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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프라하,
"세월을 함께하는 친구"

유럽여행 포토에세이 #77 _ Prague, Czech Republic

by 김예담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체코 프라하,

두 번째 이야기: 세월을 함께하는 친구.



프라하의 아침이 밝았다. 지금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프라하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 독사진을 찍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다. 프라하의 여러 상징들 앞에서 내가 이곳에 존재했음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한 장 한 장 남기고 있었다. 한여름 유럽의 아침 여섯 시는 관광객으로써 그리고 작가로서 사진 찍기 매우 좋은 시간대였다. 해가 어느 정도 위로 올라와 대낮 같으면서도 도시는 아직 잠자고 있는, 아니 이제 막 잠에서 깨어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는, 그렇기에 고요함 속 활기가 싹트는 시간이다.


사람이 전혀 없는 프라하를 배회하며 정적인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도시 전체가 멈춘 듯한 마치 유령도시가 된 것 같은 프라하의 모습을 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도시가 눈을 뜨고 조금씩 움직이는 활기찬 소리가 들려올 때쯤 나는 이제 사진활동을 멈추기 시작한다. 사진작가에서 다시 여행자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프라하의 중심 카를교에서 도시의 마지막 정적을 즐기던 그때 어떤 낯선 한 사람이 다가왔다.


긴 머리카락에 청자켓, 단정한 옷차림을 한 그녀는 어딘가 고요한 프라하의 배경과 닮아있었다. 여행 중 쉽게 볼 수 없던 아시아인이었기에 멀찌감치 나도 이미 그녀의 존재를 인지했었다. 그러나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가까이서 마주했을 때 그녀가 한국 사람이 아님은 확신했다. 그녀는 나에게 능숙한 영어로 자신의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정중하게 부탁했고, 나는 오랜만에 마주한 아시아인이 반가워 프라하를 배경으로 열심히 그녀의 사진을 남겨주었다. 동시에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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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프라하를 여행 중이던 대만 사람이었다. 멀리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던 나를 발견했고, 차림새가 한국인이었기에 먼저 사진을 부탁할 용기가 났다고 이야기했다. 혼자 프라하를 여행하며 자신의 사진을 남기기 어려웠지만 프라하를 떠나기 직전 운 좋게 사진을 잘 찍어주기로 소문난 한국인을 발견해 아쉬움이 사라졌다며 활짝 웃었다. 나는 그런 한국인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도록 진심을 다해 다양한 구도로 많은 사진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를 계속 이어가며 프라하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프라하를 떠나는 그녀의 버스는 열 시쯤 출발하기에 그전까지 프라하를 잠깐 같이 여행하기로 했다. 사실 그때 함께 산책했던 프라하의 모습은 기억이 없고, 그녀와 나눴던 대화만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대만에 대한 호기심, 그녀가 한국에 대해 물어왔던 질문들, 왜 혼자 여행을 하는지, 행복에 대해, 삶에 대해 나눴던 대화들은 즐거운 추억이 되어 행복한 여행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는 며칠 뒤 폴란드에서 다시 재회하기로 하고는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인연의 도시, 프라하



체코의 수도 프라하라는 도시가 한국인들에게 유명해진 계기 중 하나는 20년 전 방영했던 한 드라마 덕분일 것이다.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시청률 30% 이상 달성한 당시 뜨거운 관심을 받는 작품이었다. 그때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은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 속 등장하는 아름다운 프라하의 풍경을 보게 되었고 프라하가 낭만적인 도시로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너무 어릴 때, 사랑이 뭔지도 모를 때 방영했던 드라마였기에 사실 프라하가 내 기억 속에 남아있지는 않았다. 부모님 옆에서 드문드문 봤다는 사실 그리고 프라하가 낭만의 도시라는 것만 기억에 남고 그 이상 특별한 감정과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프라하를 방문하자 지금껏 몰랐던 특별한 감정과 기대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완벽한 유럽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사랑하는 연인과 여행을 한다면 평생 남겨질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도시라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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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곳곳에는 낭만이 새겨져 있다. 어스름한 아침 선선한 공기를 품은 프라하에도, 해가 중천에 떠 맑고 쾌활한 프라하에도, 온 세상이 금빛으로 물든 노을 녘 프라하에도, 차분한 조명을 품은 고요한 저녁 프라하에도 모든 순간에 낭만을 찾을 수 있다. 잔잔한 블타바 강, 언덕 위 기품 있는 프라하 성, 그 옆 운치를 더하는 수도원, 프라하의 역사를 간직한 카를교와 강을 중심으로 세워진 고즈넉한 건물들까지 프라하의 모든 부분은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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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여행이 행복했던 이유는 어쩌면 사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라하는 나에게 인연과 관련된 진기한 경험을 가져다준 도시였다. 이른 아침 우연한 기회로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도 하고, 오래된 옛 인연을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여행은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시간이 한참 흘러 지금 유럽여행을 추억할 때, 그때 먹었던 음식, 방문한 장소, 들었던 소리보다 '사람'을 만났던 기억이 더욱 강렬하게 남아있다. 도시를 떠올릴 때마다 그 도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들과 나눴던 즐거운 대화들이 떠오른다. 프라하는 사람의 연을 묘하고 은은하게 엮어주는 도시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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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하



