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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빗방울이 스쳐간 자리"

유럽여행 포토에세이 #74 _ Salzburg, Austria

by 김예담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두 번째 이야기: 빗방울이 스쳐간 자리.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뒤로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늘 짙은 회색빛을 머금어 마음 내킬 때마다 굵은 빗방울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유럽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몇 분 단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잘츠부르크의 예측불허한 날씨는 마치 일부러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만들며 우산의 내구도를 검증하려는 것만 같았다.


짙은 안개와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잘츠부르크 도시 전역을 휘감아 한껏 차분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사하고 밝은 잘츠부르크도 분명 매력이 다분하겠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론 지금처럼 빗방울이 스쳐 어딘가 우울하면서도 그리운 감정을 아스라이 불러일으키는 잘츠부르크의 슬픔과 위로가 마음에 더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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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성



전 세계 여행자들이 잘츠부르크를 방문한다. 잘츠부르크 내에서 특별히 더 사랑받는 대표적인 장소가 몇몇 있는데, 고전영화에 등장했던 '미라벨 정원'부터 방문객들에게 온통 물 뿌리는 장난만 저지르려는 익살스러운 '헬브룬 성', 멋진 간판이 거리를 수놓은 '게트라이데 거리'와 잘츠부르크 시내 곳곳 위치한 아담한 광장들까지 여행자들이 잘츠부르크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충분하다.


잘츠부르크의 근사한 장소들 속 가장 직관적으로 눈에 띄는 곳은 '호엔잘츠부르크 성'이다. 잘츠부르크 도시 중심에 위치한 이 성은 언덕 혹은 산 정상에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이자 잘츠부르크 시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이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의 전망대에 오르면 잘츠부르크 시내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이는 중세시대 봉건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마을 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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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호엔잘츠부르크 성에는 역사적으로 잘츠부르크를 지배했던 혹은 이끌었던 여러 사람들이 머무르는 거처였다. 신성 로마 제국 당시, 잘츠부르크의 실질적 지배자는 종교 지도자이자 정치적 통치자였던 대주교들이었고, 그들이 종교를 수호하고 그들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하에 호엔잘츠부르크 성을 짓도록 지시했다. 초기에는 방어만을 위한 요새의 형태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증축되고 확장되어 점점 화려한 장식과 대주교들의 상징이 더해졌고, 그 끝에 현재의 언덕 위 거대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잘츠부르크 시내 어디서든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눈에 띄는 만큼, 잘츠부르크를 여행하는 내내 이곳을 방향의 이정표로 활용했다. 성의 모습과 크기를 보며 내가 잘츠부르크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고, 길을 잃어버린다 해도 성의 위치만 확인하면 금방이고 시내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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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언덕 정상을 빼곡히 다 채울 만큼 거대한 건축물을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었을까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성'이라는 건축물이 필요하지 않다. 있다고 해도 문화재로 활용되는 등 건물이 지어진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다. 더 이상 지어지지 않기에 '성'이라는 장소는 독특하고 어딘가 외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과거 다른 무언가로부터 지켜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는 사실로 인해 성에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허락되지 않은 곳에 머무르는 느낌이다. 외형 또한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시간이 멈춘 곳에 존재하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안개까지 찾아와 몽환적 분위기를 형성한 잘츠부르크 여행은 나에게 진실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Fortress Hohensalzburg





빗방울이 스쳐간 자리



잘츠부르크는 어딘가 꿈속에서 본 장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오후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와 골목에는 사람들이 없어 장소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잘츠부르크의 묘한 분위기가 좋았던 나는 그저 계속해서 걸을 뿐이었다. 잘츠부르크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그 주변 미로같이 좁게 얽힌 골목을 마음 가는 대로 걸어 나갔다. 때로는 계단을, 때로는 가로막힌 벽을, 때로는 우거진 나무로 숨겨진 길을 마주하며 잘츠부르크를 탐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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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없이 잘츠부르크의 모든 곳에서 서성이던 때에 하늘에서는 또다시 굵은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보통 안개가 만져지는 것 같은 부슬비가 몸을 감싸던 것과 다르게 무거운 장맛비 같은 물줄기가 떨어졌다.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빈도가 많아지고 그 소리 또한 커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잘츠부르크를 향해 말 그대로 많은 양의 물을 퍼붓고 있었다.


