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가 죽었다.
나보다 13살이나 어린 1985년생, 39살이었다.
사실 나는 그다지 대단한 발레 마니아는 아니고, 가끔 인연이 닿으면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 발레단의 부산 공연을 보는 정도다. 굳이 말하자면, 고전 발레보다는 현대무용 쪽이 내 취향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2017년이었고, 한국인 발레리노 김기민 씨가 마린스키의 수석무용수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김기민 씨는 특히 '돈키호테'의 이발사 바질 역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여행하는 시기에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돈키호테를 공연하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예매 페이지에 들어갔는데, 아이고, 하필 김기민 씨의 공연은 우리가 러시아를 떠난 다음 주로 내정되어 있고, 길고 어려운 러시아 이름을 가진 발레리노가 수석무용수로 등재되어 있었다.
딱 그만큼 한풀 꺾이긴 했지만, 천하의 마린스키 발레단의 공연이니 잔뜩 부푼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갔다.
공연이 시작되고, 돈키호테 할아버지의 사연이 나오고, 여관집 딸내미 키트리가 아빠와 투닥거리고, 멋진 배경과 멋진 춤들이 연이어 나왔지만, 내 눈은 온통 바질에게 꽂혀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다고???'
너무나 식상한 표현이지만,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그가 바로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였다.
인터미션에, 수석무용수의 미모에 얻어맞은(?) 충격을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았다. 오스씨는, 말하자면 산초 같은 남자를 더 좋아하는 성향임에도, 내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어이가 없을 만큼 잘 생긴 남자를 눈앞에서 보면, 평소 고집스럽게 지켜오던 '게이의 식성' 따위는 참으로 하찮아진다. 천하의 '올곧은 게이 탑'인 나조차도,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성의 미모였다.
(과장이 조금 있습니다. 전 이제, 올곧은 탑, 아니에요. 그냥 약 챙겨 먹어야 하는 갱년기 늙은 게이일 뿐. 하지만 8년 전엔 나도 쌩쌩했다고!)
2부를 기다리는 동안,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정말 잘생기긴 했지만, 춤까지 끝내주게 추진 않겠지? 얼굴로 수석무용수 된 거 아닐까? 말하자면, 길거리 캐스팅 당한 아이돌 그룹의 비주얼 센터 같은 거지. 분명 김기민 씨보다 못 출거야."
발레 돈키호테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2부가 되면 사람이 이걸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고난도의 춤이 줄줄이 나온다.
솔로면 솔로, 파드 되면 파드 되,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는 시종일관 무대를 날아다녔다.
아이돌로 비유하자면 얼굴 천재 차은우가 춤으로 유명한 방탄소년단 지민처럼 추는 거였다.(능력치를 아는 아이돌이 적어서 죄송) 손바닥이 불이 날 정도로 박수를 치다 보니 어느새 공연이 끝나있었다.
난 예술가의 외모와 작품을 연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오페라를 예를 들면, 잘생겼지만 고음에서 힘들어하는 미남 가수보다 뚱뚱하고 질박한 외모라도 하이 C를 쭉쭉 뽑아내는 가수의 공연이 보고 싶다. 특히 이런 비싼 공연을 볼 때는 무조건 실력이 절대적인 기준이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의 공연을 보고 나니, 미안한 얘기지만, 김기민 씨는 완전히 잊고 말았다. 만약 다시 마린스키 발레를 볼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의 캐스팅을 볼 거라 다짐할 정도였다.
커튼콜 때 어찌나 집중을 했던지, 발레리나도 꽤 유명인인데도, 사진첩엔 온통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만 가득하더라. 상트페테레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다른 발레 공연 봤지만, 아... 이미 세기의 미남에 눈이 멀어서인지 모든 게 밋밋할 뿐이었다.
당시 북유럽 3주 계획이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첫 도시였다. 짐 부담을 늘리는 기념품은 하나도 사지 말자고 사전에 약속했지만, 공연이 끝난 후 마린스키 극장 한편에 자리한 기념품 가게에서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가 공연한 작품들의 대표 사진으로 만든 제법 큰 리플릿을 안 살 수가 없었다. 이 리플릿은 수많은 공연 팸플렛의 운명처럼 어딘가에 처박히지 않고, 지난 8년 동안 책장 한쪽에 진열 되어, 잦은 책장정리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살아남아있었다.
딱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인데, 그 작가의 사상이 독자의 삶에 큰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그럴 수도 있고, 한 번의 공연이 그럴 수 있다. 어쩌면 사람의 외모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의 평안한 영면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