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78 _ Prague, Czech Republic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체코에 도착해 프라하를 여행할 무렵 약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벌써 7월 중순을 맞이하고 있었다. 뜨거운 유럽 남부 지중해 지역을 벗어나 동유럽을 거쳐 조금씩 북유럽으로 올라가는 여정은 하루가 달리 날씨와 기온이 변화하는 것을 체감했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해지고, 이른 새벽과 저녁에는 얇은 겉옷이 없다면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햇빛의 질감, 온도, 습도가 달라지는 것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었다.
유럽여행, 여행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5월 여행을 시작하던 초창기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온 전력을 다해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새로운 대륙,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를 마주한 신선함, 한정된 시간이라는 희소성에서 오는 아쉬움,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유럽 배낭여행의 꿈 등 여행 초창기에 느낄 수 있는 열정이었다. 그리고 이 열정은 약 2주 정도 지난 시점에서 급격하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먼저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랐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일정 그리고 숙소에 있는 시간이 아까워 온종일 밖을 나돌아 다니는 일정은 며칠 안 가 온몸에 피로가 가득 쌓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처음 몇 주간은 새로운 자극들로 여행의 만족감이 높았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여행과 자극에 무뎌졌다. 게다가 외로움과 싸우는 시간도 존재했다. 행복한 순간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여행 중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여행 권태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장기간 여행하며 이런 여행 권태기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 중 괴로움이 극에 달해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했을 때, 여행의 즐거움과 행복에 무감각해졌던 시간이 있었다. 이때 아침 시간 외에는 하루 대부분을 숙소에서 체력을 회복하고, 괴로운 감정을 해소하는데 집중했다. 배낭여행 속 숱한 고생에 마주했기에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지금이 아니면 이곳에 다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끝없이 되뇌며, 의식적으로 행복을 되새기는 노력을 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계획한 유럽여행을 내가 포기한다면 스스로 큰 실망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버텨나갔다. 여행을 버틴다는 말이 우습게 들리기도 하지만, 정말 말 그대로 버텨나갔다. 힘든 순간이 와도 오래 남을 추억이자 여행 이야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체력적, 정신적 한계에 부딪힐 때 욕심을 내려놓고 여행보다 나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순간순간을 넘기다 보니 어느덧 여행은 반이 지난 시점에 도달했고, 앞으로 남은 절반에 대한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열정과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 여행의 과정은 내 인생에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죽도록 힘든 순간이어도 버티고 이겨내면 언젠간 지나간다는 사실이다. 시간 속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보다 능동적으로 순간을 마주한다면 그리고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시련은 분명 기회가 된다거나 새로운 밑거름이 되어 성장하는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프라하의 건축물은 프라하만의 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짙은 회색 빛깔 색채의 석조건물과 화려한 장식들, 통일감 있는 건축 양식들은 중세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대표적으로 프라하 성, 수도원, 화약고, 천문시계 등이 있다. 르네상스에 접어들어 지어진 건물들에는 동유럽 특유의 깔끔하고 알록달록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좁은 골목 바닥에는 언제부터 깔렸을지 모르는 마모된 둥근돌 타일들이 깔려 있었고, 이는 왜 프라하가 관광객들의 캐리어 짐가방 무덤 혹은 지옥이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현대에 들어 이런 돌바닥은 불편함을 야기하기에 새로이 평탄한 길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것을 유지하고 그 미관과 전통을 유지하려는 유럽 국가들 답게 과거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프라하의 신념 혹은 고집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라하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흥미롭게 다가온 부분은 기존의 전통적인 도시 경관 외에 새로 개발되는 프라하 속 다른 부분에는 현대를 넘어 아예 초현실적인, 미래지향적 파격적인 건축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블타바 강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눈에 확 띄는 신기한 형태의 한 건물을 마주할 수 있다. 이 건물은 '댄싱 하우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치 유연한 몸짓으로 춤추는 듯한 곡선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오래된 건물이 가득한 프라하의 전통적 경관 속 특이한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기존 전통적인 미관에 반항하듯 현대 프라하가 추구하는 건축적 상징 같았다. 과거에 머물러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는 프라하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외에도 프라하에서 가장 높은 타워 건물인 '지지코브 TV 타워', '마사리카 빌딩'과 같은 현대적 건축물들이 프라하의 전통적 경관에 조금씩 변화를 더하고 있다. 이는 예측 가능한 일관성에서 비롯되는 지루함에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이자 생기를 더해주는 요소이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프라하 답게 도시 곳곳에 유머를 더해주는 장치나 이질감 있는 현대적 구조물들을 설치함으로 도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려는 또 다른 프라하의 신념 혹은 고집을 엿볼 수 있었다.
