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은있다 Aug 20. 2023

식이장애라는 갑옷

식이장애 이야기


엄마가 울며 불며 사정해서 마지못해 끌려왔다는 도영이는 예상보다 자기 얘기를 곧잘 풀어냈다. 



상담은 한 번쯤 받고 싶었어요.

살은 너무 많이 빠졌고, 다이어트를 왜 하냐고 하면 딱히 이유가 없어요.

우울하고, 불안해서 잠들기도 어려워요. 때때로 공황이 와서 숨쉬기 힘들 때도 있어요.

4~5년 전부터 그랬지만 한 번도 누구에게 말한 적 없어요.



중학교 내내 왕따를 당했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자신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와도 나누지 못했던 이유를 묻자, "할 사람이 없어요"라며 웃는다. 


낯선 내게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도 상담실 밖에서 엄마가 듣지 않을지 신경을 쓰는 것 같은 눈치에 부모님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 어떤지 묻자 정색을 했다. 절대로 부모에게는 비밀이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없이 엄마와 내가 단둘이 상담하는 것도 절대로 안된다고 엄포를 놓는다. 



엄마가 생각하는 아이의 어려움이나 해결하고 싶은 점을 묻자, 엄마는 난처해하며 아이와 최근 2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면서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화가 난 듯,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린다. 엄마보다는 아빠가 친하다는 말로 얼른 분위기를 바꾸려 하자 아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와는 친한 것이 아니라 아빠가 원하는 말을 해줄 뿐이라고 한다. 아이의 말에 엄마는 깜짝 놀라 하는 눈치였다. 아이는 자신에 대해서 엄마가 알기를 원하지 않고, 엄마도 아이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아이가 부모에게 힘든 일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로 짐작하는 부분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얼굴을 붉히며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화가 나가는 듯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모습과 달리 아이는 혐오스럽다는 듯 엄마를 향해 '피해자 코스프레하지 말라, 짜증 난다'며 적나라한 적개심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도영이 부모님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아빠는 밖에서는 젠틀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가족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가부장적이었다. 엄마를 무시하고 폭언을 하거나, 대꾸도 하지 않기 일쑤였고 갑자기 화가 나면 폭력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와 대화 자체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이도 아빠가 언제 화를 낼지 알 수 없으니 항상 아빠 눈치를 보고, 아빠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 눈치를 살피느라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왕따를 당해도, 친구가 없어도, 학교에 가기 싫어도, 극심한 불안으로 공황발작이 와도 부모에게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부모는 도영이에게 안전한 대상, 믿을 수 있는 보호자가 아니었다. 


날씨 얘기를 하다가도 화를 내면서 갑자기 집을 나가라, 호적을 파겠다고 하는 아빠는 도영이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빠에게 무시당하고 화가 난 감정을 도영이에 풀었던 엄마는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 엄마가 힘들 때마다 친구나 친척들과 통화하며 아빠 얘기는 쏙 빼고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자신을 가십거리나 조롱의 대상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위로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 혐오스러웠다. 


아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안전함을 느낄 수 없었다. 


아이는 알고 있다. 왕따를 당할 때 자기 잘못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학폭위가 열리고 그 괴롭힘이 어떤 형태로든 멈출 수도 있었다는 것을. 공부에 대한 압박감도 내려놓아도 된다는 것을. 

자신의 진짜 고통을 감추기 위해 다른 이유들이 필요했다. 집을 벗어날 수 없고, 부모가 바뀌지 않을 것이며, 이 세상에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없으니 절대로 약점 같은 것은 잡히면 안 된다는 강력한 자기 보호였다.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갑옷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임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도영이도, 도영이의 부모님도 딱 한번 상담을 하고 그 후로는 오지 않았다.

아이는 그날 이미 내게 말해 주었다. 

"상담을 한 번쯤은 받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좀 더 정리가 되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역시 한번 보고 말 사람이기 때문에 이만큼 말할 수 있었어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예요"

"도영아, 누구라도 괜찮으니,, 부디 네가 믿을 수 있는 존재를 만나기를. 그래서 잠시라도 안심할 수 있는 순간을 경험하기를 기도할게...."



부모의 부부관계가, 가족 내 긴장상태가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 어른들을 알지 못한다. 뉴스에 나오는 신체적, 폭력적 학대가 아니더라도 가족 안에 긴장과 갈등이, 어른들이 다양한 이유로 보여주는 부적절하고 부정적인 감정의 반응들이 아이에게는 생존을 위협할 수 있음을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사과받지 않는다고 해서 내 고통이 거짓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