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To-Do-List’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저것 펼쳐 놓고 한꺼번에 진행하는 일들이 많다 보니 바탕화면에는 “oo 프로젝트”, “oo 공부”라는 폴더만 쌓여갔습니다. 할 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뭔가를 놓친 듯한 불안감이 남습니다. 집중이 필요한데 계속 머리 한쪽이 묵직한 느낌입니다.
땔감으로 쓰려고 뒤뜰에 쌓아 놓은 나무, 잘릴 차례를 기다리며 목재소에 쌓여 있는 통나무들을 “Backlog(백로그)”라 부릅니다. 이 ‘백로그’는 ‘언제 할지는 모르지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말할 때도 쓰이구요.
<데이터의 비유>
끝내지 못한 일이 쌓여 있을 때, 그것들을 실제로 하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 머릿속엔 지속적인 부담이 남습니다. 미완의 일들이 주의력을 끌기 위해 경쟁하고 잡념을 일으키며 효율을 떨어뜨리고 실수의 가능성을 높입니다.
정보학에서 'Data Packet(데이터 패킷)'은 정보를 일정 크기로 쪼개 전송하는 단위를 말하는데, 실제 정보인 Payload(페이로드)와 이를 관리하는 부수 정보 Overhead(오버헤드)로 나뉩니다.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정신적 부수 활동, 즉 머릿속 오버헤드가 너무 크면 삶의 속도와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우선순위의 결정과 변경>
"덜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으니 미뤄 놓아도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선 수북이 쌓여 있는 백로그(Backlog)를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그중에서 당장, 당분간 해야 하는 일을 몇 개 선정하여 눈에 보이는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런데 일의 우선순위는수시로 바뀌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실행을 하는 중에도 신속히 재조정이 필요한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또 원할 때 쉽게 이 리스트를 변경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칸반 시스템>
칸반은 우리가 길에서 흔히 보는, 바로 그 '간판(看板)'의 일본어 발음입니다. 1940년대에 일본의 토요타 사에서 시작된 업무 관리 방법론으로,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어 왔고 특히 최근에는 개인을 위한 시간 관리법으로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큰 종이나 보드에 ‘우선 할 일’, ‘진행 중’, ‘완료’와 같은 열을 만든 다음, 해야 할 일을 포스트잇에 적어 '백로그'에 붙여 둡니다. 우선순위가 높은 일이 적힌 포스트잇을 ‘우선 할 일’로 옮기고 진행 상황에 따라 위치를 ‘진행 중’, ‘완료’로 옮기기만 하면 됩니다. 매일 또는 주 단위로 보드를 점검하며 계획을 수정하여 새로운 포스트잇을 추가하면 되구요.
단,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수(WIP, Work In Progress)를 제한하는 것이 중요한 원칙입니다. 처음부터 우선순위에 따라 몇 가지 일만 백로그에서 가져와 시작해야 하는 것이죠.
유명 온라인 게임 개발 업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벽에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여 놓고 여러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진행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디지털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게임 개발 업체에서도, 앱이 아닌 포스트잇과 같은 아날로그적 방식을 쓰는 것을 보고 반갑기도 하고 칸반 시스템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졌던 것 같습니다.
포스트잇과 실물 보드를 사용하는 것을 추천하는 편입니다. 칸반을 위한 앱도 유용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디지털 앱이라는 특성상 휴대폰을 열어보다 자칫 알고리즘의 토끼굴로 빠지게 하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