약 2주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쯤이었을까 갑자기 익숙한 이름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2년 전 군대 훈련소에서 만났던 동기 '준하'였다. 반가운 이름 그리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한껏 기분이 들떴던 우리는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물으며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 전역 후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 유럽여행 중이었고, 서로의 SNS를 염탐하며 여행에 대한 정보, 추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다만, 준하가 나의 동선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왠지 자신의 동선과 중간에 한 번 겹칠 것 같아 확인차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서로의 일정을 대조해 보던 중 우리가 같은 시기 체코 프라하에서 일정이 겹치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더욱 들떠 며칠 뒤 프라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설레는 순간이었다. 약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유럽을 혼자 여행함에 있어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었다. 즐거운 순간도 힘든 순간도 함께 공유할 친구가 없어 심심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마음 편한 친구를 만나 같이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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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은 알 것이다. 훈련소 동기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입대 후 약 한 두 달간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변하는 시기, 훈련소라는 고립된 곳에서 군대라는 새로운 사회 속에 던져져 그들만의 문화를 배우며,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통해 군기가 바짝 들게 되는 시기다. 왠지 모르겠지만 화가 잔뜩 난 조교들로부터 평생 겪어보지 못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 너무나도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온 훈련소 동기들끼리 갈등을 빚기도 한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군대 내에서 낯선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짧지만 특별한 추억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평생 연락할 것같이 가까워진 훈련소 동기들은 자대를 배치받는 날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되지만, 정말 각별한 몇몇이 아니고서야 사실 대부분 연락이 끊기게 된다.


준하는 그런 훈련소에서 만난 친구다. 한눈에 봐도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하고 생각이 깊은 친구였다. 늦게 군대를 간 나에게 대화가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교육을 받는 6주 동안, 휴대폰도 컴퓨터도 없어 할 수 있는 게 대화밖에 없었던 6주였고, 우리는 서로가 가진 꿈에 대해, 인생에 대해, 전역 후의 미래와 계획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했었다. 각자의 자대로 배치받기 며칠 전이었을까, 나는 준하에게 전역 후 긴 시간 떠날 장대한 유럽여행 계획과 행복을 찾기 위한 여행 목적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준하 또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온 친구였고, 우리는 서로의 을 응원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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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우리는 프라하에서 재회했다. 긴 시간 후 오랜만에 마주했지만 서로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어색한 감정 없이 반갑기만 했다. 또한 낯선 여행지에서 익숙한 사람과의 만남은 또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우리는 군대에서 겪었던 일, 각자가 경험해 온 여행 이야기, 앞으로의 인생계획 등 또 한 번 쉴 새 없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프라하의 밤이 깊은 새벽이 될 때까지 프라하 야경을 바라보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세월을 함께하는 친구



나는 내향형의 사람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으며,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고, 항상 만나는 사람만 만나며, 그조차도 몇 달에 한 번 될까 말까다.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집에서 혼자 보내는 경우가 많고, 글을 쓰거나 사진 편집을 하는 등 집에 혼자 있는 시간도 바쁘기 때문에 크게 외로움을 느끼거나 사람들이 그리웠던 적은 많이 없는 것 같다.


