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69 _ Vienna, Austria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오전에는 헝가리, 오후에는 슬로바키아, 해가 질 쯤에는 오스트리아, 하루 안에 국경을 두 번 넘어 세 국가를 모두 방문하는 일정이다. 아침 일찍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할 때의 하늘은 강렬한 붉은색의 햇빛이 하늘 위 구름을 채색하고 있는 맑은 날이었다면,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들어서자 붉은색이 짙은 먹색이 되어 뿌연 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비가 올 듯 말듯한 흐린 날씨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을 때까지 지속됐으며, 마침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하자마자 그 응어리가 터지듯 시원한 물줄기를 도시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교통수단 활용 시 한 시간이면 도착할 만큼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기차 창문 위로 맺힌 빗방울들을 감상하며 홀로 감상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 순간 신기하리만큼 기차밖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흐린 안개 너머로 과하지만 절제되어 있는, 투박하면서도 동시에 화려한 느낌이 드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들이었다. 두 국가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만큼, 두 국가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듯했다.
기찻길 옆 차도 위에는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상태 좋은 비싼 고급차들이 빈번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도로 옆 깔끔한 건물들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이어져 어느덧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빈의 첫인상은 '깔끔함'이었다. 넓고 시원시원한 도로와 잘 관리된 건물들 그리고 트램과 자동차, 자전거가 질서 있게 움직이는 이 모습을 보아하니 도시 전체가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특히,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대체적으로 모든 빈 시민들의 차림새가 우아하며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규모가 큰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 보통 영화 세트장이라 함은 미장센을 위해 아름답게 지어진 소규모 건축물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인조적인 느낌이 든다. 빈에도 화려한 건물들과 비현실적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도시 미관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 오스트리아를 여행하고 싶었던 개인적인 이유를 상기하며 설레는 마음과 함께 발을 내디뎠다.
빈 중앙역에서 내린 나는 간헐적으로 내리는 부슬비 사이로 제일 먼저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했다. 18세기 초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궁전은 과거 왕가의 궁전으로 사용됐지만, 현재는 미술관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은 정원이 특히 유명한데, 아름답게 가꾸어진 꽃밭과 나무 그리고 정원 곳곳에 놓인 대리석 조각상들은 특유의 동화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원과 궁전을 통해 왕가가 지닌 미적 감각에 감탄했고 그들이 얼마나 예술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흐린 날씨가 아쉬웠지만 또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짙은 구름 아래 어둠 속 위치한 조각상들은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비에 젖은 촉촉한 풀내음과 궁전 안으로 보이는 샹들리에의 따뜻한 불빛은 과거 어떤 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도 했다. 정원을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어 산책하며 공간이 주는 모든 방면의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정원에 머무르며 벨베데레 궁전을 감상했다.
소낙비가 적신 벨베데레 궁전의 습한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나는 내가 보는 모든 장면을 기록하고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조각상 틈 사이 자란 작은 잎 하나라도 담고 싶어 카메라 렌즈를 이곳저곳 들이대던 순간 우연히 나는 뷰파인더 안으로 한 커플을 발견했다. 마치 깊은 사랑의 모습을 간직한 그들로 인해 내 시선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머물며 자연스레 그들을 관찰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대를 아끼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러 사진으로 남기게 되었다.
여행 두 달 차가 되자 어느덧 머리카락은 많이 길어 보기에 매우 지저분한 상태였다. 다행히 빈에는 벨베데레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인분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 잠깐 방문해 깔끔하게 이발할 수 있었다. 시원한 마음으로 밖을 나오자 어느새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해가 긴 7월 중순의 여름, 날씨가 다시 좋아진 만큼 숙소에 바로 들어가기 아쉬워 빈을 정처 없이 방황하기로 했다. 해가 질 무렵 이번에는 노을이 구름을 노란색으로 채색하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런 빈을 산책하며 도시가 지닌 매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지금껏 여행한 동유럽 도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였다.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웅장한 예술작품처럼 느껴졌다.
오스트리아 빈은 음악의 도시로 알려졌다.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숱한 음악의 거장들이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 세계 음악계를 주도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등의 작곡가들이 있으며, 기존의 바로크 음악 틀을 벗어나 그들만의 새로운 형식으로 '고전주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이는 음악사에 있어 큰 변화였고, 19세기 초반 무렵 낭만주의 음악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음악이 진보하는데 공헌했다.
