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장애 이야기
“선생님, 전 왜 이렇죠? 계속 너무 식욕이 없어요.”
그날 그녀는 다른 날보다 많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담을 하며 자신의 모습을 점차 이해하기 시작했다. 식욕도 없는 이유,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복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물의 근원에는 “가출한 엄마를 찾아간 날이었어요.”로 시작되는, 매몰차게 자신을 밀어냈던 엄마와의 스토리가 숨어있었다. 그날만큼은 더더욱 나도 그녀와 그 어둡고 차갑던 그 골목에 함께였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전형적인 폭식증 내담자의 이야기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일주일에도 여러번 특히 저녁에 과식을 하는 이슈로 상담을 시작한 그녀, 현재의 체중에 특별한 불만족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이어트 후에 체중의 변화도 특별히 없었고 점심은 구내 식당에서 동료들과 편안히 먹었다. 그런데 퇴근 후 저녁만 되면 자꾸만 달고 매운 음식들이 당겨서 좀더 먹게 되니 이러다 폭식증으로 가게 될까봐 불안하다고 했다.
몇 차례의 상담 후 그녀는 빠르게 안정이 되었다. 타인에 눈치 보고 맞추느라 억지로 웃고,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자꾸만 웃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한심하고 자기주장도 못하는 것 같아서 자기 혐오의 말들이 수시로 떠올랐던 그녀는 이제 직장이나 친한 친구들에 대해 안정도 느끼고 자기 혐오의 감정도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고민은 과식이 아닌 '식욕 없음, 삶에 대한 기대 없음'으로 주제가 바뀌었다.
“선생님, 전 왜 이렇죠? 계속 너무 식욕이 없어요. 어떤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없고, 막상 먹고 싶어도 금방 물려요. 지금 이대로의 삶도 괜찮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지만 뭔가 불편한 느낌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고생만 한 엄마와 여행을 준비하다가도 금새 ‘일본의 온천과 우리 나라 온천이 뭐 다르겠어?, 여기 박물관도 뭐 뻔하지 않을까?, 이 나라 광장은 멋져 보이지만 사진이랑 비슷한데 가는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가 여행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 지치기만 해요.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가도 남들도 그렇듯 밥 먹고, 영화 보고, 차 마시니까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게 맞나? 난 결혼은 역시 아닌가 봐. 나도 이런데 이 남자도 마찬가지겠지. 그냥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들만 가득해요.
예전에 우울하거나 걱정이 많거나 불안한 것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저 식이장애 말고 다른 병일까요? 아니면 남들도 다 이런데 제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가요? 어떻게 하면 설렘이나 기대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마음 속 지하실에 감금된 기억
우리는 그녀 내면에 설렘이나 기대감을 갖는 것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파트)가 있는지 탐색해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기대감을 갖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드는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인데 그런 마음이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 인간은 누구나 양가감정이 있음을 전하며 내면의 작은 생각이나 감정들도 괜찮으니 찾아보도록 나는 부드럽게 권했다. 답답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다시 물었다. 설레임이나 기대감을 가졌다가 실망하거나 상처받은 경험이 있다면 아주 사소한 일, 오래전 일도 괜찮다고 그녀의 내면을 탐색하도록 독려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내면 깊숙한 곳에 ‘이 얘기는 더이상 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사실은 계속 맴도는 기억이 있는데 마음 한 켠에 ‘이제 어린시절 엄마에 대한 얘기는 그만 좀 하라’고 하는 마음이 커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특히 사람에 대해 기대나 설렘을 가지는 것이 뭔가 염려가 된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왜 한 장면이 떠오르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면서 10살 때 생생한 한 장면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가출한 엄마를 찾아간 날이었어요. 차비가 없어서 한참을 걸어 찾아간 그곳은 아주 어둡고 퀘퀘한 냄새가 났어요. 비좁은 골목길을 한참을 돌고 돌아간 그곳은 허름하고 아무 소음도 없는 적막하기 그지 없었죠. 너무 무섭고 긴장되었어요. 금방이라도 험상궂은 아저씨가 쫓아와서 어떻게 할 것 같았지만 엄마를 만나야만 했어요. 엄마를 데리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두드렸을 때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 무서움을 잊을 만큼 반가웠던 그녀와 달리 문을 열고 나온 엄마는 그녀를 보자 표정이 굳어졌고, 엄마 말을 안듣고 최고로 화가 났을 때보다도 더 무서운 표정이었다고 한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 표정을 그녀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녀는 얼음이 되었고, 왜 왔냐며 아무 감정 없이 대답을 요구하는 엄마에게 어렵게 용기를 내어 '같이 집에 가자'고 했지만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이 세상에 나만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외로움, 두려움, 단절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고..
그때부터 그녀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게 기대나 설렘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 엄마가 나를 버렸고, 그런 엄마를 만난다는 일념으로 용기를 내어 멀리 찾아왔지만, 엄마는 또다시 그녀를 거절했다. 두 번 버려진 것이다.
아이는 엄마를 만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희망과 기대에 차 있었다. 술 취해서 화만 내는 아빠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엄마가 환하게 웃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엄마가 젖가슴에 숨이 막히도록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도 나를 보고 싶었다고 할 것라는 희망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 강아지'라며 뛸 뜻이 기뻐하며 다시 한없는 그 사랑을 줄테니 엄마만 만나면 다시 행복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엄마를 찾아 어둡고 무서운 여행을 떠났지만, 그 여행의 끝을 절망이었다.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그런 느낌일까?
그녀에게 셀레임은, 기대감은 나쁜 것이다. 그랬다가 10살 때처럼 그런 지옥을 경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옥을 경험하느니 애시당초 찬물을 끼얹는다.
‘기대하지마’
‘설레이지마’
‘그거 별거 아니야’
‘그거 아는 맛이야’
‘다 거기서 거기야’
‘그 놈이 그 놈이야’
‘누가 날 사랑해준들 내 인생이 뭐 달라지겠어?’
‘그 사랑도 결국 식으면 난 또 혼자야’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되내었던 말들은, 10살 때 엄마에게 두 번 버려졌던 그 꼬마 아이가 또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계속 되내었던 말이었다. 이 장면이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그녀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식욕도 없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도 사랑인지 의심하게 되었던 것임을 그녀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고 한다.
그녀의 내면의 10살의 꼬마아이는 그 사건 이후로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고, 지금까지 그녀를 사랑해주고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또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 그 시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10살의 꼬마 아이를 가슴 가득 안아준다. 꼬마 아이가 엄마에게 원했던 것들을 이제 성인인 그녀가 그 꼬마 아이에게 아낌없이 준다. 내면의 꼬마 아이의 슬픔과 두려움을 외면했을 때 힘들었던 그녀는 이제 그 꼬마 아이를 이해하고 보살핀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웃음을 되찾았다. 이제부터 그녀는 행복을 꿈꾸어도 된다고 자신에게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