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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5장 코아의 발견. 우울증의 시작

5장 코아의 발견    

 

  귀국 후 나는 드디어 고갈되어 인생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비로소 나의 상처를 마주하고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우울증의 시작     


  막내 남동생은 그사이 한 번 더 이사했다. 같은 신림동이었지만 전처럼 지대가 높지는 않았다. 제법 큰 방 두 개에 거실 겸 부엌이 있었다. 전보다는 집이 깔끔했다. 육십 중반이 넘은 아버지는 예전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술을 드셨다. 동생 말이 일 년에 한두 번씩 사라졌다 일주일이 지나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곤 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집에 가서 집을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해서 아버지와 식사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예정이었다. 함께 살 수는 없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와서 아버지를 챙길 수 있는 게 어딘가. 나는 가족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런데 동생은 아버지와 살았던 6년 반의 시간을 지긋지긋해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자 이제는 아버지와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막내에게 아버지를 맡기는 건 무리였다. 아버지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내가 가끔 살림을 도와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버지는 혼자 살겠다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귀국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내가 돌아오기만 하면 동생들의 짐을 벗겨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어떻게?’라는 방법은 갖고 오질 못했다. 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과는 달리 결혼해 가정을 가진 몸이었다. 집도 없으니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 무력해졌다. 나는 출가외인이었다. 


  2003년은 내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전에 겪었던 어떤 어려움과 비교되지 않는 최악의 시간. 나는 흔히 ‘밑바닥을 쳤다’고 하는 표현대로 내려갈 수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 그 해 나는 불에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았다.  

  시작은 단순했다. 결혼한 동생이 나서서 아버지가 지낼만한 저렴한 요양시설을 알아보았다. 동생은 곤지암에 있는 요양원을 찾아냈다. 그곳에 가보니 몸이 건강하신 노인들이 각자 자기 방을 쓰면서 지내고 계셨다. 외출도 자유롭고 비용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별로 오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나와 동생은 아버지 의견을 무시했다. 여자 원장은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증명할 자료를 요구했다. 병이 있으면 거기서 생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으시게 했다. 

  일주일 후 동생이 내게 검진 결과를 문자로 알려왔다. 아버지의 간과 폐에 이상소견이 있으니 정밀검진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문자를 보자마자 가슴이 쿵 하며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술과 담배를 많이 하셨으니 당연히 간과 폐가 정상일 리 없지.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당연해. 그런데 만약 큰 병이면? 암이라도 발견되면?’ 안산의 고대병원에 검진 예약을 해놓고 기다렸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시작됐다. 밤에 잠이 오질 않아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걸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하룻밤을 불면으로 날려 보내면 다음 날은 피곤해 잠이 들었다. 그렇게 이틀에 한 번씩 잠을 잤다. 

  대학병원이라 검진받고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총 3주가 걸렸다. 나는 최악의 결과를 상상했다. 코아의 특징인 파국적 사고가 발현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 그래야만 그 상황을 마주할 전투 태세를 갖추는 데 나는 여전히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무지 마음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에게 큰 병이라도 발견된다면 나는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분명 안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상했다. 확실하지 않은 결과를 기다리는 긴장이 나를 극도로 압박했다. 불면에 두통이 더해졌다. 목 윗부분부터 시작된 두통은 머리 위로 퍼져 올라갔다. 

  마침내 검진 결과가 나왔다. 신기하게도 결과는 그다지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너무 좋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아 감사하다. 이제 되었다.’ 나는 그것으로 내 마음도 평온을 되찾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불면과 두통은 가라앉질 않았다. 거기에 다른 증상들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두통은 점점 심해져 마치 머릿속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폭탄이 곧 터져 머리가 날아가 버릴 듯했다. 아프지 않은 지점이 없었다. 병원과 약국을 다니며 진통제를 처방받아도 전혀 듣질 않았다. 평생 가라앉지 않을 끔찍한 두통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3월이 되어 부산대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KTX가 없던 그때 부산까지 가는 데 통일호를 타고 다섯 시간이 걸렸다. 기차 안에서도 불안 증세가 나타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반복했다.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갑자기 왼쪽 가슴에 묵직하게 누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뭐지?’ 통증은 약해졌다 강해졌다 반복하며 찾아왔다. 부산대 안에 있는 상암 회관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두 과목을 수업했다. 수업 시간 전에 안절부절못하다가도 수업 시간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강의했다. 얼마나 서고 싶던 대학 강단이었는가. 그런데 첫 학기부터 강의를 즐기기는커녕 수업 준비와 부산에 내려가는 일이 고문이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구포역으로 와서 수원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플랫폼에 서 있는데 비참함이 몰려왔다. 한국에 오면 모든 게 순조로울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 무슨 복병을 만났단 말인가.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러시아에서 불었던 바람 못지않게 차가웠다. 눈물이 맺힐 뿐 기가 막혀 울음이 터지지도 않았다.     

