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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5장 코아의 발견. 자기 삶을 찾아서

자기 삶을 찾아서    

 

  2004년에 동생들의 삶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6년부터 LG전자에서 근무했던 큰동생은 미국 지사로 발령받았다. 동생에게도 언젠가는 해외에 나갈 기회가 올 것이라 여겼다. 내가 귀국하자 바톤 터치라도 하듯 동생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 문제로 가정 중심으로 살아보지 못한 동생 부부가 안쓰러웠다. 훌훌 가족사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오붓하게 가족끼리만 홀가분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조카 예영을 몇 년 동안 못 보게 되어 아쉬웠다. 그래도 조카에게 어린 시절 미국 생활이 귀한 추억과 자산이 될 것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생 가족을 보냈다. 미국에 가서도 동생은 매달 아버지 병원비 일부를 꼬박꼬박 보내왔다. 나는 러시아에서 6년 반, 미국에서 5년, 총 십여 년 동안 진의 가족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었다. 

  늦깎이 졸업을 한 막내는 활동을 넓혀가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된 동생의 결혼이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활동 중에 만난 아가씨와 사귀고 있다고 했다. 큰동생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 아가씨와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버지는 빠졌지만 온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이었다. 유일한 아이 예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사이를 돌아다녔다. 누가 삼촌이고 누가 고모이고 고모부인지 어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보는 삼촌의 애인에게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샐쭉하니 조금 떨어져서 관찰했다. 그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얼마 후 동생은 그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상견례와 결혼식이 이어졌다. 12월 초 하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말이 있다고 오히려 좋은 징조라 했다. 나와 큰동생의 결혼식에서는 어머니 자리에 외숙모가 앉으셨다. 그런데 막내는 내게 그 자리에 앉아달라고 부탁했다. 고작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누나지만 동생에게는 내가 어머니를 대신하는 존재였나 보다.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수락했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파란 색감의 한복을 빌렸다. 올케의 어머니와 함께 초에 불을 밝히고 아버지 옆에 앉았다. 결혼식을 지켜보는 내내 뭉클했다. 어머니가 이 자리에 계시면 어땠을까. 이제 세 자녀가 다 결혼하여 어른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보고 계신 건가요.

  드디어 우리 삼 남매는 각자 가정을 꾸리고 서로에게서 분리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때때로 함께 만나는 시간이 그리 행복했다. 특히 결혼 초기 아이가 없을 때 우리 부부와 막내 남동생 부부는 서로 자주 만났다.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별일 없이 만나기도 했다. 2007년에 동생의 가정에 두 번째 조카 가영이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때부터 보아온 가영의 존재는 내게 감동 그 자체였다. 한, 두 살 때까지는 나를 빤히 응시하던 가영이가 세 살 무렵부터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꼬모, 꼬모.”하며 내게 처음부터 반발을 쓰던 가영은 지금도 존댓말 쓰기를 거부한다. 입양해 딸이 생기기까지 조카들은 내 삶의 윤활유였다. 살아있음의 기쁨을 문득문득 느끼게 하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2005년이 되자 남편은 더 이상 주말부부로 생활하지 못하겠다며 집에서 출퇴근을 시도했다. 6개월 동안 출퇴근한 결과 한 달에 교통비 지출이 생활비의 3분의 1 수준이 되었다. 결국 나는 대전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대전은 평택과 서울 다음으로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정착지가 되었다. 여름에 둔산동의 수정아파트에 전세를 구해 이사했다. 수정아파트는 내 어머니 이름과 같았다. 살고 있는 아파트 명칭에서 어머니 이름을 매일 확인하는 게 신기했다.

  당시 나의 우울증은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우울증의 회복 사이클을 그래프로 그려보자면,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어느 지점에서 약간의 도약을 보이고 또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도약을 보이는 식으로 그려질 것이다. 약 외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일이었다. 강의하면서 아주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다. 강의하는 동안 어떤 학생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열정적으로 강의한다는 평을 받았다. 중간에 강의가 끊어진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다시 우울감이 심해졌다. 어떤 일이라도 사람들 틈에서 하고 싶었다. 나는 저녁에 역 근처에서 가판대를 벌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전에는 생계 때문에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이제는 그들의 몸놀림과 외침이 팔팔 뛰는 생선처럼 생동감 있어 보였다. 어떤 일이든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정직하게 일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나도 언젠가 다시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될까. 

