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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크라쿠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럽여행 포토에세이 #82 _ Krakaw, Poland

by 김예담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폴란드 크라쿠프,

두 번째 이야기: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바쁜 일상을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길을 걷는 나의 시선이 언제고 바닥을 향해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었다. 삶에 지쳐 고개를 들 사소한 힘조차 없었던 것일까, 잘못한 것 하나 없지만 과하게 위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의 발뒤꿈치에 멈춰진 시선, 불규칙하게 엉켜있는 발걸음들을 응시하며 동시에 혼자만의 사유의 시간, 공상의 세계, 명상의 흐름이 복합적이고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땅을 보며 걷는 습관이 마음 편한 이유는 모르겠다. 추측컨대, 시선을 아래로 이동하여 주변의 다른 불필요한 시각적 자극을 제한하기 위해, 그렇게 내가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를 스스로 차단하고 내면의 생각과 감정에 더 집중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직관력이 발달해 거리에 있는 수많은 무작위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인식 및 분석하는 뇌의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더 보존하기 위한 본능적으로 정착된 또 하나의 생존방식일 것이다.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끝없는 사색의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문득 위로 치켜뜬 눈길은 추상적 공간으로부터 나를 현실의 영역으로 데려다 주어 갑작스럽지만 깊고 선명한 해방감을 안겨다 준다. 끝없이 펼쳐진 맑고 푸른 하늘, 혹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노을을 품은 하늘, 수놓은 별을 간직한 밤하늘, 하물며 짙고 먹구름이 드리운 회색빛깔의 낮은 하늘까지, 그 어떤 모양과 형식의 하늘이든 내가 머물던 우주와 현실의 우주가 우연히 겹쳐져 눈을 맞출 때 고결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희열과 평온, 안도와 후련함은 일상 속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크나큰 행복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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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맞이한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무너진 고양이의 마음만큼이나 싱숭생숭 변덕스러웠던 전날의 날씨와 달리, 오늘 하늘의 기분은 '맑음'이었다. 하늘 보는 것이 취미가 되어 어느덧 유럽여행 대부분의 시간을 하늘의 미려한 색감을 관찰하고 감탄하며, 하늘이 지닌 무한함을 경외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역별로 지리, 기후에 따라 구름모양이 가지각색인 경우가 많은데, 밋밋하고 흐릿한 구름보다는 선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구름이 훨씬 더 매력적인 듯하다.


바람에 몸을 맡겨 유유히 떠다니다 그렇게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구름은 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인생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분명 눈에 보이고 존재한다. 그러나 구름을 잡고자 하늘에 닿으면 곧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학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 구름은 응결한 수증기로써 존재하는 물질이 맞다. 다만 문학적이고 감성적인 관점에는 닿을 수 없는 하나의 이상 혹은 곧 사라져 버릴 허상, 허울뿐인 스스로의 인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세상에 생명의 물방울을 선물하는 비구름이, 동시에 어쩌면 세상에 빛을 차단하는 먹구름이 될 수도 있다. 아름다운 노을빛을 가리는 한 편, 어쩌면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눈을 멀게 하는 것을 보호해 주는 것일 수 있다. 어떨 때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무한한 자유를 그리게 하고, 또 어떨 때는 팽창해 마찰을 일으켜 좌절을 주기도 한다. 어느 시기가 지나 세상에 그 존재가 잊혀갈 때, 그 구름의 모양과 형태, 역사와 이동은 해석될 수 없다. 그저 판단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의미존재 의미를 부여함으로 사람의 기구한 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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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와 가톨릭



폴란드는 동유럽 대표 가톨릭 국가다. 국민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자 주기적으로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등 정해진 국교는 없지만, 가톨릭 종교의 색채가 짙은 국가라 볼 수 있다. 종교가 지닌 강한 특색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쫓는 것이다. 보다 더 고차원적인 고찰과 믿음이 필요하다.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이 깊고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고 볼 수 없지만, 아니 오히려 종교를 핑계로 더욱 부족하고 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도덕적으로 조금 더 존경받을만한 누군가가 종교인이 되었을 때 그의 사려 깊은 마음가짐과 행동, 희생 등은 부족한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성인(聖人)'이 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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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크라쿠프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성 바오로 2세'다. 그는 2천 년 가까이 흐른 가톨릭 교황 역사에 있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칭송받은 교황 중 한 명이며, 그의 선한 행동은 종교를 넘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다.