이처럼 프라하는 굉장히 매력적인 도시였다. 유럽여행 전 상상하고 그렸던 전형적인 유럽의 모습을 띄었고, 과거에 것을 지키되 동시에 미래를 추구하는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도시경관 모습을 보는 듯했다. 여타 다른 도시들처럼 높은 빌딩 혹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은 없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프라하의 매력을 더해주는 요소였다. 과거에 의존하거나 머물러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변화하는 모습, 꾸준히 발전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등 오랜 시간 프라하에 머물며 프라하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프라하의 중심이자 블타바 강을 건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 '카를교'에서 동쪽으로 10분 걸어가면 한 오래된 건물 외벽에 설치된 거대한 시계를 마주할 수 있다. 프라하의 또 다른 명물이자 미적, 기능적 완벽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프라하 천문시계'다.
천문시계는 중세시대 말기에 설치된 구조물로 현재까지 작동되는 천문시계 중 가장 오래된 시계다. 시계는 두 시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시계판에는 시간과 일출, 일몰 등을 나타내는 태양의 위치, 낮의 길이, 적도 등을 표기하고 있으며, 아래의 시계판에는 1년 중 농사시기, 추수시기 등을 표기한 달력이 있다. 초창기 시계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단순한 형태였으나, 시간이 흘러 점점 기능이 하나씩 추가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천문시계의 가장 하이라이트 부분은 매 정각 시간마다 설치된 동상들이 등장해 종교, 철학의 메시지를 담은 공연을 보여준다. 약 1분가량 이어지는 이 공연에는 삶과 죽음, 인간의 죄악과 종교의 구원 등 중세시대 설치된 시계답게 신앙과 교리에 대한 강한 색채를 보여준다. 프라하에 살던 가난한 농민과 일반 시민들이 지나가며 이 시계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게 되었다.
누구나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화려한 시계 속 심오한 뜻을 심어놓아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 볼 계기를 주는 것,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것, 시간이라는 무한한 흐름 속 유한한 인간의 삶을 고뇌해 보는 것, 인간으로서 조금 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 이 거대한 시계 하나를 관찰함으로써 깊은 철학적 질문을 유도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계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에게 행운이었을 수 있다.
사실 시계를 정확하게 읽고 볼 수 있던 사람들은 단연 지식층, 성직자, 귀족밖에 없었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극히 제한되던 과거 시절, 글을 읽을 줄 모르던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저 움직이는 어떤 화려한 물체, 소리를 통해 지금 하루 중 어느 때인지 알려주는 물체였을 것이다. 귀족들은 시계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일반시민들과 자신을 구분 짓는 어떤 계급 장치였을 것이고,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허세적 존재였을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흘러 현재 시점에서 프라하 천문시계를 다시 바라볼 때면, 이제는 과거의 정밀하고 섬세한 높은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됐다. 또한, 시대도 바뀌어 천문시계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시계의 표기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 작게는 하루의 변화, 길게는 한 달, 1년의 변화까지 그리고 어쩌면 시대의 변화까지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천문시계는 '시간의 흐름 속 영원한 건 없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전달하는 것 같았다.
프라하의 천문시계를 보며 문득 시간에 대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먼 과거 1410년 당시 프라하 천문시계를 설계한 설계공과 수학자는 아득히 먼 미래일 지금 현재의 순간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창조해 낸 시계가 몇 세기를 거듭해 지금껏 남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물건이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물론 중간에 시계가 파손되고 멈추는 일도 있었지만, 숱한 보수와 발전을 거친 끝에 천문시계의 시침, 그리고 모든 표기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반복을 거쳐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미래 과학의 발전에 따라 시간이라는 개념이 다시 어떻게 정립될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물리적 흐름이며 3차원 공간 속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4차원의 영역을 만나 한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순서 혹은 과정과도 같다. 일반/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라 실질적인 시간의 흐름을 달리 한다거나, 측정 방식에 따라 시간이 길이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과거 '스위스 제네바'편을 쓰며 시간이라는 주제를 두고 개념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과학적 개념에 더불어 '크로노스', '카이로스'와 같은 철학적 개념을 다뤘고, 시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또 한 번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며 글을 썼다. 다만, 당시에는 '시간'이라는 개념 하나에 집중해 글을 썼다면, 이번에는 프라하 천문시계 속 등장하는 상징인 죽음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 시작과 끝이 명확한 유한한 인간의 생애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다.
