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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4장 트라우마의 습격. 테러

테러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집주인이었던 스베타가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스베타가 암 환자인 줄 몰랐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수습하고 스베타의 딸 비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집에 우리 부부가 살게 되었다. 집수리를 끝내고 사람들을 초대해 몇 번의 집들이를 치렀다. 

  그러던 5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현관 쪽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사라졌다. 곧 연기가 들어오고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여보, 불났어!”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밖에서 불을 내서 현관에 불이 옮겨붙고 있었다. 현관문은 안에는 철재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밖은 원목으로 마감해서 불에 탈 수 있었다. 문틈 사이로 연기가 아파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밖에 타고 있는 불꽃이 보였다. 남편은 호스를 가져와서 안에서 문틈 사이로 뿌리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불이 꺼져?”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동시에 이웃에 사는 선배에게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아파트 맞은편 같은 층에 사는 선배였다. 전화를 거니 다행히 선배가 받았다. “선배님, 저희 불났어요. 빨리 좀 와 주세요.” “응, 알았어.”

  선배가 와 준다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다시 현관 쪽으로 갔다. 남편은 여전히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보, 비켜봐.”하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 앞에 놓여 있는 깔개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와 휙 부으니 순식간에 불이 꺼졌다. 문은 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문은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채 타기만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그랬지?” 선배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제야 나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연기를 내보내는 사이 누가 연락했는지 경찰 두 명이 왔다. 경찰은 탄 깔개와 문을 조사하고 누가 그랬는지 알만한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우리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경찰은 서류에 뭘 적더니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없이 그냥 가 버렸다. 사람들이 흩어졌고 선배는 나와 남편에게 자기 집에 와서 자라고 말했다. “많이 놀랐을텐데...” 남편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지만 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상황이 종료되자 더 무서웠다. 누가 우리를 노리고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음날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 전화해서 사정을 알렸다. 그리고 집을 알아봐 주실 수 있느냐고 부탁드렸다. 그날 나와 남편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잔나라는 내 친구의 신세를 졌다. 잔나는 카프카즈 지역에 있는 오세티아 공화국 출신이었다. 나와 동갑인 미혼 여성이었다. 나는 결혼 전부터 잔나와 꽤 친하게 지냈다. 아무 연락 없이 무작정 기숙사에 사는 잔나를 찾아갔다. 잔나가 일에서 돌아올 때까지 바깥에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우리를 본 잔나는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잔나는 얼마든지 자기 방에서 지내라고 말했다. 

  잔나의 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우리는 미리 짐을 싸 놓기 위해 집으로 갔다. 현관은 반쯤 그을려 있었고 집 안에는 아직도 탄내가 빠지지 않았다. 이틀 전에 있었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우리는 서둘러 삼단 가방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결혼 초부터 왜 이런 험난한 일이 생기는 건지. 짐을 거의 다 싸고 집을 나서는데 복도에서 이웃집 여자를 마주쳤다. 그 여자는 우리를 보더니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보세요. 당신들 때문에 복도 천장이 다 그을렸어요.”

고개를 올려보니 정말 천장이 연기로 그을려 있었다.

“당신들 책임이니 페인트칠하는 비용을 내세요.”

“얼마를요?”

“천 달러요.”