성 바오로 2세의 고향은 폴란드 크라쿠프다. 정확하게는 크라쿠프 근교도시 '바도비체'에서 태어나 자랐고, 신학교를 크라쿠프에서 재학하며, 교황이 되어 죽을 때까지 종교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가톨릭 외 다른 종교들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화합하며 기존의 교황들과는 다른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자신들의 종교 교리만을 강요하고 고수했기에 많은 갈등을 빚어왔다. 어느 한쪽이라도 피해의식 혹은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경우,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경계선을 형성해 왔다. 종교로 인해 유혈사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반면, 상대방을 몰아내야 할 절대악으로 규정하기에 증오와 혐오의 감정이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순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 바오로 2세의 경우, 다른 종교 지도자들을 환영하며 먼저 대화의 장으로 초청했으며, 종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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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 혹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초월자로 거듭나기 위한 깊은 수련 등을 종교에서 주로 다루며, 진리를 탐구하거나 심리적 평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묵직하고 천천히 내면의 믿음을 자극하게 된다. 사실 종교를 가지는 근본적인 원인에는 인간이 가진 특유의 불완전함, 요동치고 번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한다. 즉,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각종 자극으로부터 얻게 되는 스트레스를 삶에서 잘 소화하고자 의지하게 되는 이상인 것이다.


인간은 신과 같이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언제나 부족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사람 마음 안에 종교가 있는 것인지 혹은 종교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인지 평생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완벽한 인간은 없고 단지 그 완벽한 이상을 향해 더욱 노력하는 자와 조금 부족한 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 사이에서 성 바오로 2세의 경우, 가장 완벽한 이상에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인간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일까 성 바오로 2세는 종교를 걷어내고 개인과 개인으로 마주해 서로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위로하면 마음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가장 대표적인 일화는 1981년 바티칸 광장 안에서 한 괴한에게 피습당한 일이었다. 종교가 다른 한 무슬림 청년이 쏜 총알이 성 바오로 2세의 몸을 관통하여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기적적으로 무탈하게 잘 회복했고, 추후 그 암살미수범을 직접 찾아가 용서하며 기도해 주는 등 인간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주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고결한 인품을 지녔던 성 바오로 2세, 그가 젊었던 시절 크라쿠프에서 오랜 시간 지냈던 덕분일까, 크라쿠프 또한 정결하고 따뜻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크라쿠프를 거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온함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국민 대부분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인인 폴란드의 크라쿠프는 어딘가 모르게 엄숙하지만 열려있는, 확고하지만 포용하는, 아름답지만 아픈, 이런 역설적인 매력을 지닌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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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를 걷다가 또 걷다가 청명한 색감에 이끌려 저절로 눈이 하늘로 향할 때면, 횡격막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크고 짙은 숨을 내뱉는다. 마치 오랜 시간 몸 안에 쌓여온 독소와도 같은 걱정, 근심, 고통, 불안, 분노, 허무 등의 모든 부정적인 응축된 감정들이 큰 숨에 담겨 한 번에 해소되는 것 같다. 숨을 쉼과 동시에 몸이 이완됨을 느끼며, 현실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거나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한 번 생성된 전파는 우주를 영원히 떠도듯, 우리의 기억도 저 하늘에 평생토록 머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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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사이에서



'하늘나라'라는 단어가 있다. 주로 신이 사는 세상을 표현하거나, 죽은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으며 생겨난 단어다. 나는 죽은 영혼은 아니지만 종종 하늘에서 죽음을 가까이 마주할 때가 있다. 바로 비행기 안에서 말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탄 비행기지만, 난기류를 만나 동체가 흔들릴 때면 언제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어떤 인생을 살았나' 인생을 돌이켜볼 때도, 마음속 자연스레 나만의 유언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비행기를 탈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 든다.


어릴 때부터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갓 태어난 지 아직 몇 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은 도무지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죽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영원한 무의 세계, 짙은 어둠, 누구도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심지어 나조차도 나의 존재와 자아를 인지하지 못하는 그런 검은색의 관념,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과 꽉 막힌 답답함, 그리고 허망함 속 우울감 등 인간 유전자 속 깊이 박힌 본능처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에 가장 먼저 실마리를 찾은 건 종교였다. 어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갔던 교회에서 인간은 죽은 뒤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모든 것이 금으로 이루어진 천국에는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가득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천국을 실제로 다녀온 사람이 아닌 한 '금'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알 수 없지만 그저 물질이 천국에서는 의미가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종교를 통해 현생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도착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 주며, 현실의 삶을 보다 더 가치 있게 살게끔 유도한다. 어쩌면 이것이 말 뒤에 숨은 진정한 본질일 수도 있다.


