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 9.11 테러의 배후세력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로 밝혀지고 이들이 아프간에 은신 중인 걸 알게 된 미국은, 9.11 테러를 응징하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간의 집권 탈레반에게 이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하며, 미 항모 전단과 수많은 해군 전력을 인도양 인근에 집결시키는 한편, NATO국들과 함께 다시 ‘빈 라덴’의 근거지인 아프간(아프가니스탄)을 침공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은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변을 인도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사마에게도 아프간을 떠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탈레반은 믿었던 후견국 파키스탄이 자신들을 설득하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파키스탄과 단절하였다.
미국은 1995년 최초 탈레반 정권 수립 시, 아프간의 소련 괴뢰정권 붕괴 이후 내전이 계속되던 아프간의 질서를 잡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질서를 가져오기는커녕 시대착오적인 신정체제를 따라가자, 미국은 탈레반을 압박하게 된 것이다. 사실, 탈레반의 극단적인 정교일치 체제는 비슷한 정교일치 국가인 이웃나라인 이란마저도 이들을 비난하고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과격하였다.
미국은 탈레반이 자신들의 제의를 거부하자, 즉시 아프간 침공을 결정하였다. 미국은 즉각, 새 정부수반을 모색하는 한편, 유엔 안보리에 이들을 지원해 줄 ‘국제안보지원군(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ISAF)’ 창설을 요구하였다. 미국 주도로 결성된 ISAF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참가하였고, 결성된 지 2달 후인, 2001년 10월 7일, 부시 행정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미군 특수부대와 반군으로 구성된 군사력으로서 아프간을 침공했다. 미군은 수도 ‘카불’을 비롯한 대도시와 정부 시설, 방공망과 통신망, 공군세력 등 주요 군사거점과 탈레반 군사력은 물론, 알카에다 근거지에 대해서도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도움으로, 한때 탈레반에 의해 와해될 뻔했던, 북부동맹도 세력을 정비하여 탈레반 지상군에게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자, 미 공군은 대규모 근접항공지원으로 북부동맹을 지원하며 순식간에 탈레반을 격멸하였다. 결국 개전 한 달여 만인 11월 12일, 미군 특수부대의 도움을 받은 북부동맹은 수도 카불을 함락했다. 비록,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지만, 이 시점에서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났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어, 패잔병들은 남부 산악지대로 도주해 버렸고,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은 반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아프간에 새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무자히딘으로 소련에 저항했던 ‘카르자이’가 ‘파슈튼’ 부족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상당한 지도력을 보여 주어, 아프간 상황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사실, 대부분 부족 단위로 촌락에 거주하는 아프간인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진주와 ‘카르자이’ 정부수립은 자신들과 별 상관없이, 그저 중앙정부가 바뀐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오랫동안 척박한 환경에서 부족 단위로 살아오던 아프간인은 국가적 정체성보다 부족에 더 큰 소속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특히, 시골지역에는 탈레반 이전부터 이슬람 원리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탈레반의 정책은 이들에게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고, 지지 또한 없어서 탈레반 몰락의 또 다른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골지역과 달리 도시지역은 탈레반의 축출을 환호하고, 북부동맹군을 환영하였다. 이들 중 남자들은 탈레반의 강요로 길렀던 수염을 깎아 버렸고, 여자들도 부르카 대신 히잡을 착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간 금지되었던 각종 음악과 노래와 춤도 등장했다.
이처럼,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은 대규모 지상군 군사력 없이 특수부대와 공군력만으로 아프간에서 승리했다. 민간인 사상자도 매우 적었으며 미국군 사상자 또한 거의 없었다. 동시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유엔의 승인이 없었지만, 유엔헌장 51조에 규정된 자위권 행사로 미국의 침공은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2006년 들어 탈레반 세력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은 성공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카르자이’ 정부의 정국 장악력은 초기의 기대에 못 미쳤고, 탈레반의 반격이 시작되자 무능 부패한 아프간 정부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아프간-소련 전쟁의 재현이었다. 미국은 비록, 오랜 추격 작전 끝에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긴 하였지만, 그동안 너무나 큰 정치, 경제, 군사적 피해를 입고, 전쟁에 지친 일부 나토국마저 공동전선에서 이탈하려하였다. 특히, 미국은 현지인과 테러집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막대한 인원 피해와, 엄청난 전쟁 경비를 낭비하였지만, 테러와의 전쟁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도 못한 채, 정치적 결정으로 아프간에서 철수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2021년 8월 31일,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의 아프간 철수 종료일에 대국민 연설을 하였다. 2001년, 9.11 테러에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선포했다. 9.11 테러 직후에 개시된 아프간 전쟁은 이라크 전쟁보다 먼저 시작하였지만, 이라크 전쟁이 끝난 한창 후까지 이어온, 20여 년 전쟁의 터널에서 벗어났다.
연설의 핵심은, “다른 나라에 가서 '국가 건설'을 해온 중대한 군사작전 시대의 종료”를 천명한 것이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미국을 이끌어 온 외교정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며, “분명하고 도달 가능한 목표와 임무, 그리고 미국의 핵심 국가안보 이익에 명확한 초점을 맞추는 외교”를 분명히 했다.
바이든의 생각은, 그가 2021년 8월 8일 행한 연설에서, “우리는 아프간에 '국가 건설'을 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2002년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평화는 아프간이 안정된 정부를 수립하도록 도울 때 성취될 것”이라며, “아프간을 악(탈레반 지칭)으로부터 자유롭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을 돕겠다”라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완전히 배치된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내세운 약속을 뒤집으며 동맹과 아무 상의 없이 철수한 것은 '일방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동맹들은 이라크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다.
이 같은,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의 '사고' 자체는 진화하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세계가 변하고 있다”며 적어도, 미국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껏, 미국과 대립 각을 세워 온 이슬람 국가는 물론, 수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환영할만한 선언이었다. 아울러, 새로운 '평화 공존'의 틀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대서양 체제의 패권주의를 지키기 위해,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자유와 평등,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한국, 베트남 등 너무나 많은 각종 국제분쟁에 '현장에 대한 고려 없이' 개입하였다. 결과는 처참하다. 이제 아프간 전쟁에서 패퇴하며, 미국이 더 이상 '자국의 관점'에서 제3세계에 '횡포'를 부릴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그렇다고해도 세계의 평화가 지켜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