고전주의 음악은 단순한 형식과 명료한 선율이 특징이다. 음악의 화려함과 복잡함 그리고 웅장함이 강조된 바로크 음악에 비해 단조로운 고전주의 음악은 한 번 들으면 그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 계속해서 생각나게 된다. 협주곡과 교향곡에 대한 체계가 명확히 잡혔고, 음악사에 길이남을 숱한 명곡들이 만들어지자 동시대의 많은 왕가와 귀족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빈으로 모여들었다. 고전주의 음악에 감탄한 그들은 예술에 있어 아낌없이 후원했으며, 덕분에 빈에는 오페라 하우스와 여러 콘서트 홀이 들어서며 많은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오스트리아 빈은 명실상부 클래식 음악의 대표 도시이며, 수많은 음악가들이 꿈을 가지고 모여드는 곳이다. 예술의 도시인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귓가에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으며, 과거 교양 있고 화려했던 그 시대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클래식 음악을 매우 좋아한다. 5살 때부터 꽤 오랜 기간 피아노를 배웠고, 주변에도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릴 때부터 연주회나 공연을 다니며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어릴 당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가사 없이 길기만 해 지루한 느낌이었고, 감정적 동요도 웬만큼 일어나지 않아 선호하지 않는 장르였다. 하지만 나이가 조금씩 들수록 그리고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수록 시끄러운 팝음악보다는 서정적이고 차분하게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에 점점 빠져들었다.
요즘은 사진작업이나 글을 쓰고 집중할 때 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다. 특히,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곡들을 좋아하는데, 잔잔한 선율 위로 느껴지는 아련한 감정을 즐기는 중이다. 또한 가끔 퇴근 후 서초구 '예술의 전당' 근처에 있는 음악 연습실 많은 동네를 산책한다. 한참 연습 중에 있는 연주자들의 연주 소리가 골목 밖으로 종종 새어 나와 들려오는데,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 연주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어 최근 즐기고 있는 취미가 되었다.
아마 유럽을 여행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낯선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로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낭만적인 장소에서 멋진 인연을 만나 새롭지만 설레는 추억을 쌓고 그 끝에는 인연이 연인이 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이런 로망에 불을 지핀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비포 선라이즈'다.
'비포 선라이즈'는 내 인생 영화 중 하나기도 하며, 유럽여행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영화기도 하다. 1995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두 사람이 즉흥적으로 하루동안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며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영화 내 전반적으로 기승전결의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두 사람이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며 잔잔한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인 영화지만, 서로 알아가고 교감하는 과정에서 간지러운 설렘을 주는 동시에 큰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이 영화를 계기로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여행에 대한 많은 환상을 가지게 되었고, 홀로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게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주변에는 여행하며 인연을 만나 결혼까지 성공한 사례도 있으며, 낯선 여행지가 주는 어떤 신비로운 낭만에 의해 사람들이 보다 더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나조차도 여행을 하며 사랑에 빠지는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 영화를 좋아했기에 우연한 만남, 어쩌면 운명적 만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유럽여행 중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굳이 이성이 아니더라도 여행 중 수많은 새로운 인연들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한 추억들이 많이 생겼다. 지금도 종종 여행 중 만났던 사람들 한 명 한 명 머릿속에 떠오르며 그때 있었던 즐거운 추억들을 회상한다.
'비포 선라이즈'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실제 자신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 각본을 쓰게 되었다. 비록 장소가 유럽은 아니었지만, 과거 그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우연히 한 여성을 만나 하루 종일 깊은 대화를 나눴던 실화가 배경이 됐다. 영화 내 상당 부분 그의 경험에서 착안된 내용이 많으며, 그의 이야기를 조사하다 보면 오히려 감독의 실제 이야기가 영화보다 더 많은 여운을 준다.
혹시 저 사람들 왜 싸우는지 아세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남자 주인공인 제시가 여자 주인공인 셀린에게 건네는 첫마디다. 기차 내에 있던 한 부부의 싸움으로 인해 시작된 그들의 우연한 만남은 트릴로지의 마지막 영화 '비포 미드나잇'에서 완성된다. 오래된 부부의 싸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두 주인공은 몇십 년이 흘러 그들조차 과거 그들이 봤던 부부처럼 의미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포 트릴로지'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실제로 9년 주기로 영화를 개봉시키며 나이에 따른 사랑의 변화, 아니 사랑의 모양에 대한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20대 초의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을 담았던 반면, 9년 뒤인 '비포 선셋'에서 재회한 두 주인공은 어느덧 30대가 되어 순수함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9년이 흘러 40대가 된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오랜 시간 함께 했음에도 여전히 다른 두 사람이기에 사소한 갈등과 화해를 반복해서 보여주며,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아도 그 모습과 형태는 변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18년 동안 두 커플의 성장 과정을 담은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이와 시기에 따라 변하는 사랑을 대하는 감정과 모양, 우선순위 등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기에 '비포 트릴로지'를 나의 인생영화로 삼았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 '보이후드'의 경우, 같은 주인공들을 12년 동안 매년 촬영하며 한 소년이 나이별로 느끼고 경험하는 감정을 섬세하게 영화로 담았다. 이처럼 감독이 오랜 기간 진득이 영화를 만들었던 탓일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감독도 영화와 함께 성장해 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말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너랑 계속 대화하고 싶어.
'비포 선라이즈' 영화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두 주인공의 연결감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두 개인이 대화를 통해 서로 본능적 이끌림을 느끼고, 짧은 시간이라도 그 감정이 더욱 깊어지며 결국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비포 선라이즈'의 경우, 열린 결말로 영화의 끝을 맞이하였지만, '비포 선셋'을 보면 두 주인공이 얼마나 서로 그리워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나는 트릴로지 통틀어 '비포 선셋'의 마지막 장면을 제일 좋아하는데, 9년 만에 다시 만났어도 사랑이 변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 내일이 지나면 다신 못 만나겠지?
