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아일체(冊我一體), 아트의 경지
<잊힌 능력>
종일 컴퓨터 화면과 휴대전화만 바라보고 있으니, 예전처럼 책이 잘 읽히지 않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줄었고, 무엇보다 예전만큼의 재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책 읽기는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카페에서도 가볍게 책을 펼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 한켠을 조용히 정돈하고서야 기껏 몇 쪽을 읽게 됩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AI에게 묻는 것은 편리하지만 머릿속은 늘 분주하기만 합니다. ‘모든 공부’를 표방했던 제 삶에 꽤나 근본적인 위기가 온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책 읽기를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어진 이유>
오랫동안 책 읽기를 학교 공부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읽고 싶을 때 읽고, 싫으면 과감히 덮을 수 있는, 그래서 더 즐거운 놀이이자 좋은 의미에서의 ‘사치’로도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뇌가 비어 가는 또 썩어 가는 느낌을 막기 위해서 억지로 책을 찾아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책 읽기를 그냥 좋은 습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멋진 일’이라 세뇌해 보기로 했습니다. 영화 [타짜]의 평경장의 대사처럼 책장을 넘기는 이 사소해 보이는 행위를 ‘예술’이라 칭하는 순간 책 읽기가 훨씬 재미있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응? 혼이 담긴 구라, 어잉?
<읽기가 예술이 되는 순간>
예술의 학문적 정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일단 ‘멋진 것’을 두고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이런 시기에야말로 시간을 내어 읽고 집중력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이 행위를 예술 쪽으로 살짝 끌어당겨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혼자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혹시 저만의 민망한 주장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선, 제가 찾아본 ‘예술’의 요소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 감정과 사유를 표현하거나 환기하는 활동
- 언어, 소리, 이미지 등 감각적 형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
- 창조성 또는 재창조성을 포함하는 것
이 기준을 보면 읽기는 분명 예술입니다. 책 읽기는 당연히 감정을 흔드는 작업입니다. 문장을 단순히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글의 빈틈을 채우고, 인물의 의도를 추적하고, 장면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창의적 과정입니다. 겉으로만 조용할 뿐 ‘눈부시게’ 능동적인 재창조의 예술입니다.
<보이지 않는 산출물의 힘>
‘예술 행위라면 무언가 결과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이런 의문이 남습니다. 읽기에는 캔버스도, 음원 파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려면 읽기가 ‘내적인 산출물(Internal Artifacts)’을 만들어 내는 과정임을 강조해야 할 듯합니다. 또 책을 읽는 이뿐만 아니라, 책 읽는 이가 속해 있는 사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을 저 자신에게 확실히 해 놓으려 합니다.
읽기는 분명 변화를 일으킵니다. 감정의 이동, 생각의 조정,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과 통찰.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산물이 읽기를 예술의 범주에 올려놓는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문장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무엇을 부당하다고 여기는지에 대한 감각은 모두 읽기를 통해 재구성됩니다.
읽기를 통해 쌓인 내적 예술의 산출물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생각이 깊어진 사람, 언어가 정제된 사람, 타인의 마음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에 다른 온도를 만들어 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예술적 산물들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말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오고 상호작용의 결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렇게 책은 읽은 사람의 마음, 표정, 수많은 선택과 사회적 관계 속에 서서히 스며들어 버립니다. 책 읽기처럼 오래 지속되고 깊이 있는 예술이 또 있을까요.
<선언>
저는 오늘부터 조금은 당당하게 ‘예술가’인 양 살아보려 합니다. 스크롤을 내리는 동작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로 책장을 넘기고, 내 안에 새 문장을 세우고, 새로운 관점을 길러내고, 감정의 결을 조정하는 사람.
한 줄을 읽든, 한쪽을 읽든, 그 작은 순간 속에서 내적 예술은 계속 완성되고, 그 변화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닿을 거라 매일매일 확언하고자 합니다. 책 읽기가 다시 한번, 즐겁고 멋진 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술가 :) 엄태경
언어정보학 박사
한국미래교육경영원 대표
AI 디지털 융합 교육 전문가
"기술보다 사람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