영국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인 '존 키츠'는 인생을 계절에 빗대어 시를 썼다.
한 해가 네 계절로 채워져 있듯,
인생에도 네 계절이 있나니.
원기 왕성한 사람은 그의 마음이
모든 것을 분명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때이며,
그의 여름엔 화사하며
봄의 달콤하고 발랄한 생각을 사랑하여
되새김질하는 때이니, 그의 꿈이 하늘 천정까지
높이 날아오르는 부푼 꿈을 꾸네.
그의 영혼이 가을 오나니
그는 꿈의 날개를 접고,
올바른 것들을 놓친 잘못과 태만을,
울타리 밖 실개천을 무심히 쳐다보듯,
방관하여 체념하는 때로다.
그에게 겨울 또한 오리니 창백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길을 먼저 가 있을 것이니.
존 키츠, <인생의 계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삶을 살아가지만 대체적으로 인생 속 시기에 따라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생각은 뚜렷하게 공유하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에 등장하는 봄과 여름을 청년기, 가을을 중장년기, 그리고 겨울을 노년기로 은유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나이에 한정하는 것보다 생각 변화에 초점을 두고 싶다. 왜냐하면 이 시를 지은 존 키츠가 그의 나이 향년 25세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 끝나도록 꿈을 쫓아가는 사람들, 꿈을 성취했다면 또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그렇게 끊이지 않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생물학적 나이가 중장년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아니 노년기의 사람들까지 그 마음에 신념과 열정이 가득 있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부푼 꿈을 좇아 인생의 여름 시기를 지속적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인생의 가을, 겨울 시기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며, 그저 나이에 따라 정해진 시기가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보통 이런 계절의 변화가 생기는 계기는 인간의 체력 그리고 본인이 처한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 있는 듯하다. 나이가 어릴수록 체력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은 사실이기에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칠 수 있고, 물리적 고생이 뒤따른다 해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시기임은 틀림없다. 또한 나이에 따라 관습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봤을 때 나이가 들수록 책임지고 짊어지는 것들이 늘어나며,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 자신의 힘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자의 혹은 타의의 의해 꿈의 날개를 접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가을의 시기를 맞이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 자신이 인생에서 일궈온 인생의 업적을 이제 하나둘 정리하며 펼쳐놓은 것들을 주워 담는 시기이며, 정확히는 인생의 무게중심이 자신으로부터 타인에게로 넘어가는 시기다. 기존에는 어떤 꿈의 성취, 직장에서 성공, 자아실현과 같이 스스로에게 집중되었다면, 가을의 시기는 가족과 친지 더 넘어 이 길을 함께하는 다른 동료, 직장 후임 등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주게 된다. 인생의 가을을 스스로 빨리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환절기 계절이 자연스레 바뀌는 것처럼 대부분은 상황의 변화와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그리고 충분히 식어갈 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존 키츠는 겨울의 시기를 차갑고 쓸쓸하게 표현한 듯하다. 그는 죽음을 두렵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그의 묘비명도 마치 시간의 흐름 속 자신의 운명을 맡기듯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가 누워있노라'로 표현하며, 죽음에 있어 외로움, 허탈함, 망각 등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렇게 겨울을 죽음을 기다리는 인생의 시기로 표현한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물 위에 이름을 쓴다면 그 형태는 곧 사라지지만, 분명히 파동과 파도가 생겨 어떤 식으로든 크고 작든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겨울 또한 가을에 떨어진 영양분이 토양에 잘 흡수될 수 있도록, 뿌리를 내려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또한 자연에 휴식을 주어 새로운 계절을 준비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이 있다. 이처럼 겨울의 시기도 보다 더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치 곧 태어날 새 생명을 향한 고귀한 헌신처럼 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는 각각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존재한다. 봄에는 온기가 찾아와 새싹이 자라며 벚꽃과 진달래 등이 핀 푸른 초원이 생각난다. 여름은 울창한 숲, 매미가 우는 소리, 햇살 쨍한 바다가 생각나며 열기만큼 시원한 바람과 쏟아지는 비가 함께 연상된다. 가을은 무르익은 벼, 높은 하늘, 낙엽이 떨어지는 풍경 속 고독과 쓸쓸함, 명상과 사유의 심상이 떠오르며 이는 성찰과 성숙의 시기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겨울에는 가득 쌓인 눈 위로 흘러나오는 캐롤, 크리스마스 장식, 그리고 호박과 시나몬 향기 등 가장 아련한 추억이다.