“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화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니. 우리는 피해자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돈을 내라는 것도 모자라 천 달러라니. 외국인인 우리를 호구로 보는 것인가. 우리는 따져봐야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대충 알겠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러시아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을 경험한 건 다행히 그때 한 번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신기하게도 그날 목사님이 사시는 동네에 집이 구해졌다며 빨리 오라고 하셨다. 교회의 고려인 전도사였던 안토니나 트로피모브나가 사는 아파트에 마침 빈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지하철을 타고 도시 정반대 쪽에 있는 목사님 댁으로 갔다. 이틀 동안 집 없이 떠돌다가 목사님 부부를 만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안토니나 트로피모브나가 우리를 데리고 간 집은 막 수리가 끝나 깔끔했다. 주인 여자 이름이 공교롭게도 또 스베타였다. 의사였는데 눈빛이 선량했다. 꽤 큰 방 두 개에 부엌과 화장실, 복도가 있는 집이었는데 월세를 150불만 받겠다고 했다. 바로 그날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이사를 하게 됐다. 이웃들이 알면 우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게 뻔했다. 미리 작은 트럭을 구해놓고 한밤중에 가서 몰래 이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나는 목사님 댁에 머물고 남편과 안토니나 트로피모브나의 남편 겐나디 미하일로비치와 아들 게라가 트럭을 타고 떠났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잘 돌아오기를 빌었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트럭이 도착했다. 남편은 이웃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해서 짐을 옮겼는지 무용담을 펼치듯 이야기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우리 집에 또 불을 낼 것 같았다. 만약 또 불을 내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방독면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낮에는 그나마 지낼만했지만, 밤이 되면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날의 일이 떠오르면 끔찍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혼자 끙끙대면서 불안에 떨다가 간신히 잠들곤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의 불안장애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다른 사건으로 나는 내가 비정상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인지하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누가 우리 집에 불을 낸 것일까. 나와 남편은 이리저리 퍼즐을 맞추며 누가 한 짓인지를 추리했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비카의 인도인 애인이었던 솜이 한 짓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솜으로부터 생계 비용과 스베타의 병원비를 지원받았던 비카는 전부터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다. 비카가 우리에게 받은 집세로 따로 집을 얻어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솜은 우리를 내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심증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비카가 집에 들어갈 때 웬 괴한이 나타나 비카의 허벅지를 칼로 찔렀다. 다행히 비카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솜은 비카에게 안전을 이유로 다시 자신과 살자고 종용했다. 그러나 비카는 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가 이사하자, 비카는 어머니가 없는 그 집으로 들어가 혼자 살았다. 그리고 결국 솜과는 헤어졌다. 이 모든 일이 솜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어찌 알 수 있으랴.      

  새집으로 이사하기 전 나는 지도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제 러시아에 온 지 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읽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텍스트를 분석한 노트가 몇 권이 쌓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써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방화가 일어난 후 마음의 안정을 잃은 나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논문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강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지도교수님께 말씀을 드려야 했다.

“선생님, 누가 우리 집에 불을 냈어요.”

“오, 소냐. 어떻게 그런 일이? 괜찮아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줄곧 나에게 존댓말을 쓰셨다. 

“괜찮아요. 근데...일을 할 수가 없어요. 논문을 쓰지 못할 것 같아요.”

“오, 소냐. 그런 말 말아요. 절대 논문을 포기해선 안 돼요.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일단 쉬어요. 충분히 쉬고 나중에 생각해요. 반년이고 일 년이고 쉰 후에 쓰면 돼요. 알겠지요?”

지도교수님은 자상하게 나를 위로하고 간곡하게 나를 설득했다. 얼마든지 쉬고 나서 다시 생각하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어찌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던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논문 생각을 잊어버렸다. 반년이 지나서야 다시 교수님께 연락을 드릴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교수님이 나를 압박하셨거나 그만두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나는 논문 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어갔다. 이제 반년 동안 쉬었던 논문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또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터졌다. 1999년 9월 9일. 저녁에 뉴스를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 TV 화면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파트 한 채가 순식간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짙은 연기에 휩싸이고 난 후 아파트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아파트가 폭파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94명이 사망했다. “누가 한 짓이야? 어떻게 아파트를 폭파할 수가 있지?”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때만 해도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만 관심이 쏠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폭파범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4일 후 다시 한번 모스크바의 아파트가 폭파되었다. 이번에는 119명이 사망했다. 그 화면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두 번째 보도를 본 나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는 이제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가 연쇄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를 폭파하고 있었다.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파트 폭파가 이어질 거라는 의미였다. 예의 그 공포심이 엄습했다. 갑자기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여보, 나가야 해.” 

“나가긴 어딜 나가? 왜?”

“나 무서워. 우리 아파트도 폭파되면 어떡해?”

“그런 일 없어.”

