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iraeth Dec 09. 2022

하기 싫은 일로 10년(+α) 먹고 살기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의 아이러니

나는 개발자다.


2005년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지금 현재 개발자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한 길을 판 줄 알 것이다. 하지만 근 20년을 컴퓨터 산업에서 도망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나와 같은 과를 나온 친구들은 내게 '네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막연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래서 내겐 수능 후 학과를 선택하는 것도 일이었다. 사실 서울에 있는 대학만 가면 되니 전공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아무 과나 선택해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교무실에서 만난 친구가 자기는 컴퓨터공학과를 지원한다고 했다.


중학교 땐 세이클럽, 고등학교 때는 싸이월드에 빠져 있었던지라 왠지 나도 뭔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도 컴퓨터공학과를 지원해야겠다 생각했다. (철이 없었죠...) 학교와 학과 리스트를 쭉 보다가 '컴퓨터 미디어 공학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방송 쪽이랑 뭐 하는 건가? 티브이 보는 걸 좋아하고 인터넷 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여길 지원해야겠다'

(철이 또 없었죠...)


여하튼 나는 지금은 연락도 안 하는 그 친구를 따라 이 계열로 지원해서 대학에 갔다. 알고 보니 학부란 1학년 때 미디어와 컴퓨터공학 관련 지식들을 맛보기로 배우고 2학년 때 가고 싶은 학과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첫 컴퓨터 관련 수업인 <<C언어>>를 듣는 날, 나는 몇 가지를 강렬하게 알 수 있었다.


첫째,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영어를 시커먼 컴퓨터 화면에 쳐야 한다는 것.

둘째, 내가 아는 생각했던 컴퓨터과는 웹디자인이지 공학이 아니라는 것.

셋째, 내가 싫어하는 것만 모아 배우는 곳이 있다면 바로 내가 수업을 듣고 있는 이곳이라는 것.


그래도 아직 내게 희망은 있었다. 2학년 때, 미디어공학과를 선택하면 되니까!


하지만 나약한 나는 컴퓨터공학과를 선택했다. 함께 놀던 동기들 무리가 모두 컴퓨터공학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나에겐 혼자 학교를 다닌다는 게 C언어 보다 무서웠다.


3학년이 되고 IT로부터 첫 도망을 실천했다. 동기들이 점점 군대, 어학연수 등으로 휴학을 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큰 마음먹고 광고를 배우기 위해 휴학을 했다. 왜 광고냐고? 초등학교 때 본 <<바람은 불어도>>에서 최수종이 '파 쏭쏭 계란 탁'이란 카피로 대박을 치는 걸 보고 그때부터 나는 카피라이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원하던 광고 관련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쓰겠다.) 6개월 후, 내가 하고 싶은 건 광고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로 뭔가를 만드는 것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 당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번뜩 생각나서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컴퓨터공학과를 나왔으니 가장 쉬운 취업 방법은 관련 직종일 테니 일단 이쪽에 취업을 하자라는 마음으로 IT산업의 일개미가 되었다. 하지만, 투자는 생각조차 못하던 내가 뭐든 시작할 수 있는 큰 자금을 만들기엔 월급을 모으기론 턱없이 부족했다. 자취를 하니 월세에 생활비 등등. 또 직장인이 되니 씀씀이는 더 커졌다. 그렇게 현대판 노예처럼 카드값을 갚아가며 4년 8개월을 버티다 퇴사를 했다.


퇴사 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오며, 결심했다. 절대 다시는 컴퓨터 냄새나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또 IT 산업으로 돌아왔다.


영어를 너무 못하는 내겐 여기서 가장 잘 먹고살 수 있는 쉽고 빠른 방법이 기술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겐 그 기술이 코딩이었다. 그만한 기술이 있다기보다 일단 이력서에 경력을 그럴싸하게 쓸 수 있었다. 컴퓨터공학과에 테크 회사까지 다녔으니까. 다행인 건 신기하게도 한 3년 전부터 그래도 이 일이 조금은 만족스럽다. 그렇게 하기 싫지 않다. 그렇다고 좋아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배우고 싶고 해보고 싶던 광고, 우쿨렐레, 도자기, 클라이밍 등은 얼마 가지 않고 그만뒀는데 그렇게 하기 싫고 끔찍해하던 "코딩"을 업으로 삼고 꾸역꾸역 아직 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심지어 이제 막 이 일이 좋아지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다. (금융 치료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지금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 국어를 뒤로 하고 가장 싫어하던 과목인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알파벳이 난무하는 코딩을 하며 살고 있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강연이나 책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세요'라고 하면 나는 아직 조금 확 와닿지 않는다. 내겐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한 주제다.


그저 일단 먹고살기 위해 지속했던 하기 싫은 일이 나처럼 10년 뒤엔 좋아질 수도 있을 테니까. 좋아한다는 마음은 언제나 변할 수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캐나다에서 보낸 7번의 연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