  병원을 찾아 검사했지만, 가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는 스트레스성일 거라고 했다. 다음에는 장이 꼬이는 통증이 왔다. 오른쪽 아래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밤낮으로 괴롭혔다.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불안이 문제였다. ‘대장암에 걸린 거 아냐?’ 검진을 받는 게 두려워 바로 병원에 가지 못했다. 그때쯤 나는 우연히 건강염려증이란 질병에 대해 알게 됐다. 증상이 나와 똑같았다. 질병이 없어도 몸에 각종 증상이 나타나고 그걸 큰 질병의 징후라고 추측하며 불안해하는 병이었다. 나는 여전히 내게는 뭔가 큰 병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게 바로 건강염려증이었다. 

  가라앉지 않는 두통이 제일 큰 문제였다. 나는 뇌종양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안산 고대병원 신경외과에서 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며 신경정신과에 예약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예약한 날짜까지는 한 달이 남아 있었다. 그때 바로 신경정신과에 갔더라면 최악의 고통까지는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경험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시 엄습했다. 안절부절하고 초조해 밥맛을 잃었다. 한 달 사이에 45 킬로그램이던 체중이 38 킬로그램까지 줄었다. 걸을 기운조차 없었다. 꼬마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걸까 부러웠다. 나는 다시는 뛸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두통이 너무 심해져 불안이 극도로 치솟은 어느 날 나는 광인이 되어 울부짖었다. 남편은 바로 다음 날로 영등포 건강검진센터에 예약했다. 뇌종양 판정이 나오면 나오는 거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다름없었다. 검사하러 가는 도중 지하철 안에서 느낀 그 불안, 검진 시간까지 기다리는 몇 시간의 죽을듯한 초조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하얀 MRI 통 안에 집어넣었다. 두려움과 끔찍한 소음에서 벗어나고자 눈을 감고 몇 분 동안 쉼 없이 숫자를 세었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제 괜찮으려나 싶었다. 그러나 안정감은 잠시뿐. 두통은 계속되었고 몸 어딘가에 다른 심각한 질병이 있을 거라는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이제 내 증상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셨다. 며느리가 정상적인 사람인지 의심하시는 것 같았다. 너무 입맛이 없어 어느 날은 시어머니께 “어머니, 갈비찜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시어머니는 갈비찜을 해주셨다.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 믿음으로 이겨내야지.” 그런 말씀을 하곤 하셨다. 나는 이게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억울했지만 항변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더 불안해져서 자꾸 피하고만 싶었다. 교회에서 한 형제님이 심방을 오셨다. 형제님은 내 증상에 대해 들으시더니 “귀신이 들렸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귀신이 나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귀신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귀신은 나를 중병에 들게 하고 결국은 나를 죽게 할 힘이 있는 존재였다. 누군가 귀신 얘기를 하기만 해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나는 러시아에서처럼 집을 떠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갈망에 시달렸다. 남편이 내 소식을 지인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어느 목사님이 침을 잘 놓는 집사님 한 분을 소개해 주셨다. 그가 큰 침을 머리 정수리에 꽂자 신기하게도 통증이 금세 사라졌다. 그는 내게 아산에 있는 본인 집에 가서 계속 침을 맞아볼 것을 권했다. 나는 그날로 남편과 함께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 일주일을 지내며 침을 맞았다. 아이 둘에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다. 그는 나 외에도 자궁경부암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니 한 분을 집에 모셔놓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매일 아침, 저녁 식사를 차려 냈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먼저 깨어 어린이 프로에서 흘러나오는 동요를 따라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이 깨었다. 나는 다시 노래 부를 수 있을까. 누군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나의 불안과 황폐함은 대조적으로 더 강해졌다. 

  불안에 우울감이 더해졌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여보? 한국에 오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괜찮을 거예요. 나을 거예요.”

