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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 돈의 쓸모

세상에 쓸모없는 일이 어디 있나요

by 한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중해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라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만연한 미소로 물음을 던졌을 때, 친구가 딱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런 걸 왜 생각해? 굳이?”

아. 무궁한 상상의 영광 속을 넘나들려고 하던 높은 기대가 한순간에 팍 꺾였다. “그러게. 굳이”

갑자기 인터넷에서 본 일화가 생각난다. 한 연예인은 친구들이랑 한 달에 한 번 굳이 데이라는 것을 정해두고 산다고, 낭만을 찾기 위해서는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므로 굳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일을 하나씩 하는 날이라는 의미란다. 반가움이 드는 것은 나에게도 비슷한 굳이 소비, 굳이 데이가 있어서이다.

아끼는 데에는 소질이 없지만 매일의 소비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그런데 가끔은 꼭 사지 않아도 되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을 때가 있는데, 스스로를 귀한 사람으로 대하고 싶을 때이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주일을 몇 바퀴나 보냈을 때, 재지 않는 무한한 친절과 웃음이 그리울 때, ‘그래 이 맛에 돈을 벌지’ 하며 다독이고 싶을 때 일명 허튼 돈을 쓴다. 허튼 돈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참고 참다 싹둑 자르는 것이 아닌 아주 살짝 다듬기만 하는 머리, 손톱의 거스러미 정리, 새로 장만한 잠옷과 이불, 다른 사람이 타 주는 커피, 값비싼 향초. 당장 하지 않아도 아무 일 없는 것들에 쓸데없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들은 각각의 화폐 가치보다 더 오래 그리고 깊이 나를 쓰다듬는다.

자주 가는 미용실은 커다란 창 너머로 호수가 보인다. 정리할 머리에 관해 이야기하면 직원은 샴푸실로 나를 데리고 가서 머리를 감겨준다. 시간의 여유 없이 준비시간에 딱 맞춰 씻던 집과 달리 미용실에서는 구석구석 마사지까지 하며 오랫동안 정성스레 감겨 주신다. 유난히 손톱의 굳은살과 거스러미가 신경 쓰이는 날에는 손톱 정리를 한다. 오일을 듬뿍 바르고 니퍼와 푸셔로 한 손가락씩 공을 들인다. 하루에도 여러 번 소독제로 씻다 보면, 손은 금세 건조해지고 갈라졌다. 핸드크림은 아무리 발라도 스며들기도 전에 다시 손을 씻을 일이 생겼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이불은 계속 사용해 오던 것을 이어서 사용했고, 밖에서 못 입게 된 옷을 골라 잠옷처럼 입었는데, 무릎이 삐쭉 나온 바지와 목덜미가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스스로를 마주치면 마음의 때인지, 몸의 꾀죄죄함인지 모를 것이 내게 아주 짙게도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는 잠옷을 두 벌 샀다. 늘어난 옷 대신 잠옷을 입은 지 어느덧 짧지 않은 시간이 되었고, 이미 겨울용 잠옷을 몇 벌 가지고 있지만, 그들 중 보풀이 생길락 말락 한 것들을 버리고 단정하고 포근한 것을 새로 걸치기로 했다. 책상과 내의, 잠옷처럼 자주 쓰는 것들은 항상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이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나와 가장 밀접히 닿아 있고, 그 안에서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내 것을 사며 가족들의 것도 구매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분 좋은 상태로 잠에 들기를, 잔뜩 가라앉은 마음은 모두 버리고 편안한 밤만을 보내기를 바라면서.

미용실에서 나오는 길은 들어가던 길과 사뭇 다르다. 산뜻한 바람은 아직 촉촉한 머리칼에 닿아 상쾌한 향을 껴안는다. 좋아하는 샴푸 향과 마사지로 한층 또렷한 정신을 느끼며 옆 건물 카페로 향한다. 남타커(남이 타 준 커피를 이르는 내가 만든 줄임말)를 마시기 위해서다. 산미와 보디감과 같은 미묘한 맛 차이를 감별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종류의 원두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주문한 커피는 집에서 마시는 것보다 더욱 맛있게 여겨진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시원한 커피 한 잔으로 찌뿌둥하던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질 수 있다. 집에 돌아와 고이 개켜진 잠옷을 입고 푹신한 침대로 들어간다. 향초에 불을 붙이고, 타닥타닥 소리와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함께 사는 이에게 묻는다.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없는데?”

바보 같은 사람. 달라진 게 없기는 왜 없어.

기껏 돈을 들였는데 달리 보이는 것이 없단다. 다른 것에서라면 서운할 법도 할 텐데 이상하게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다른 이는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차이가 내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나는 알고 있지. 나만은 분명히 알지. 스스로 소중히 대하고 싶을 때 찾은 미용실에서는 꼭 마지막에 손길이 더 필요한 곳이 없는지 물었다. 나는 언제나 충분하다고 답했는데, 그건 늘 진심이었다. 다듬고 싶었던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익숙한 매일 안에서 모난 마음이었으니까. 잘 정리하여 말랑거리는 손끝처럼 단단히 뭉쳐 있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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