과거부터 사람들이 촘촘히 박아놓은 좁은 골목길 돌바닥에 물길이 형성되며 낮은 곳을 향한 빗방울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었다. 바람과 함께 무섭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하기 위한 곳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몸을 숨길만한 곳은 없었다. 나뭇잎이 무성히 자란 굵은 나무 아래 서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서늘한 공기와 나뭇잎이 막아주지 못한 빗방울이 몸에 닿을 때마다 차가운 감촉이 전해져 왔고, 그렇게 나는 점점 비에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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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비 맞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비를 맞을 때의 차가운 촉감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비를 맞을 때 느껴지는 강한 자유의 감정을 좋아한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동물이고 행복은 동물적 쾌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높은 이상적 가치와 행복이 서로 맞물렸다고 생각한 나에게 이 주장이 처음에는 도전적으로 다가왔으나 설득력 있는 근거로 내 생각을 일정 부분 이상 바꿔놓았다. 그리고 이 주장에 맞게 어쩌면 내가 평소 비를 맞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동물적 쾌감,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경험 ...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특성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원 p. 22
"행복의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행복의 기원 p. 82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행복의 기원 p.193


높은 습도와 축축하고 눅눅한 느낌은 높은 불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비를 맞은 뒤의 뒤처리가 귀찮고, 한껏 꾸민 행색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 사람들은 보통 '비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이런 점들 때문에 '비 맞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통해 인생 주도권과 자유를 순간 찾는 것이다. 관념적으로 비 맞는 것을 피하는 문화 속 일부로 비를 맞음으로 어떠한 틀을 깨는 듯한 쾌감을 느끼고, 나를 얽매는 일상과 어떤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감정을 느낀다. 또한 비를 맞을 때의 그 차가움 혹은 시원함이 평소 잊고 있던 감각을 되살려주며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에 비 오는 날씨 우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를 맞기 위해 우산을 펼치지 않은 적도 많다. 또한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게 보이면 집 밖으로 뛰쳐나가 비를 맞은 날도 있다. 이외에도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땅을 적실 때 나는 촉촉한 향기, 빗방울 사이 번지는 불빛, 짙은 구름과 안개가 둘러싼 분위기, 그리고 비가 몸에 떨어지는 촉감까지 모든 오감을 통해 비의 날씨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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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어쩌면 내가 지닌 우울질의 성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에는 고독쓸쓸함이라는 슬픈 감정도 옅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영국에서 우울한 분위기 가득 담긴 브릿팝이 발전했고, 흐린 날만 가득한 미국 시애틀의 경우 우울증 환자 비율이 높은 등 비와 우울은 과학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많은 연관성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파란색에서 우울한 감정을 느낀다. 영어에도 '우울하다'는 말을 'I feel blue'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할 만큼 우울과 파란색은 깊게 엮여있다. 비가 오는 날씨에는 특히나 구름과 안개 등으로 인해 공기가 짙은 파란색으로 변해 '우울하다'는 느낌이 더욱 연상된다. 아니 이는 반대로 비를 맞을 때의 차가운 촉감으로 인해 파란색이 우울하다고 여겨지는 것일 수도 있다. 우울, 이 둘의 인과관계 순서는 몰라도 서로 상관관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한 때 나의 이상형은 '비 맞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비 맞는 것을 즐긴다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고독과 우울, 슬픔을 아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볼 수 있듯 슬픔이라는 감정은 공감의 영역에서 많은 빛을 발한다.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외면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감정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인간이 지녀야 할 필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전 언급했듯 통념을 깨고 자유로울 줄 안다는 점, 낭만을 지녔다는 점 등 비 맞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많은 것들을 공유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빗방울이 스쳐간 자리에는 그 흔적이 남는다. 빗방울이 적시며 그 표면에 묻은 각종 먼지와 불순물들을 씻어 흘려보내준다. 이는 정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기존의 묵은 떼를 벗겨내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게끔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반대로 상류에 쌓인 여러 토양분들을 하류로 전달해 주며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게끔 순환할 수 있게 도와준다. 빗방울 또한 스스로 순환하는 존재이며 스쳐 지나간 것 같아도 나중에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이처럼 빗방울이 주는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마음이 답답한 날 무작정 밖을 나가 쏟아지는 비를 한 번 맞는 것이다.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우울의 감정을 지녔든, 어떤 상황이 나를 옭아매든 빗방울은 차별하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내가 지닌 무게와 고민을 씻어내 줄 뿐이다. 그리고 언제 금 다시 찾아와 준다. 빗방울이 스쳐간 자리에는 숨결만 남아있다.


행복노트 #71

빗방울에는 생명이 담겨있다.






오스트리아를 떠나며



잘츠부르크를 끝으로 오스트리아 여행을 끝마쳤다. 일주일 가까이 오스트리아에서 머무는 내내 비가 내리는 날씨였지만, 오히려 그 날씨덕에 오스트리아 여행이 행복하게 다가왔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는 오스트리아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있었고,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작은 부분까지 운치와 여운을 더해주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방문한 그 어느 곳에서도 부정적인 감정 하나 들지 않았다. 모든 곳이 완벽했던 오스트리아는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오스트리아독일의 국경이 맞닿은 잘츠부르크.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체코로 올라가기 전, 독일 뮌헨을 잠깐 경유하기로 했다. 어디까지가 오스트리아고, 어디서부터 독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구름이 걷히고, 사라진 구름 사이로 햇빛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자 에서 깨어나는 느낌은 확실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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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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