이렇게 각 계절별로 행복한 이미지를 연상한 이유는 사람마다 각자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의 모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인생의 계절을 맞이할 때, 계절 속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모습을 상기하며 해당 시기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만약 각 계절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분명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인생의 어떤 계절을 맞이하더라도 자신만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늘 자신이 사랑하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시기가 항상 별로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타임머신 장치를 상상하고, 시간여행을 하거나 시간을 왜곡하며, 더 나아가 다중차원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시간을 벗어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인간이 가진 유한한 시간에 대한 저항이자 시간을 통제해 운명을 거스르는 또 하나의 시도다. 어떤 이들은 자연스레 찾아오는 인생의 계절을 받아들이지 못해 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다. 혼자 시기에 맞지 않는 계절에 산다면 추운 겨울 수영복만 입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꼭 나이에 따라 계절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때 적절한 마음과 몸가짐이 필요하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여름만 있는 적도 부근, 겨울만 있는 극지방, 북반구와 반대되는 계절을 가진 남반구 등 한 지구 안에서도 갖가지 다른 계절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즉, 시간의 일률적인 흐름에 따라 한 가지 계절만 있는 것이 아닌, 한 사람 안에서도 다양한 계절을 동시에 여럿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본업에서 겨울의 시기가 찾아와도, 다중차원의 세계처럼 새로운 꿈을 갖고 도전해 동시에 또 다른 봄의 분야가 존재할 수 있다. 한 해가 지나면 또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듯, 끊이지 않는 열정 속 새로운 계절은 늘 찾아올 것으로 믿는다.
- "내일은 얼마나 길까?"
- "영원과 하루."
영화 '영원과 하루' 中
199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그리스 영화 '영원과 하루'에는 죽음을 앞둔 중년의 시인 주인공의 마지막 하루를 따라가며, 자신의 삶을 회상한 주인공이 건네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 "영원과 하루"라는 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는 정말 철학적 깊은 울림을 주는 다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는데, 내일이 오지 않을 주인공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 삶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과 후회했던 순간들을 회상했던 것처럼 인생에서 마주한 특별한 기억들은 평생토록 남을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는 하루 속 영원히 남겨질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하루들이 모여 한 달이 되고, 몇 달이 모여 계절이 되고, 계절들이 모여 1년, 그리고 그 끝에 인간의 수명이 있다. 정말 인생의 마지막 계절, 마지막 하루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후회를 회상할지, 행복을 회상할지, 주마등 속 어떤 감정들로 채워질지는 무심코 흘려보내는 이 하루가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하루를 감사와 사랑, 배려와 성실, 진실함으로 살아간다면, 분명 삶의 끝 찬란했던 인생의 계절 속 가장 사랑하는 모습의 기억들은 영원히 남을 것으로 믿는다.
행복노트 #75
살아있는 인간에게 계절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Portugal - Spain - Switzerland - Italy - Slovenia - Croatia - Hungary - Slovakia - Austria - Czech - Poland - Lithuania - Latvia - Estonia - Finland - Sweden - Norway - Denmark - Germany - Netherlands - Belgium - Luxembourg - France - UK - Turkey
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 해당 글의 모든 사진은 작가 본인이 직접 촬영하였음을 밝힙니다.
* 해당 글과 사진을 출처 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 해당 글을 모바일 앱보다 웹사이트 큰 화면으로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