남편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증상과 행동을 옆에서 다 지켜보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어느 순간 이런 나와 결혼한 남편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아산에서 침을 맞았던 때는 4월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강의를 계속할 수 없었다. 교수님께 전화해 강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한번 강의를 중단하면 다시 하기 힘들다며 간곡히 만류하셨다. “도저히 강의를 준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교수님. 기운이 없어서 부산까지 내려가지도 못해요.” 교수님은 할 수 없이 내 청을 받아들이셨다. 

  침을 맞는 손님들이 스파비스로 왔다. 나와 남편은 매일 스파비스에서 종일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내 차례가 되어 침을 맞으면 그걸로 할 일이 끝이었다. 그 일주일 동안은 두통이 없이 지냈다. 그런데도 불안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이제는 대장암이 걱정이었다. 시댁으로 돌아와 대장암 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준비도 힘들었지만, 검사를 받고 나서 기운이 소진되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아는 집사님 댁으로 갔다. 집사님은 늘 내게 긍정적으로 “곧 괜찮아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집사님의 긍정적인 말을 들으면 조금 안심이 되는 듯해서 자주 그분을 찾았다. 집사님은 결혼 전 정신과에서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정신과에 가보라고 하지 않으셨다.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었다. 나는 집사님에게 백숙 요리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염치와 체면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끙끙대는 동안 집사님은 백숙을 요리해 오셨다. 

  한번은 아버지 집에 갔다가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동생이 발견했다. 동생은 별말 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집에 간다.”고 하자 “누나, 맛있는 거 사 먹어.”하며 십만 원짜리 지폐를 내게 내밀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도움이 되자고 왔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빚을 갚기는커녕 내가 짐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반이 무너져 내린 나의 정신은 미안하다는 느낌조차 감당하지 못했다.

  지연은 나의 상태를 대충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내게 지연이 전화했다. 

“내가 신문 기사를 봤는데, 아무래도 너 우울증 같아.”

“우울증?”

“응. 너도 한번 봐. 그거 병원 가서 약 먹으면 괜찮아진대.”

“예약해 놓기는 했어.”

“언제까지 기다려? 가까운 병원이라도 빨리 가 봐.”

우울증...낯선 단어였다. 그때까지 내가 우울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머릿속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지연 말고는 그런 말을 해준 사람도 없었다. 병원에 가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말이 터무니없이 들렸다. 나는 기약도 없이 천형에 걸린 사람처럼 절망하고 있었다. 이런 증상에 치료법이라는 게 있을까.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무지했다.

  신문을 찾아 우울증에 대해 읽어보았다. 증상이 나와 똑같았다. 내가 우울증이구나. 마침내 내 병명을 알아냈다. 안산 고대병원에 예약한 날짜까지는 아직 두 주 정도 더 남아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불에 타는 날들이었다. 두 주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길었다. 온누리교회에서 신경정신과 전문의 차 준구 장로님이 하시던 회복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여자 집사님이 우울증으로 죽을 뻔했는데 장로님 병원에 가서 살았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집사님에게 바로 전화했다. 차 준구 장로님이 하시는 병원 연락처를 아시냐고 물었다. 집사님은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시며 빨리 가보라고 했다.

“저 나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저는 더 심했어요.”

어떻게 나보다 더 심할 수가 있을까.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나는 그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어쨌든 집사님의 말은 내게 캄캄한 암흑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었다. 병원에 전화해 위치를 물었다. 처음에는 남편과 버스로 찾아가다 길을 잘 몰라 되돌아왔다. 역시 정신과는 가는 게 아닌가. 그러나 며칠이 못 되어 나는 시아버님께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드렸다. 5월 첫 주였다. 두 달 반 동안 알 수 없는 증상들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는 드디어 정신과 문턱을 넘었다. 아버지하고만 연관되던 정신과가 내 삶의 일부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병원은 송탄 전철역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탄은 어렸을 때 살았던 평택과 가까워서 내게 친숙한 곳이었다. 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니 송탄 신경정신과 간판이 보였다. 이곳이 나를 살릴까. 아담하고 깔끔하게 꾸며놓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나와 비슷한 증상들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유대감마저 느꼈다. 빈 의자가 생겨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내 옆에 얼굴이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더 들어 보였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나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자기는 어떻게 여기 왔어?”

처음 보는 사람보고 자기라고 하는데 여성스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사랑스럽게 들렸다. 어색하기보다 친근하게 느껴져서 말문이 열렸다.

“아는 집사님이 소개해 주셨어요. 온누리교회에서.”