종교에서 죽음에 대한 가장 큰 공포는 바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행복을 집대성한 것이 천국이라면 반대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을 집대성한 것이 지옥이다. 지옥을 '불구덩이'로 비유하며,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중세시대 단테가 집필한 문학 '신곡'에는 여러 가지 지옥의 모습이 나온다. 불구덩이 말고도 얼음으로 이루어진 세상, 파충류와 괴물이 가득한 세상, 고문과 신체변형이 이루어지는 곳까지 지은 죄에 따라 다양한 지옥을 넘나들며 죄인들은 고통받는다. 이를 통해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대한 관념과 해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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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벌은 ''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본연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끼며, 미지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존에 유리하고자 주변의 변수들을 통제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세상에 몰라도 되는, 아니 어쩌면 몰라야만 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단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방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모든 것들을 이해해야만 할까. 으로써 더 불행해지지는 않는 것일까.


죽음도 사실 파고드면 파고들수록 두려움과 불안함, 거기에 더해 초조함밖에 남지 않는다. 인간적인 사고로 사후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준 선물인 생명을 스스로 끊을 경우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하나의 안전장치가 존재하고 있으나, 북유럽의 발할라, 이슬람의 지하드 등 극단적 종교신자를 제외하고는 현실의 삶을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 사후 영원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결국 우리가 증명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개념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늘 좌절할 수밖에 없고, 시선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점점 의료기술이 발달해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있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설령, 불로불사 몸을 얻었다 하더라도 물리적인 천재지변, 영원에 귀속된 정신상태가 무한대로 이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닐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불멸의 신들이 인간의 죽음을 부러워하는 이야기까지 있다. '인간답게' 살아있는 것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을 함께 느껴가며 유한한 삶, '죽음'으로 인간의 삶이 완성된다고 본다.


인간은 살아간다지만, 사실 우리는 끝을 향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숨을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가장 젊고 어릴 때며,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을 생각하는 한 우리는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가장 나다운 삶을 추구하게 된다. 평생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후세계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내가 아직 누리지 못한 행복을 위해 현실세계를 더욱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좋든 싫든 가시에 찔리면 고통을 느끼고, 주변의 누군가가 떠나면 슬픔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땐 분노를, 마음 깊은 곳 빈 공간의 허무를,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 행복을 느끼는 등 어쩔 수 없는 그런 현실의 존재기 때문이다.


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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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유하는 원인에는 미지에 대한 공포심 혹은 호기심으로 시작되겠지만, 결론은 늘 현실의 삶에 더욱 집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생명의 유한함, 정해진 시간, 우리가 언제 이 세상을 뜰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으로 갑자기 오늘 하루 1분 1초 매 순간이 소중해짐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단 하루만 남아있다면..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있다. 죽기 전 살면서 꼭 이루어보고 싶은 과업들을 일컫는다. '버킷리스트'의 단어 어원은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목을 매달기 전 밟고 서있었던 양동이(bucket)를 걷어찬다는 것에서 착안된 단어다. 이제 마지막 호흡을 앞둔 사람들은 일평생 끝내 이루지 못한 많은 일들에 있어 후회를 남기기 마련이다. 다만, 그 후회의 숫자들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개인의 관점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일 것이다. 우리의 터전이 되어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주변 지인들에게 조금 더 친절할 것, 나만의 소소한 행복 등 꼭 이루고 싶은 일들은 무궁무진하다.


우리 삶 대부분의 시간은 특별하지 않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어쩌면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으로 하루를 채우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그 특별하지 않게 여겨지던 시간은 갑작스레 소중해지며, 하루를 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어진다. 일을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어떤 버킷리스트를 위한 자금을 모으는 시간, 퇴근 중 마주하는 풍경은 괜스레 아름다워 보이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안부인사를 하는 등 삶과 일상을 조금 더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끔 도와준다.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어떠한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운명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그런 나의 운명을 사랑하고, 삶에 열정적이며, 온 힘을 다해 즐길 줄 아는 자세가 남은 여생 후회를 가장 적게 만들 것이다.


행복노트 #79

삶과 죽음 사이에서 스스로에게 소중한 것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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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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