사춘기가 찾아오기 전에는 정반대였다. 인생에서 친구들이 가장 소중했으며, 동네 꼬마들을 불러 모아 함께 어울리고 같이 시간 보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배경에는 내가 외로운 외동이었던 점도 있었고, 친구 관계를 통해 '나는 친구들에게 따뜻한 사람이야. 멋있는 사람이야. 진중한 사람이야.' 하는 등 스스로의 존재를 정립했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들과 갈등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나의 정체성이 마구 흔들리는 것 같이 느껴져 식음전폐 할만큼 친구라는 관계에 집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춘기가 찾아오고, 그동안 했던 수많은 갈등과 이별, 기대와 실망,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의 피곤한 자극 등에 지쳐 점점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보다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을 더욱 즐기게 됐다. 또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할 때도 외부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해 관계 중심에서 조금씩 개인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의미 없는 관계는 더 이상 붙잡지도 않고, 붙잡을 이유도 못 느껴 사람들과 자연스레 멀어지기도 하고, 정든 사람들과의 이별도 조금씩 무뎌지게 됐다.


그렇게 사람들과의 관계가 좁아지기 시작하며 어떤 이는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해올 때가 많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다. 관계 속에서 눈치, 비교, 분노 등 불필요한 자극이 사라지니 나에게 소중한 다른 부분에 시간과 정신을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에너지를 충전하고 삶이 더욱 윤택해진 느낌이었다. 또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관계에서 오는 만족감이 더욱 충만했다. 고립된 관계는 스스로를 가둘 수 있지만, 불필요한 소음을 차단해 관계에서 오는 감정 소모를 최소화해 준다.


그리고 정말 외롭지 않다. 이러한 배경에는 단연코 내가 힘들 때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주로 사람들을 만날 때 '인성'을 중심으로 사람을 사귄다. 이 사람의 능력, 학력, 재력보다는 늘 사람 됨됨이를 가장 우선적으로 본다. 특히 이기적이거나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혐오하며, 이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기피한다. 보통 첫 몇 만남에 지속될 관계일지 아닐지 직관적 판단이 서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직관적 판단에 좋은 느낌이 왔던 사람들과는 오랜 세월 함께하고 있다.



나는 친구 혹은 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 좁고 깊게 사귀는 것이 좋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한 번 깊게 사귄 친구는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늘 오래가는 것 같다. 이런 친구들과는 한동안 연락을 안 했어도 오랜만에 만나면 예전 친했던 그때 그 시절로 언제든 되돌아간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오랜만에 연락할 수 있는 그런 관계, 그런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점차 늘어가며, 좁고 깊었던 관계는 조금씩 넓고 깊은 관계가 되어간다.


서로 삶이 바쁘다 보면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물리적, 시간적, 체력적 한계로 인해 연락하는 빈도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열심히 사는 상대방을 응원하고, 오랜만에 생각나면 또 안부를 묻고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오히려 이런 관계가 나는 어떠한 허물 혹은 가식 없는 진정한 친구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고 취할 것이 있어 연락하는 것이 아닌, 정말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호감으로, 그저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기쁨이 되는 그런 관계, 이런 관계가 긴 세월을 함께 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는 '시절인연'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도 물건도 모두 때가 무르익어야 만날 수 있고, 때가 되고 연이 다하면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씁쓸하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연의 기한이 있기에 굳이 관계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같이 다가온다. 그립고 아쉬운 인연이라도 뜻이 다하면 놓아줄 줄 알아야 하고, 새로이 찾아올 다른 인연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믿는다. 쓸데없는 관계에 집중할 시간에 스스로를 더욱 돌이켜보고 가꾼다면, 그리고 더욱 나은 사람이 된다면 좋은 사람들은 저절로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 아닌, 본인이 능력 있고 멋있는 사람이 되어 그 가치를 알아본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 이렇게 한 번 깊어진 관계를 자연스레 지속해 나가는 것, 냉혹한 현실 속 서로의 따뜻한 등불이 되어주는 것, 내가 믿는 진정한 친구의 의미이자, 평생토록 내 주변을 채우고 있을 사람들이다.


행복노트 #74

향기 나는 꽃에 나비가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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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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