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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수현 Oct 15. 2024

너의 초록에 닿으면

너의 초록에 닿으면


예전에 미국 청소년 SF에 한참 빠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메이저급이 된 헝거게임이나 메이즈러너 같은 작품을 보면서 한참 소년과 소녀들의

위기와 극복해나가는 과정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 '너의 초록에 닿으면'은 처음 읽었을 때, 예전에 즐겨 읽던

미국 청소년 SF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빙하기가 찾아오고, 사람들은 지하로 도망쳐서 좁은 공간에 밀집하고 살아가거나

혹은 추운 지상에서 겨울이 이어지는 땅을 조금씩 개척하며 살아가는 세계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소년과 소녀는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놓인 알수 없는 운명에 이끌린다.


캬! 이 무슨 전형적일 정도의 그 시절 그 트렌드의 소개글이자 서문같은 전개일까?

아!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때 감동하며 책을 읽고 즐거웠던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너무도 흡족했다는 의미이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조금 불모지라는 SF 장르에서 외국 작품의 향수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세련된 느낌과 클래식한 요소를 적절히 믹스한 수준높은 작풍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다시 평가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의 배경이나 시작은 그런 향수를 느끼게 하였지만

그 전개와 결말은 결코 기성 트렌드를 답습하지 않는 작품 특유의 매력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헐리웃 스튜디오에서 탐낼 목숨을 건 위기나 세계의 비밀을 둘러싼 음모 같은 것은

이 작품에서 의외로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오는 것은 그저, 서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건실하면서도 순수한 소년과 소녀이고,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대서사시의 여정을 걷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에 손닿을 수 있는 상대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좀 충격을 받았다. 아니, 겨울로 뒤덮인 세계에서 서로 떨어진 세계의 남녀가

만들어내는 것이 이런 담백하면서도 소소한 이야기라니. 

뭔가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거대한 여정은 안하는 거야?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그런 생각을 반성했다.


어이없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구나라는 생각에.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SF라는 장르에 너무 액션이 익숙하게 느껴져 버린 것 같다. 

외계인이나 의문의 바이러스나 기계의 반란이나, 항상 미지와의 조우에서 주인공들은 그들과

치열한 액션을 벌이곤 하는 것이 헐리웃의 정석이었으니깐.


하지만, SF는 말 그대로 공상과학소설이다. 그리고 그 장르가 그리는 세계는 이 작품처럼

액션과 음모, 긴장이 가득하지 않은, 온기와 연결, 그리고 손을 마주잡는 것이 목표인 세상 또한 포함될 것이다.


어찌보면 익숙한 느낌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에서 그리는 소년과 소녀의 만남, 그리고 그리움, 마침내 연결됨에 대한 주제가 겨울이 이어지는 

세계에서 너의 초록에 닿는다는 제목 그 자체와 선명하게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것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 세계 어느 시간 속에서도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boy meet girl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수 밖에 없고,

거기에는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폭력적인 시퀀스는 굳이 필요치 않다.


그들의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온기를 느끼고 행복을 느끼며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 행복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하게 되니깐.


여러모로 그런 의미에서 SF라는 장르에서 오랜만에 맛본 따스한 작품이었다.

예전에 한참 사이버펑크가 유행하던 시절에 나왔던 영화 '너바나'에서 주인공이 모든 해킹 과정을 뚫고 

마침내 조우한 최종 미션이 오래된 학교 칠판에 쓰여진 글자 '너바나'를 

칠판지우개로 지우고 돌아섰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 결국 SF의 본질은 사람이란 것을 다시 되새길 수 있었고.


아마존의 여름과 빙하의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 적절하게 놓인

우리에게 축복과도 같은 독서의 계절 가을에 읽어보기 좋은 작품이라 말하며 리뷰를 마친다.



P.S 1 난 끝까지 말릭이 흑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얘가 뭔짓하지 

않을까 조바심내며 읽었다. 그런데... 그냥 좋은 사장님이었다. 의심해서 미안해.


P.S 2 왜 난 세토가 펭귄이라고 생각했을까? 표지에도 떡하니 늑대로 나오는데. 

근데 너무 펭귄이라고 확고하게 생각하고 장면을 연상했더니, 머리 속에 모든 장면에서 라르스가 

펭귄을 안고 있는 모습만 떠오른다. 이미지 어쩔...


 



 



#너의초록에닿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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