'비포 선라이즈'가 주는 큰 여운은 이 대사에서 시작된다. 남은 시간은 정해져 있고, 젊은 두 커플은 본인들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전혀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 마주 앉은 상대방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반대로 아닐 수도 있다. 짧은 시간이라는 희소성과 그 순간 느꼈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가치를 만들어 아쉬움은 배가 된다. 두 주인공이 헤어진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들이 빈을 돌아다니며 잠시 머물렀던 장소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두 주인공은 떠나가고 아침이 되어 텅 빈 모습이다.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한 이 장소들은 이제 누군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준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연들은 남들이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장소들에 새겨져 영원히 추억될 것이다.
순간의 교감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 특히 첫사랑의 기억이 그렇다. 사랑에 서툴고 불완전한 나의 모습과 그때 당시 완전한 이성의 모습 같았던 상대방을 통해 조금은 부끄러운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론 아련한 감정이 생겨 평생을 추억하게 된다. 첫사랑의 기억이 특별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그때의 그 상대방이 그리운 것이 아닌, 아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나의 순수한 감정과 그때의 내 모습이 그리운 것이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상대방이 마치 내가 그토록 찾던 운명의 상대인 것처럼 느껴지는 일은 드물 것이다. 이런 감정은 어릴 때일수록 더욱 쉽게 느낄 수 있고, 나이가 들면 점점 어려워진다. 숱한 사랑의 경험 후 무뎌진 것일 수도 혹은 현실을 살아감에 있어 조건과 여러 생각할 거리가 점점 많아지다 보니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기 때문이다. 나도 한 때는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30대가 된 요즘은 한낱 불장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20대의 나를 돌이켜볼 때, 이상적인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물, 불 안 가리고 상대방에 헌신하는 연애를 했다. 그때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내세울 게 없었고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건 그저 노력과 헌신밖에 없었다. 인생의 우선순위 가장 첫 번째는 늘 상대방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다른 일은 후순위로 밀려 해야 할 것을 잘 못할 때도 많았다. 어찌 보면 상대방이 인생의 전부였던 것이다. 20대의 서툰 두 사람이 만나 뜨거운 연애를 하고, 추억을 쌓고, 서로 상처도 주고, 헤어지고 나니 남은 것은 연애 경험과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연애가 인생의 전부가 되면 안 되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챙기며, 앞으로의 현실을 살기 위해 하나 둘 목표한 것들을 이뤄갔다. 점점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시작했고, 사랑으로 인해 더 이상 아프고 상처받기 싫어 상대방에게 원하는 조건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삶에 치이고 계속해서 깎이다 보니 내 퍼즐의 모양은 더욱 복잡하고 정교해졌으며, 이 퍼즐 조각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는 상대방을 찾게 된 것이다.
씁쓸한 현실이다. 이래서 어른들이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해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다가 잘못된 상대방을 만나 평생을 고생하거나 그 끝이 안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난 가정하에 다른 외적인 조건들이 아닌 오로지 그 사람 자체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부럽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원하는 조건은 계속해서 늘어날텐데, 나와 꼭 맞는 퍼즐만 찾는 것은 욕심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 속 이야기지만 '비포 선라이즈'의 두 주인공이 부럽게만 느껴진다. 그들은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서로 교감하며 상대방과의 확실한 연결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로가 그토록 찾던 자신의 반쪽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 인연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제시는 9년간 셀린을 그리워하며 살았고, 셀린은 9년간 제시를 기억하며 직접 찾아갔다. 무려 9년 동안 서로를 잊지 않은, 아니 잊지 못한 것이다.
슬프지만 세상에 꼭 맞는 퍼즐 두 개는 없다. 비슷한 모양의 퍼즐을 찾을 수는 있어도 분명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고, 나를 찌르고 상처주는 모양도 무조건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 크기가 너무 크지 않도록 최대한 비슷한 모양을 찾을 필요도 있다. 다만, 상대방과 모양을 맞추기 위해 내 모난 부분을 깎아낼 필요도, 그리고 그 깎은 부분을 활용해 빈 공간을 채우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나와 맞는 상대방 모양을 찾는 게 아닌, 두 다른 퍼즐이 만나 서로 어떤 완성된 모양을 만들어갈 지 고민하는 것이다.
9년을 기다려 만난 '비포 선셋' 이후, 9년을 함께 산 '비포 미드나잇'을 보면 두 주인공은 다투고 있다. 영화 제일 처음 기차 안에서 다투고 있던 부부도, 영화 마지막 다투고 있는 두 주인공들도 모두 서로 퍼즐을 맞춰가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서로 노력만 한다면 그리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두 사람은 어떤 모양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은 본능적 이끌림에 더해 서로에 대한 정과 의리, 그리고 공감이자 연결감으로 완성되는 것 같다.
행복노트 #66
사랑의 시작과 완성은 연결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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