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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여유 Dec 08. 2022

우리의 레어템

수학 18점이 만들어 준 여유

“아이는 수학학원 안다녀?”

“수학을 잘하려면 문제를 많이 풀려서 유형이 익숙해져야 해”

“이제 선행 나가야 하지 않아?”    

 

팔랑귀로 살아왔음에도 다행히 이런 이야기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래전 나의 실패가 지금은 멀리 보며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안겨주었다.     




공부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학생은 공부를 해야하려니 현실에 순응하며 살던  집순이 중학생은 다들 다니는 유명 종합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이유는 혼자 할만했고, 무엇보다 엄마가 인근의 학원을 알아보실 정도로 아이 공부에 그다지 열성적이시지 않았다.(자식 공부에 관심 있는 티를 내지 않으셨다는 게 맞을까?)

엄마 말에 꽤나 순종적이었던 K-장녀는 이렇게 혼자 꾸역꾸역 중학교 시험들을 치르며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으레 공부는 혼자 해야겠다 생각했고, 여전히 학원은 나와는 관련 없는, 가기 귀찮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이과생 성향이라고 자부했던 나는 수학 1단원부터 갸우뚱하기 시작한다.

비슷한 듯 다른 기호(⊃, ∋),  그 놈이 그 놈 같은데 다르다고 하는 개념들(필요조건, 충분조건, 필요충분조건). 수업 이후 아무리 문제집 설명을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처음이라 그렇겠지, 적응하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아직 학원은 필요 없어’를 되뇌는 중 중간고사 시험일이 잡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준비기간 동안 열심히 하면 충분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안 되는 개념들. 방법을 바꾸어 보기로 한다.



‘수학 문제를 많이 풀어보자, 문제를 풀다 보면 개념이 이해될 수 있다, 비슷한 문제가 시험에 나올 수도 있다’

서점 이모님의 추천으로 문제집을 구입하며 야심 차게 계획을 잡아본다. 시험까지 3주가 남았으니깐 하루에 이만큼만 풀자.     

“문제를 푼다 – 모르겠다 – 이 문제만 가지고 생각할 시간이 없다 - 답지를 찾아보자 – 술술 읽힌다 -  드디어 개념을 알았다 - 이제 풀 수 있겠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을 모든 문제마다 반복하며, 열심히 하고 있는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3주의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교 첫 시험,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보게 된다. 심지어 몇 점이 나올까 기대하며.     




시험지를 받아 들자마자 분명히 공부를 했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하다.

 ‘나 이런 문제 풀었는데. 다 알았는데 이상하다.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 꿈이면 좋겠다. 찍어서 나가기에는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일단 풀자’      

결과는 “18점”.


중학교까지 수학은 늘 90점 이상이었던 내가 78점도 아니고 18점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찍은 것도 아닌데.

이 점수로 나는 수학 자신감을 잃었고, 2학년 수준별 수업을 위한 수학 반편성에서 꼴찌반에 포함되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다.

얻은 것 역시 수학 자신감. 그것에 더해 실패를 극복한 경험, 그리고 미래 내 아이를 바라보는 편안한 시선.      




“18점 사건” 직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친구가 다니는 학원에 등록한다.

수업을 듣고 문제를 푸니 술술 풀린다. 혼자 공부할 때 몰랐던 내용이 이해되는 것이 신기하고 개운하다.

근의 공식이 나오게 된 과정이 흥미롭다. 혹시 공식이 기억이 안나면 이렇게 풀어내면 되겠구나.

문제 하나를 한 시간도 넘게 고민해서 간신히 풀었는데, 그 짜릿한 기분이 참 좋다. 심지어 오랜 시간 공들여 푼 한 문제가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다시 수학의 재미를 천천히 느껴가며 점수도 큰 폭으로 상승하게 된다. 18점에서 60점대, 60점대에서 80점대, 80점대에서 90점대, 심지어 100점까지.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학원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답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고, 수학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들을 담담히 맞이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 아닐까.


요즘 대두되는 학습 정서, 자기주도학습, 메타인지, 회복탄력성에 대해 손뼉 치며 공감하는 이유가 “18점 사건”을 극복한 경험 덕분은 아닌지 나만의 “레어템”에 대해 자화자찬해본다.    


< 오답 수정 중인 시험지 >


얼마 전 아이가 학교에서 푼 시험지를 가지고 왔다. 20개 중에 틀린 개수가 18개.

초등학교 수학시험지가 이럴 수가 있다니. 심지어 딸에게 공부 관심 없던 친정엄마께서도 손주 점수를 보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걱정하신다. 아직도 K-장녀는 엄마의 눈치를 본다. 코로나로 결석해서 그렇다며 일단 안심시켜 드린다.


“와우, 이거 레어템이잖아? 아 앞으로 이런 시험지는 보기 힘들 것 같은데 기념으로 냉장고에 붙여놓자 “ 아이가 배시시 웃는다. 귀엽다.

과연 나의 이 경험이 없었다면? 이 쉬운 걸 왜 틀렸냐고 아이를 채근하며, 바로 문제들을 더 들이밀고 학원을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공부는 머릿속을 채우는 게 아니라 머리를 회전시키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직언이 있답니다. 단순히 수학공식을 암기하고 응용하는 것은 머리를 “채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머리를 회전시키거나 말랑말랑 유연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수학공부입니다. (강미선, 수학은 밥이다)



많은 전문가 분들이 하시는 말씀에 나의 “18점 사건”이 더해져 나를 참 편안하게 한다. 덩달아 아이도 편안하다. 물론 늘 편안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 편안하게 내려놓고자 하는 나의 다짐이기도 하다.

 

지금은 학원 수업과 문제집으로 채울 때가 아니다. 생각주머니를 크게 넓히고 깊게 비워놔야 할 때이다.

20년 이상된 오래된 기억을 바탕으로 지금 아이를 지켜보는 것이, 현실도 모르는 고루한 생각은 아닐지 늘 경계한다. 그래서 더 공부하게 된다.      

물론 수학교육 전문가는 아니기에, 또 입시까지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렇게만 하면 돼”라고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주변의 수학 불안감에 휘둘리지 않고 여유 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진도를 빨리 빼야 한다고 학원에 들여보내 이 어린이가 어린이 다울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뺏고 싶지 않다.

문제 유형을 익힐수록 정답률이 높아진다고 문제집만 들이밀기에는 말랑말랑한 생각주머니가 되돌릴 수도 없이 원하지 않는 모양으로 굳어버릴까 두렵다.     


지금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며, 몇 년 남지 않은 어린이 생활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조급함을 내려놓으며 틀릴 수도 있음을, 실패할 수도 있음을 마음에 담아두려 한다.

실패가 결코 실패가 아님을, 이 또한 인생살이에 있어 큰 자산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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