“그랬구나. 자기 그동안 엄청 힘들었구나.”

마치 내 사정을 아는 듯한 그 말에 내 마음이 녹아버렸다. 나는 짤막하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흠, 흠” 소리를 내기도 하고 고개를 거세게 끄덕이기도 하면서 ‘나도 다 알지’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냈다.

“고생했구나. 에휴, 여기 오는 사람들 다 고생 고생하다 오는 거야. 나도 죽는 줄 알았잖아.”

“언니는 어떠셨어요?”

“내 얘기 궁금해? 해줄까?”

“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녀도 온갖 신체 증상으로 우울증이 시작됐다. 국내에 있는 병원을 안 가본 데가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았다. 어떤 검사를 해도 원인을 밝히지 못했는데, 그녀는 분명히 큰 병을 찾아내지 못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미국에 있는 유명한 병원까지 가 검사를 받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거액의 돈을 쓰고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누군가의 권유로 이곳 정신과에 오게 되어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약을 먹었고 신체 증상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사를 받으러 미국까지 갔다는 얘기가 놀라웠고 그러면서 이해도 되었다. 

“지금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지, 뭐. 그래도 남편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스트레스가 많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성이 남편과 왜 사이가 좋지 않을까.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남편이 좀 잘해 주면 좋을 텐데.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차례가 되어 그녀는 진료실에 들어갔다. 그 후에도 몇 번 우리는 병원에서 우연히 만났고 서로 전화 통화도 했다. 그녀의 삶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지만, 아직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없던 나는 무엇이 그녀를 우울증으로 몰고 갔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우리 둘 모두에게 우울증은 그 실체가 잡히지 않는 액체 괴물처럼 우리에게 들러붙어서 어떻게 떼어내야 할지 모르는 공동의 적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섰다. 차 준구 장로님은 이미 온누리교회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분이었다. 머리 가운데가 약간 대머리였고 웃지 않을 때는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웃을 때는 사람 좋은 분이라는 신뢰가 들었다. 대기실에 비해 진료실은 꽤 넓었다. 책장에는 영어로 된 전문 서적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너무 불안해서요.”

나는 어떻게 내 증상을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가 불안해요?”

“제가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해요.”

장로님은 살짝 코끝을 찡그리더니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그래요?”

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건강검진부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장로님은 내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교회에서는 뭐라고 해요?”

“귀신 들렸다고.”

“본인 생각은 어때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장로님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셨다.

“본인은 우울하고 불안한 거예요. 그건 약을 먹어야 하는 거지 기도하거나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귀신 들렸다고 하는 사람들 말은 아예 듣지 마세요.”

온누리교회의 장로님이고 예배까지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 말씀하시니 속이 다 후련했다. 
 “약을 먹으면 정말 낫나요?”

장로님은 한 20분 정도 약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에 대해 처음 들었다. 우울증은 본질적으로 이 신경전달물질에 문제가 생겨서 걸리는 병이었다. 약은 그 물질의 분비를 도와주어서 우울한 기분을 조절해주고 불안을 낮춰준다.

“내성 같은 건 생기지 않나요?”

“이 약은 평생 먹어도 괜찮아요.” 

장로님은 약에 대한 나의 거부감과 저항감을 누그러뜨리는 말씀을 덧붙였다.

  나는 약을 처방받고 긴 설문 검사지를 받아 병원을 나섰다. 병원에서 바로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분홍색으로 된 원형 알약이었다. 그 약을 하루 세 번 먹으라고 했다. 시아버님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지난 두 달 반 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던 불안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여보, 신기해. 나 지금 불안하지 않아.”

“그래요?”

약 한 알을 먹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지? 나는 놀랐고 한편 ‘이제 살았다.’는 깊은 안도감에 행복하기까지 했다. 약 한 알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지옥에서 지냈다니.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더 빨리 알았더라면. 이런 정도라면 강의도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나는 그때 누구나 그런 극적인 약 효과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맞는 약을 찾기 위해서 병원을 전전하고 용량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처음 먹은 약이 나와 딱 맞았던 건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나는 이제 곧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될 줄로 낙관했다. 앞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 삼 년의 긴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으랴.


  처음에는 매일 아침, 점심, 잘 때 세 번 약을 먹었다. 마치 우울증이 다 나은 듯이 편안했다. 그 지독했던 불안이 이렇게 말끔히 사라지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장로님은 효과가 좋으니 약을 바로 두 번으로 줄이자고 했다.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먹어도 편안했다. 또 한 번으로 줄였다. 그 정도도 지낼만했다. 그렇게 하루 한 번 알약 한 알로 몇 달 동안 지냈다. 