남편은 도무지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도 남편이 날 이해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나는 밤새도록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밤에 누군가 우리 아파트 지하에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나는 창밖에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밤새 밖을 내다보았다. 근처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촉각이 곤두서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길고 긴 밤이 지나면 아침이 되어서야 지쳐 잠이 들었다. 낮에는 그나마 무서움이 덜했다. 방화가 난 후와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강도가 더욱 심했다. 나는 모스크바 다음에는 페테르부르크가 표적이 될 거라 예상했다. 극도의 공포가 나를 마비시켰다. 밥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삼 일 후 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러시아 남부 볼고돈스크라는 도시에서 다시 아파트가 폭파되었다. 이번에는 17명이 사망했다. 페테르부르크는 무사히 넘어가는 건가. 그래도 며칠 간격으로 벌어진 테러 소식에 내 신경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사이 폭탄 소리와 함께 아파트가 무너지는 광경이 자꾸만 상상 속을 침입했다. 가공할만한 점은 이것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행한 테러라는 것이었다.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이 졸지에 끔찍한 테러에 희생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러시아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나는 마치 이 일이 내 신상에 직접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양 생생하게 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동요했다. 한국 유학생들도 놀랐다. 그러나 더 이상의 테러가 발생하지 않고 정부는 테러범을 잡겠다고 공표했다. 사람들은 차차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불면의 밤은 계속됐다. 아침이 되어 잠들고 오후 늦게 깨어 꼬박 밤을 새우는 일이 계속되었다. 남편과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에서 남편이 잠들 때까지뿐이었다. 하루는 너무 무서워서 밤에 남편을 졸라 시내로 나갔다. 페테르부르크의 중심 거리인 넵스키대로는 인적은 드물었지만, 한밤중에도 불이 밝혀 있었다. 넵스키대로의 중간쯤에 있는 KFC는 24시간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있으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나는 가지고 간 노트를 밤새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집을 떠나 어디론가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도시가 아닌 자연 속으로 숨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씀드렸다. 어디 가서 지낼만한 곳이 없을지 여쭤봤다. 목사님은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목사님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기셨는지 걱정하셨다. 그러던 중 목사님이 며칠 사나토리에 가 있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사나토리는 러시아인들이 요양이 필요할 때 가는 일종의 숙박시설이었다.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있어 안정을 취하기 좋은 시설이었다. 나는 이거다 싶어 당장 가겠다고 했다. 이사를 도와주었던 겐나디 미하일로비치가 나와 남편을 데리고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레피노에 있는 사나토리로 갔다. 

  레피노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화가 레핀이 살았던 곳이었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숲과 핀란드만의 바다가 어우러져 휴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최적의 장소였다. 사나토리에 가서야 나는 처음으로 밤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때 사진을 보면 몇 주 동안 밤에 잠을 자지 못해 얼굴이 핼쑥하고 웃음기가 없다. 레핀 박물관에도 가고 러시아의 유명한 여성 시인 아흐마토바의 묘지도 방문하며 이박삼일을 보냈다. 자연 속에서 그동안 지쳤던 마음이 조금은 쉼을 얻을 수 있었다.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아침마다 목사님 댁의 기도 모임에 참석했다. 함께 기도하면서 천천히 불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야 내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전해부터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라도가 호수에서 파도를 만났을 때,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을 때, 집에 불이 났을 때, 그리고 폭탄 테러까지 일련의 연쇄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내가 보인 반응은 확실히 정상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내 주변에는 내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나조차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걸까? 내가 이렇게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나? 왜 내가 이렇게 변했을까? 마치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문제가 무엇인지, 뭘 어찌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이런 증상이 나타난 것일까. 그런데 왜 하필 결혼을 즈음해서 터지게 되었을까. 그때 만약 한국에 있어서 병원에 찾아갔더라면, 상담이라도 받았더라면 내 문제를 좀 더 일찍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에서는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한 가지 내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건 내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죽음의 위협이 없어도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나 무서웠다. 믿음이 있다는 내가 죽음을 그리도 두려워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절망스러웠다. 왜 그리도 죽음이 두려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미해결된 문제를 안고 지내던 나는 몇 년 후 마침내 인생 최악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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