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71 _ Vienna, Austria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공간의 낭비일 것이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전 우주를 통틀어 인간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다. 천문학의 고전 바이블이라 평가받는 '코스모스'에는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그 창백한 푸른 점 안에 사랑과 증오, 고상함과 추악함 범벅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수많은 점들이 우리다. 우리는 형이하학으로 따졌을 때 한없이 작은 존재다. 범우주적으로 갈 것도 없이 범지구적 관점으로만 보아도 태풍과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하나에 생존의 위협을 받고, 누구 하나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도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반대로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뿌리 삼아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 한 명은 온 우주가 될 수 있다. 특히 칼 세이건이 표현한 '별의 후손'이라는 단어를 감성적으로 가장 좋아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와 원자 하나하나 기원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 별의 잔해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 모두 별에서 탄생한 별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과학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완벽해 깊은 인상을 남기며, 관점에 따라 인간이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인 동시에 아주 중요한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게끔 고취시킨다.
자아가 강하고 외부세계에 민감했던 나는 늘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남들이 쉽게 하지 않는 생각들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많은 혼란과 방황 속에서 성장했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은 누구인지, 내가 속한 사회는 어떤 곳인지,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그리고 그 끝에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흘러들었다. 나는 이 존재론적 고민에 절대 해답을 찾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평생 고민하며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인간의 삶 목적 자체가 이 고민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평생토록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여행을 하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사진을 남겼다. 나는 사진 속에 사람들을 담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감정과 의도가 담긴 사진,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이야기와 드라마 등 사람 한 명당 각자의 세상이 있기에 그들의 세상을 사진 속에 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껏 살아오며 고민한 존재론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함이며, 내가 인식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며 어떤 생각이 들었던 걸까 유난히 사람들을 사진 속에 많이 담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들이 느끼고 살아가는 방식을 담고 싶었다.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에 대한 신비로움과 우연과 인연, 운명을 만들어주는 알 수 없는 에너지에 경외감이 든다. 그러나 타인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사진에 담았지만, 정작 나는 스스로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 빈의 마지막 여정은 내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누굴까.
20대 후반, 대체적으로 남자 인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다. 인생 전체를 통틀어 영향력을 끼칠만한 굵직한 선택들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취업에 성공한 반면, 어떤 이들은 계속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또 어떤 이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도 하며, 많은 자유와 주도권이 주어짐과 동시에 그에 따른 온전한 책임을 지고 살아가게 된다. 진정으로 어른이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혼자 독립해 살아가게 된다면 기존 몰랐던 것들이 더욱 보이게 된다. 부모님이나 학교, 군대 등 틀 안에서는 그들이 지도해 주는 수동적 특성이 강했다면, 모든 과정이 지나 세상에 홀로 서게 될 때면 모두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여야만 한다. 세상에 오롯이 혼자 부딪히다 보면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자신에 대해 알아갈 기회가 많아진다. 보통 이런 이유로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철이 든다.
나는 어릴 때 상상력 가득한 사람이었다. 외동이었던 탓에 집에 있을 때면 같이 놀거나 대화할 상대가 없었고 혼자 놀기 위해서는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장난감들이 친구가 되어주었고, 내가 쓰는 시나리오의 각 주연배우들이 되어주었으며, 때로는 무대의 관객, 노래의 청중, 그림의 모델 등 내 세상을 구성하는 주변인들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상력 속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다. 생각이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내 세상은 내 상상력이었다.
상상력이 세계관 전부인 사람들의 특징은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모든 게 내 생각과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다 보면 혼자 고립될 수밖에 없다. 변수라는 것, 거절이라는 것을 겪을 일이 없으니 내 말과 행동은 곧 법이자 절대권력이었다. 그러나 이는 머지않아 사회를 배우게 되는 가장 기초 단계 '학교'를 통해 세상이 한 번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주위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라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처음 본 또래들에게 쭈뼛쭈뼛 말을 잘 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한 번 친해지고 나면 좋은 친구가 되어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주말에 동네 꼬마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며, 이곳저곳 탐험하고 말썽도 일으키는 전형적인 남자아이였다. 나는 이렇게 점점 주변인을 장난감에서 살아있는 친구들로 채워가며 또 다른 세상의 존재를 알아갔고, 나만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때 사람들마다 성격이 다 다르고, 그들도 자아가 있음을 깨달았다. 관계 속 거절과 갈등을 통해 세상의 주인이 '나'에서 '우리'가 되었다.