  곤지암 요양시설에서는 아버지의 검진 결과를 보고 입소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혀왔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입소 자격 박탈이었다. 치료받기 전 나는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다가 관악교회에서 알던 지현 자매님이 운영하는 요양시설에 대해 듣게 되었다. 나는 자매님에게 전화했다. 

“자매님, 우리 아버지 좀 받아주시면 안 돼요?”

“자매, 아버님 처지가 딱하긴 한데 여기서 잘 지내실 수 있을까?”

“제발 도와주세요. 가실 데가 없어요.”

지현 자매님은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 힘들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울면서 호소하자 일단은 모셔보자고 했다. 

  병원에 다녀온 그 주 토요일에 아버지를 데리고 입소할 준비를 해갔다. 짐이라야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 속옷, 양말, 수건이 전부였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것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따뜻하고 햇살이 밝은 날이었다. 

  동생은 다섯 살 된 조차 예영을 데리고 왔다. 예영이는 내가 결혼한 해, 같은 달에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동생이 보내준 예영의 사진을 보고 또 봤다. 조카와의 만남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랐다. 귀국해서 만난 예영은 환상 그 자체였다. 오밀조밀한 눈, 코, 입하며 통통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몸에 뽀얀 살결. 내 앞에서 살짝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모습에 나는 황홀해졌다. 고모를 처음 본 예영은 낯을 많이 가렸다. 아기 때부터 보아오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아쉬운 조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설은 내 맘에 쏙 들었다. 일 층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이 큰 방을 함께 쓰셨다. 이 층의 작은 방 두 개에는 병원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들이 쓰는 방이었다. 할머니들은 십여 분 계셨고 이 층에는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실 분이었다.

“저희 아버지 잘 부탁드려요.”

“아, 걱정 마요. 사이 좋게 잘 지낼 테니.”

그런데 아버지를 모셔놓고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현 자매님에게 전화가 왔다.

“이 층에 계시는 다른 아버님이 자매 아버님하고 도저히 못 지내겠다고 하시네.”

“왜요?”

“자꾸 담배 달라고 하시고, 돈 꿔 달라고 하시고. 너무 귀찮게 하시나 봐. 여기 오래 못 계시겠어.”

“그럼 어떡해요, 자매님? 아버지 잘 설득해서 그런 행동 못 하시게 하실 수 없어요? 저희가 곧 가볼게요.”

우리는 자주 시설에 가서 아버지를 설득하기도 하고 함께 생활하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잘 봐달라고 부탁드리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었는데 결국 지현 자매님에게 최후통첩이 왔다.  

“자매 아버님이라 내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아버님은 이런 시설에 못 계셔. 병원으로 가셔야 해. 병원 모시고 가, 자매.”

  내가 더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알겠어요, 자매님.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나는 동생과 의논해 일단 아버지를 일산 백병원 정신병동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 아버지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후에 거취를 결정하기로 했다. 백병원 정신병동은 개방병동이었다. 가족들이 병동 안에 들어가 환자의 생활도 살펴볼 수 있고 면회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넓은 병동 안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어 만족하셨다. 그곳에서 계속 지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장기 입원을 할 수 없었다. 

   한 달 후 아버지에게 알콜성 치매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알콜성 치매는 그동안 왜 아버지와 제대로 된 소통이 되지 않았는지, 아버지가 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독과 마찬가지로 치매도 진행성 질병이어서 되돌이키는 건 불가능했다. 중독은 치료라도 할 수 있지, 치매는 치료도 되지 않는 병이었다. 

  병원에서 아버지가 가실 수 있는 알콜 전문병원을 소개해줬다. 파주에 있는 민들레 병원이라는 곳이었다. 한 달 병원비가 오십 만원이었고 입 퇴원이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장기 입원이 가능했다. 바로 엠뷸런스로 아버지를 이동시켰다. 민들레 병원에서는 토요일마다 경의선 금촌역에서 병원까지 정해진 시간에 차량으로 면회객을 데리고 오고 데려다줬다. 나는 매달 한 번씩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다. 아버지는 2003년부터 2010년 돌아가실 때까지 도중에 인천 병원으로 옮겼던 이 년을 제외하고는 인생의 말년을 그곳에서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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