인은 민주화 과정의 산물로서, 테러를 민주주의 국가와 무슬림 국가가 민주주의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로 바라보면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보편적 민주주의로 나아간다는 낙관적 견해였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며 경건한 삶, 그리고, 물질적 풍요를 동시에 얻으려는 것은 인류의 염원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서구의 기독교의 ‘신성’은, 1,400여 년간 이어온 이슬람 '신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게 유지되었다. AD 380년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이래, 14세기 ‘르네상스(문예부흥기)’라는 ‘인성(人性)’ 회복기까지 거의 1,000여 년간을 소위 ‘암흑시대(Dark Age)’라는 상태로 ‘신성’에만 매달려 있었다.
당시, 서구인의 모든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마을을 만들더라도 항상 교회를 먼저 세웠고, 교회의 지붕의 첨탑조차 마치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더 가까이 가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교회 앞의 광장은 자연스레 각종 행정 기구와 시장 등이 생겨 사회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의 주거지는 그 다음, 그 바깥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은 오직 주님을 찬양하는 종교 음악이었고, 조각과 미술도 성경 내용을 예술적으로 묘사하여 대중에게 주님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수도사는 수도원 등에서 신의 존재를 섬기며 개인의 쾌락을 배제하고 철저히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면서 소위 ‘신적인 삶’을 살고자 어떠한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육신의 고통이나 물질적인 부족보다 신을 향한 종교적 경건함이 더 우선시하였다.
하지만, ‘문예부흥운동’(14~16세기)이 전개되었을 때, 때마침 동방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린 중세 도시 국가들의 지원으로 예술의 영역이 확산되자, 그때까지의 정체적인 ‘신성’보다 창조적인 ‘인간 본위주의’로 사상이 바뀌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예술의 본분이 '신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이나 자연에서 예술 자체의 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더불어, 커다란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변화도 수반되었다.
기독교 교회가 인간 생활의 중심에 있었던 중세 유럽은, 신성이 우위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도 재화는 ‘신의 소유’여서 16세기까지는 금전 거래에서 ‘이자의 개념’이 전혀 없었다. 구약성경(시편 15: 5)에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많이 받지 않고…”라는 구절이 있고, 신약성경(누가복음 6: 35)에도 “…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꾸어주어라”(…Lend to them without expecting to get anything back.)는 구절을 보듯, 기독교도 처음부터 이자 개념을 부정하였다. 하지만, 중세 도시국가의 부유한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나 교황이 되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가, 다분히 가문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한 ‘이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이자의 개념’이 정당화되는 사회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돈 맛을 아는 일부 사제에 의한 면죄부 파동 등으로, 교황체제에 반발하며 '오직 믿음'을 내세운 '마틴 루터' 신부가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고, 이 운동이 확산되자 독일 등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신교의 세력이 확산되고 급기야 수 십년동안 구교와 치열한 종교전쟁을 치렀고, 그 결과, 유럽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었다.
18~19세기 들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중세 봉건체제가 몰락과 ‘질풍노도 운동’ 등 급격한 사회적인 변혁을 거치면서, 잠자던 시민의식이 깨어났다. 한편, 증기기관 등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은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생산 능력을 급증시켰고, ‘뉴튼’의 물리학이나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신성’과 갈등을 빚던 ‘인성’은 ‘지식과 물질의 향유’라는 더욱 큰 교만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물질문명이 발달하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분되었고, 약자에 대한 수탈은 빈부의 격차를 더욱 크게 하여 물질과 인간의 가치기준에 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물질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존재’에서 ‘향유를 위한 도구’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논리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영리 추구’라는 경제활동은 많은 선량한 기독교도들에게 윤리적으로 여전히 커다란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19세기말 독일의 ‘막스 웨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소유욕이나 영리 등 금전추구라는 인간의 욕망에 윤리적인 통제를 가하여, 향락, 방탕, 낭비를 절제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금욕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해서 얻은 ‘재산의 양’으로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낸다고 보아, 재산 획득을 위한 ‘영리 행위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그가 기독교도의 자본주의 활동의 방향을 이상적으로 제시했던 셈이다.
이렇게 경제의 개념이 바뀌자, 서양 경제학은 자본, 노동(기술), 토지를 생산의 3대 요소로 정립하여 발전하였고, 이 가운데 자본을 가장 큰 요소로 꼽은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 산업화와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 어떻게든 영리를 추구하며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얻으려는 서양 경제학은 ‘물질적인 풍요’에 가치를 두었다. 이는 비용과 효용의 결과물이고 그 중심에는 금리가 있었다. 무형 재산인 금리가 파생상품이라는 괴물을 만들었고, '고리 대부업'은 물질문명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예컨대, 2022년, 전 세계는 인플레 우려로 금리가 급하게 올라 많은 신흥국이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였고, 국내도 연일 오르는 금리로 수많은 기업과 가정을 파산과 도탄의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특히, 취약계층에 대한 금리의 공격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처럼,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물질적인 풍요는 상대적 빈곤과 빈부의 격차를 유발하여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사회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비록, 북구와 일부 서구 국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 제도를 지향하며,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이 '벤치마킹'할 정도로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지만, 이는 극히 일부 국가에 국한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한다는 서구가 비록, ‘물질 지상주의’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런 서구의 물질지상의 모습은 여전히 종교보다 물질을 천시하는 이슬람과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슬람은 서구 사회가 빈부격차 등 ‘물질’에 병들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비록 경제적으로 힘들더라도 고행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삶을 이어 가려는 자신들의 처지에 더 만족하자고 다잡는 모습이다.