살아가며 조금씩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알아갈수록 세상이 점점 거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것을 경험할수록 매일같이 세상은 더 넓어졌고, 그리고 그 세상에는 즐거움과 행복만이 아닌 시련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리'에서부터 '모르는 사람들' '사회'로 세계관의 범위가 확장되다 보니 내 자아와 내 존재는 작아지기 시작했고, 나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실로 엄청 거대한 곳이었고, 나는 한없이 작은 점에 불과했다.
또한 이 작은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작아졌다. 새로운 조직과 시스템을 마주하고, 해외를 나가 더 많은 다양한 사회가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하며 내 세계관이 팽창할수록 나는 더욱 작은 점이 되어갔다. 작아진다는 말은 점점 자신의 존재감, 영향력이 미미해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미약해지는 것이 두려워 새로운 세계관을 마주하거나 사람들 관계에 대한 수용치가 낮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부분은 세상은 이 작은 점들의 군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함께 깨달은 것이었다. 내 존재는 작아졌을지언정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다 보면 내 존재감을 느낄 때도 많기 때문이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맞이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위로와 도움 덕분에 헤쳐나가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다른 이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힘이 되었을 때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군집이라는 형이하학적 사실 속 스스로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형이상학적 발전을 이룬 것이다.
다만 분명 구분해야 할 점은 이런 형이상학적 존재감은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간혹 어떤 이는 착각하여 외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거나 밟고 일어섰을 때 더 큰 점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행동은 유년시절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세계관에 머물러있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성숙한 존재는 자신이 작은 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되 어떻게 주변의 작은 점들과 잘 연결되고 화합할 수 있을지 집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과 특출 난 점을 찾으며 자신 존재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과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세상의 전부는 '나'인 상태에서 시작되어 '내' 속에서 세상을 찾았지만, 얼마 안 가 '나'는 세상의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때부터는 세상 속에서 '나'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평생에 걸친 여정이 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이 명확해질수록 내 존재감은 확고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관이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정체성이 잘 성립될수록,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그 존재감이 더욱 밝게 빛난다고 생각한다.
로맨스 영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각종 사랑을 담은 옴니버스 이야기들이 아닌 공항을 배경으로 한 첫 장면과 가장 마지막 장면이다. 이는 실제 감독이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맞이하는 일반인들을 촬영한 장면들인데,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마음과 기다림 끝에 재회에서 오는 기쁨 등 영화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장면이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에 대해 집중할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를 성립할 때에 사회적 관계도 중요하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등 외부적 요인이 영향을 미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의사와 변호사, 회사원과 사업가 등 직업적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연인, 누군가의 가족 등 관계적으로 스스로를 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 속 좋은 관계는 스스로의 존재를 정립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
세상에 처음 태어나 가장 먼저 맞이하는 관계는 '가족'이다. 굳이 혈연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아도 '식구'라는 명목하에 한 지붕 아래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가는 가장 최측근의 관계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자신의 정체성 성립 과정에 있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 과거부터 누구를 설명할 때, 어떤 이의 아들, 어느 가문 출신 등으로 설명되었기에 자신 뿌리에 대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유년기 가족과의 유대감, 가정교육, 성장배경에 따라 성격과 정서, 가치관 형성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에 '가족'관계는 중요하다.
실제로 여러 학술적 연구에 따르면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랄수록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존재감을 구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부모의 교육방식에 따라 독립적인지 의존적인지에 대한 행동성향도 변화하며, 심지어 가치관을 넘어 정치성향까지 닮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렇게 사소한 행동 변화들이 가치관으로 이어지고, 가치관은 스스로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가족'관계는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가족'이라는 관계는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만큼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많은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이는 형제가 많은 집안, 또 어떤 이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에 부정적인 정체성을 구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깊이를 쉽게 헤아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전부는 아니기에 자신 존재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스스로에게 특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자신의 가족에게 전할 수도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연인' 혹은 '배우자'일 것이다. 혈연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의지하고 때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서로 너무나도 다른 배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과정 속 자신과는 너무 다른 상대방을 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할 사적인 세계관을 확장할 수도 있다. 또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과정 속 자기 발전이 일어날 수 있고, 지금껏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갈 수도 있다.
