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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5장 코아의 발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약을 너무 빨리 줄였던 탓일까.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약 효과가 종일 지속되지는 않았다. 나는 약을 빨리 끊어보려고 힘들어도 참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약을 먹었다. 그리 한 것이 우울증을 겪는 내내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성경 시편 23편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구절이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두 텍스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겪게 되는 극심한 고통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비유로 표현한다. 내게는 2003년부터 시작된 우울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다. 다윗이나 크리스천과는 달리, 나는 그 기간 내내 해를 두려워했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나는 그 시기를 견뎌내지도 이겨내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버텨낸 것조차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은 그저 그 골짜기를 통과한 것이었다. 죽지 않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 통과하게 되었다. 내게는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는 지난 내 삶을 돌아봤다. 그 이전에는 우울증이 없었을까. 되돌아보니 대학에 입학할 때도, 대학을 졸업할 때도, 러시아에 갔을 때도, 결혼했을 때도 나는 우울증을 겪은 게 분명했다. 인생의 큰 전환점에 서거나 상실을 경험할 때, 좌절을 겪을 때 나는 늘 우울증에 걸렸었다. 그것도 3년에서 5년 정도 주기적으로. 아버지의 알콜 중독이 심해진 주기와 거의 일치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내 몸이 기억하는 그 주기를 우울증으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신기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아무리 우울하고 힘들어도 일상생활을 어떻게든 꾸려나갔다는 점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모든 일상이 무너졌다. 치료를 받기 전 먹고 자고 걷고 숨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약을 먹기 시작한 후 기본적인 일상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나는 공부를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우울증이 회복되고 나서 나는 숨 쉬고 먹고 자고 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됐다.

  나는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내 인생은 끝났다. 대학 입학 후에도, 졸업 후에도, 러시아에 가서도 이제 내 인생은 끝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하던 공부를 여전히 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그 긴긴 하루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막막했다. 책과 공부가 내 삶에서 사라지자 시간의 여백이 사막처럼 넓게 펼쳐졌다.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6년의 공백이 있었으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영주에 사는 사촌 

언니 집도 다녀오고 친척들을 만나러 한 바퀴 돌았다. 그런 내 모습이 꼭 일 년에 한 번씩 집을 비우고 친척들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를 닮아 보였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러시아에서 그 무서운 시기를 겪어가며 견딘 대가가 이거라고. 그립던 고국에 돌아와 그 푸근한 품에도 안겨보지 못하고 이게 뭐란 말인가. 나는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꼈다. 고국에서 나는 외국인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은 변해 있었고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배우 김정은이 하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들었다. 그 문구가 외계인의 소리같이 생경하고 기이하게 들렸다. 혁명기의 시인 에세닌은 혁명으로 변화된 고국의 현실에서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결국 페테르부르크 이삭 대 성당이 내다보이는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혁명 후 유럽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던 천재적인 여성 시인 츠베타예바 역시 고국에서 유럽에서보다 더한 고독을 맛보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들과 달리 내가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았던 건 순전히 죽음의 공포 때문이었다. 

  죽음의 두려움과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매일 근거 없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면서도 동시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죽음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죽음이 가공스러울 정도로 두려웠다. 이미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포가 이제는 내 속에 깊이 둥지를 틀고 잠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인 걸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겪는 고통일까, 죽음 후에 있을 사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일까. 명료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켜진 회로처럼 늘 혼란스러웠다. 뚜렷한 원인도,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죽음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유명한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집요하게 죽음의 문제를 파고들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위대한 대작가가 풀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고민했던 문제라면 나 같은 사람이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인 건 당연했다. 

  우울증이 낫고 나서도 죽음의 문제는 근 이십 년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나에게는 멸절 불안이 있다. 아마도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난동을 부리면 어린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내게 작용했을 것이다. 내게 죽음은 폭력과 동의어였다. 그저 자다가 조용히 죽는 죽음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는 폭력이 없으니까. 그러나 사고나 살해, 병으로 인한 죽음에는 반드시 폭력적인 요소가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는 죽고 싶지 않은데 죽어야 하는 현실을 강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불가항력으로 덮쳐오는 폭력이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비웃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거하는 인간을 경탄하고 존경했다. 그들만큼은 죽음보다 인간이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이들이었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존엄사를 지지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죽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해주길 원한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유한성 앞에서 신에게 굴복했던 나는 아직도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죽음을 결코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죽음은 단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문턱에 지나지 않을 뿐, 이 세상의 수고를 다 마친 사람은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태도를 습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끄러웠고 남들에게 드러내기가 힘들었다. 이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죽음이 그렇게까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됐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갱년기에 극도의 쇠약함을 경험하면서, 나는 죽음이 나를 이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해 줄 수 있는 고마운 친구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닥치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며 살지는 않는다. 어떤 논리적인 해결이 아니라 삶의 경험과 고통의 시간이 벌어다 준 고마운 깨달음이다. 이제는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를 날마다 고민하며 살고 있다. 모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익숙해진 내 삶의 방식이다.      

  2003년에는 그해 말이 되면 나아질까 기대했다. 해를 넘겨도 우울증이 계속되자 나는 이제는 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낙담했다.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렸을 때 무엇이 힘드냐고 종종 묻곤 한다. 여러 가지가 있다. 죽음의 공포와 죽고 싶은 마음 외에도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다. 내겐 익히 익숙한 외로움이었지만 더 깊고 처절한 외로움이었다. 날마다 한강 공원에 나가면 사람들이 짜장면을 시켜서 먹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시켜서 먹을 날이 올까. 러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단절된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도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 나는 마치 수족관 안에 들어있는 물고기 같았다. 수족관 밖의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며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수족관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보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통도 있었다. 사람들은 의지니 믿음이니 하는 말을 했다. 내 주변에 우울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이야 너무 흔한 질병이 되었지만 이십 년 전만 해도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빈약했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충고와 조언들이 다 부질없었다. 할 수 있는 힘도 없었고 해본 들 효과가 없었다. 나는 이해받고 싶었다. 공감의 언어가 절실했다. “네 맘 알아. 얼마나 힘드니?” 그런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단순한 처방을 내렸다. 낙관주의로 나를 단숨에 우울에서 끌어올리려 했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감기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몰랐다. 

  무엇보다 힘든 건 도대체 왜 우울증이 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이 해소되었는데도 우울증은 지속됐다. 뭔가 다른 더 깊은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이유라도 알면 좀 낫겠는데 병이 온 이유를 모르니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앞으로 이런 삶 아닌 삶이 계속되리라는 예상,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자꾸 나를 덮쳐왔다. 길고 긴 터널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터널. 사람들은 이 터널이 반드시 끝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희망을 줬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좋으니 어서 이 터널이 끝나기만을 염원했다. 과연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신앙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그래도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그 하나님은 내 삶에서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성경을 읽지도, 기도하지도, 찬양을 부르지도 못했다. 믿는 이들과의 교제도 단절되었고 예배에 참석해도 자리만 채울 뿐이었다. 봉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믿음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행위가 멈춰 섰다.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내버려 두실 수가 있을까. 완전한 하나님의 부재. 흔히들 말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걸 내가 통과하고 있는 것일까. 이 밤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오기는 할까. 영영 밤에 갇혀 그대로 끝나고 마는 건 아닐까. 소스라치게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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