이슬람의 교리는 초기 기독교처럼 세상 모든 재화의 최종 소유는 '알라(신)'의 것으로 내세운다. 때문에, 신성을 중시하는 이슬람은 지금까지 ‘이자’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이슬람은 ‘이자(리바)’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꾸란 2:275-278, 3:130, 4: 161). ‘‘이자’를 취하는 자는 불지옥에 떨어진다’(꾸란 2:275)고 강력히 경고하고 이자를 부정한다.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을 죄악시한다. 소유욕을 추구하는 자본 증식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고리대금업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여건이다. 꾸란이 이토록 ‘이자’를 혐오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신의 소유’인데도, 모함마드 당시의 ‘메디나’ 유태인들이 고리대금으로 부를 축적한 데 대한 적개심 때문이다(꾸란 4: 161).
이처럼, ‘이자’의 개념을 부정하는 무슬림은, 서구가 ‘물질 지상주의’ 중심의 천박한 가치관으로 인하여 금리인상에 따라 사회가 우왕죄왕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며, 서구를 매우 경멸스럽게 여긴다. 그래서일까? 서구와 대립각을 세워오던 '튀르키예'의 수상 ‘에르도안’은 물가가 폭등해도 금리를 오히려 더 내렸다. 서구 경제학과 그 윈칙에 역행하여 모두가 놀랐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랍권 은행은 이자가 없으니 금융이 낙후될 거라 생각할 수 있으나, 은행이 ‘이자’는커녕 오히려 ‘보관료’를 요구하는데도 모두 현금거래로 돈을 버는 웬만한 상점은 안전하게 돈을 보관할 곳을 찾아 은행에 돈을 맡기려 한다. 이들은돈이 한가득 담긴 커다란 포대를 들고 40~50분씩 줄을 서서 입금을 기다린다. 영업이 끝나면, 그날 매출액을 모두 은행에 보관하려는 거다. 그런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은 주로 대리인들이라, 혹, 외국인 고객이 나타나면 별도의 서비스 라인을 내어준다. 이런 모습은, 그 뒤에 살았던 이슬라마바드의 파키스탄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중에서도 서구와 접했던 일부 무슬림들은 아랍의 막대한 자금으로 부를 창출하고자 하였다. 1988년, 이집트 이슬람 원리주의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교리범위 내에서 부를 굴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이슬람의 ‘국부금융’인 ‘샤리아 금융’을 고안하였다. 이는 이슬람 율법과 경제에 정통한 이집트 ‘알 아자르’ 대학 출신 주요 위원들로 구성된 ‘샤리아 위원회’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금융이다. 이슬람 각국은 각자 법체제가 있지만, ‘샤리아’ 율법과 세속법 조문 간 충돌이 생기면, ‘샤리아 위원회’가 율법을 해석한다. 그 때문에, 일부 아랍국가의 ‘샤리아’ 금융은 ‘이자’ 개념을 ‘수수료’로 변형하여 운용하였다. 즉, 채권을 발행하여 그 돈으로 부동산 등 자산에 투자하고, ‘이자’ 대신 수익금을 배당금으로 주는, 일종의 ‘담보부 증권’이었다.
과거, 금융위기를 겪은 한국은, 유동성 확보차 이자가 싼 이슬람의 자금 유치를 위해 이러한 ‘수쿠크(시장)’ 채권에 면세 혜택을 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금융조건은 좋았지만, 이들이, 이슬람 원리주의에 가까운 ‘무슬림 형제단’ 소속이라, 자칫 ‘샤리아 위원회’에 의한 금융 ‘지하드’ 가능성을 고려하여 포기하였다. 그런데,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이를 주도하던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은 ‘아랍의 봄’ 혁명으로 '무르시' 대통령을 배출하며 잠시 득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년 만에 군부 쿠데타로 몰락하여 그 명맥이 끊기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집세 또한, ‘이자’의 개념의 연장 선상으로 보기 때문에 함부로 올리지 못한다. 따라서, 수십여 년이 지나도 한 가족이 세대를 이어 살기만 하면 집주인이 집세를 못 올린다. 그런 경우, 집주인은 집수리에 당연히 소홀해진다. 이게 인플레가 없던 과거에는 통했으나, 지금 같은 경제 구조에서 수십 년 누적되면 도시 전체가 슬럼화된다. 경제원리를 무시하고 종교 논리에 따른 탓이다. 한국도 과거 정부의 전세금 인상 억제 등 여러 가지 강력한 부동산 억제책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겪기도 했다. 종교나 정책보다 시장원리가 답이다.
'카이로'에 있던 폴란드 무관 숙소 만찬에 초청된 적이 있다. 숙소는 꽤 큰 저택으로, 월세가 상당할 것 같은데, 실제 월 집세는 불과 몇백 달러에 불과하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1930년대 초에 폴란드 정부가 현지인과 맺은 임대차 계약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 현지화의 인플레로 달러 대비 현지화 가치가 엄청나게 하락한 탓이다’라고 한다. 이제 집이 많이 낡았지만, 집주인은 무심하다. 그러니, 그 값에도 계속 살려는 입주자가 어쩔 수 없이 많은 수리비를 들여 자기 집처럼 고쳐서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