평생을 함께할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연인이다. 갖가지 불확실성과 시련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며 각자 서로 의지하다 보면 서로에 의해 스스로 중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또 한 번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고,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깊은 사랑 속 상대방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등 스스로를 정립하는 데 있어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누구인지 그 존재를 정립하는 데 있어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은 친구,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형, 누군가에게는 챙겨주고 싶은 동생, 고마운 사람, 나쁜 사람, 미안한 사람, 지루한 사람, 정 많은 사람, 무서운 사람, 친절한 사람, 똑똑한 사람, 진중한 사람, 활동적인 사람 등 주변 사회 관계망 속 어떻게 비치냐에 따라 외부적 요인에 의해 스스로가 정립되기도 한다.
인간(人間)의 한자 뜻풀이를 참고할 때, 인간은 '사람 사이', 즉 인간 존재의 본질은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사람들 속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며 스스로 정체성과 존재감을 구축하는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빈에는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위에는 밤거리를 서성이는 사람들과 도로 위를 헤매는 차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적지를 뚜렷이 알기에 나아가는 반면, 누군가는 방향을 잃은 듯 보였다. 마치 스스로가 누군지 몰라 고민하며 그 해답을 찾아가는 내 모습처럼 보였다. 활력으로 가득했던 낮거리에 어둠이 짙어지자 차분한 분위기로 변모하여 내면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스스로에 대해 직시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회적 가면 없이 정제되지 않은 스스로를 바라볼 때 매우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보인다. 못된 고약한 성질을 가진 내가 보이고, 거만하게 남을 무시하는 나도 보인다. 스스로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자존감 낮은 나의 모습도 있고, 수치스러운 나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나름 양심적이고, 이타적이고, 친절한 나의 모습도 보인다. 자신감 있을 때도 있고, 스스로 기특할 때도 있고, 내 정체성이 뚜렷해지는 순간들도 있다. 모든 것들이 너무 복합적이었다. 그렇다. 이 모든 모습이 '나'인 것이다.
어릴 적 '내'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나는 나이가 들어 이제는 '내'가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많은 모습들이 있어 내가 누군지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어도, 나만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작은 점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해답을 지속해서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다.
아무리 작은 점이라도 나름 빛을 잃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 별임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 별은 초신성 단계 즉 죽을 때 가장 밝은 빛을 낸다. 나도 내가 원하는 정체성을 구축하고 이상향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간다면, 역설적으로 그 존재가 사라질 때 비로소 가장 밝고 강렬한 빛을 내어 많은 이들의 앞 길을 환히 밝힐 수 있길 소망한다.
서두를 우주로 시작했다. 그리고 맺음은 '인간'으로 끝내려 한다.
인간을 생물학적 그리고 과학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우연히 지구에서 발생한 단세포 생물에서 고등 유기체로 진화를 거듭 겪은 존재들이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의 지적 수준은 뛰어나 '지구의 주인'을 자처하며, 문명을 이루고 또 때로는 문명을 파괴하며 유기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다. 하지만 이런 관점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그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며 생존해 나가는 동물 혹은 생명체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동물적 욕구, 감정, 인지를 넘어 분명 한 차원 더 높은 가치관, 자아실현 등의 추상적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똑똑한 선대의 철학자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더 정립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지구에 태어난 태초의 순간부터 지속되어 온 존재론적 고민이었다.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정의하고 그들의 존재를 논의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각 철학자들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기존의 주장이 더욱 발전되기도, 뒤엎어지기도 하기에 한 가지의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믿는 바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맞는 방향인 것 같다. 이를 다시 말하면, 영원한 진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인간 존재의 대한 가치와 믿음이 모두 다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와 정의를 각자가 부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인간을 우주먼지로 표현하며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인간을 별로 여기며 각자만의 빛을 내는 소중한 존재로 인식한다. 이는 단순히 관점과 태도의 차이다. 자신 삶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가치 있게 여긴다면 그만큼 더욱 빛나는 삶을 살 것이라 믿는다. 스스로의 정체성, 존재감, 삶의 의미, 존재 이유 등 모두 스스로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혹여나 누가 다른 시선으로 동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내 삶의 정답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
사진과 글은 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작은 흔적으로나마 남기는 방식이다. 옅고 희미한 빛일지라도 나만의 빛을 지속 밝히면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정체성을 완성해 가는 과정일 것이며, 삶이 끝나는 순간 그 빛이 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연인지 운명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꾸린 세상을 방문한 분들을 환영하며, 모두가 자신만의 빛을 내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행복노트 #68
자신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는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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