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차 엄마, 그런데 일도 합니다.
2023년, 내년이면 나의 딸 린아는 기존의 한국식 나이로 12살이 되고, 나 역시 12년 차 엄마가 된다. 엄마로서 10년 이상을 직장인으로 곧 20년을 바라보게 되며(심지어 일하는 엄마로 12년을 보내다니!), 앞으로의 내 인생에 프레시한 새로움 한 스푼을 추가하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과 워킹맘으로서 딸을 키우며 그동안 느끼고 경험했던 여러 이야기들이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작은 응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이렇게 '글'이라는 도구로 나와 딸의 이야기를 한 번 써 내려가 보기로 결심했다.
20대 끝자락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보다 조금 이르기도 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자취를 하긴 했지만 가정을 이루며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했다는 성취감과 신혼의 즐거움에 더 오래 취해있고 싶기도 해 아이를 갖자는 생각은 잠시 미루어 두기도 했었다.
그래도 결혼 후 2년 즈음 지났을 때 린아가 우리에게 찾아왔는데 입덧이라는 신세계를 경험함과 동시에 '아, 이제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생겼다!'라며 언제 회사를 그만둘까 매일매일 짱구를 굴리기도 했다. 직장 생활 7년 차이자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한 지 2년 정도 된 무렵, 주니어도 아닌 그렇다고 시니어라기에는 부족한 중니어 시절에 업무는 쏟아졌고 위로 아래로 치이며 주니어 시절 잠깐 느꼈던 매너리즘과는 또 다른 현타를 느끼는 직장 생활과 함께 나의 임신기가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한 사업부의 플래닝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주간, 월간, 분기, 연간 단위로 매출 목표를 정하고 달성 여부를 확인하고, 팀장님과 함께 신규 사업 기획까지 진행하는 매일매일 쳇바퀴 굴리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팀장님은 회의실에 날 불러다 앉혀놓고 화이트보드에 온갖 그래프를 그려가면서 우리 사업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데 여념이 없으셨고, 회의실의 갑갑한 공기와 울컥 올라오는 입덧의 신물을 참다못한 나는 급기야 나의 미래 비전을 팀장님께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팀장님, 저 임신했는데 내년 4월이 출산 예정일이에요."
"어, 정말? 축하한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에서는 이게 더 핵심 포인트거든."
내 임밍아웃의 타이밍이 잘못된 것일까? 팀장님의 축하한다는 한 마디는 앞서 이야기하던 상위 보고를 어떤 포인트로 할 것인가 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나는 한 번 더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저 입덧이 너무 심해서요. 남편이 좀 더 빨리 출산휴가에 들어갈 수는 없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팀장님의 아주 잠깐 흔들렸던 동공과 저 먼 곳으로 던져진 갈 곳 잃은 시선이 아직도 기억에 콕 박혀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다시 눈빛을 재정비하신 팀장님은 그럼 이런 방향성은 어떻겠냐며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가셨고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팀장님은 지금 임원이 되셨고,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마주쳐 아주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의 근황을 역시나 찰나의 순간에 주고받았다.
그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동료들에게 폭풍같이 팀장님 뒷담을 쏟아냈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팀장님이 그렇게까지 밉지는 않은 마음인 것도 같다. 플래닝 업무를 하는 담당자는 나 하나뿐이었고, 그 어떤 약속도 보장해 줄 수 없었을 팀장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다만 좀 더 솔직하게 상황을 이야기해 줬거나 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다정한 말 한마디를 해주셨더라면 뒷담을 좀 덜하지 않았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마 후 팀장님은 더 많은 일을 맡으시며 바로 옆 팀으로 이동하셨고, 새로 오신 팀장님의 뜻하지 않은 배려(그분은 좋은 의미로는 나에게 많은 것을 일임했다.)로 나는 임신 막달까지 조금은 여유롭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이제 내년이면 19년 차를 맞이하는 직장인으로서 지난하지만 또 다채롭기도 한 지금의 삶을 어찌어찌 이어나가고 있다.
임신부에 대한 배려가 지금보다 더 없던 10여 년 전 나의 선배들은 대부분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3개월을 보내고 돌아왔고, 내 차례 즈음 육아휴직 6개월을 좀 더 당당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일 밖에 모르시던 팀장님이 너무 미운 나머지 입덧을 핑계로 회사를 그만뒀다면, 나는 지금 린아의 엄마로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입덧은 바람처럼 왔다가 또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고, 팀장님도 바람처럼 옆 팀으로 가셨으니 그 모든 것이 나를 계속해서 일하게 만든 어떤 뜻이었을 거라 생각해 본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