  일 외에 도움이 된 것은 여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주말에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봄에는 산수유와 벚꽃, 매화를 보러 지리산 주변으로, 여름이면 산과 바다가 있는 강원도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자락으로, 겨울이면 따뜻한 남도나 겨울 바다를 보러 동해안으로 떠났다. 아직 해외여행을 갈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러시아에 가기 전에 국내 여행을 거의 해보지 못했던 우리는 아이가 없는 자유로움을 맘껏 누렸다.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제주도나 배를 타야 하는 섬 빼고는 어디든 갔다. 여행할 때만큼은 우울증이고 뭐고 다 잊고 즐거운 기분에 들떴다.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어디 가나 사람들이 있으면 우울감이 잠시나마 자리를 비켜주는 듯했다. 자연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내를 맡고 멀리 산봉우리 뒤에 또 산봉우리가 솟아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마음에 평화가 찾아 들었다.

  내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매주 어김없이 규칙적으로 전화를 걸어주었던 친구 지연과 대화 선배였다. 그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나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나의 감정 상태를 일기에 적듯이 그들에게 들려줬다. 두 사람은 나의 회복을 재촉하지도, 내 상태에 한숨을 짓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들어주었다. 우울증 환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준 위안은 컸다. 나는 우울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어디에서 도움이 될 인연을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불가항력으로 내게 닥쳐온 우울증에 대해 내가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숨기거나 창피해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은 공감 능력에 있어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 우울증의 회복에 남편의 기여가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지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남편은 일등 공신이라 할 만했다. 어쩌면 공감 능력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주위 사람들은 남편의 인내에 혀를 내두르고 최고의 남편감이라는 후광을 씌워줬다. 나는 극도로 우울해질 때면 남편에게 “나를 버리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 정도로 우울해하는 아내라면 버림받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005년이 다 지나가도록 우울증에서 벗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삼 년이 다 되어도 낫지 않는 우울증을 평생 품고 갈 각오를 했다. ‘그래, 벗어날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 우울증과 같이 사는 거지,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2006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2006년은 내게 회복의 해로 다가왔다. 


우울증의 끝코아의 발견     


  아버지는 면회를 갈 때마다 퇴원시켜 달라고 졸랐다. 방을 얻어주면 혼자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야 한다고 조급해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혼자 살아요?”

“왜 못 살아? 방이나 얻어줘. 내가 밥도 해 먹고 다 할 수 있어.”

“안 돼요, 아버지. 여기 그냥 계셔요.”
 “나 국회의원도 출마해야지.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해.”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입원한 지 삼 년이 지났다. 아버지의 등쌀에 마음이 약해졌다.

“여보, 아버지 우리가 모시고 살면 안 될까?”

“괜찮을까?”

“한번 해보고 안 되겠으면 다시 입원하시게 하면 안 될까?”

“그래봐요, 그럼.”

  아버지를 퇴원시켜 대전으로 모시고 왔다. 결혼하고 한 번 정도는 아버지와 살아보고 싶었다. 이제 우리 집도 생겼고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어쩌면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원에만 계속 계시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영락없는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방에 누워 다리를 꼬고 발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흘러간 옛노래를 메들리로 불렀다. 얼마 만에 듣는 아버지의 메들리인지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뿌듯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낮에 아파트 경로당에 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화기가 울렸다.

“거기 허 성운 할아버지 댁이오?”

“네, 그런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오?”

“저 딸인데요.”

“아,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아버님 좀 모셔가요. 아버님이 경로당에 오시면 사람들한테 담배 달라, 돈 달라 아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서 곤란해요. 아버님은 여기 오시면 안 돼요. 사람들이 아주 질색해. 따님이 잘 얘기해서 못 오시게 해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역시 아버지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서도 경로당에 나오는 노인분들이 좀 야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버지, 경로당 가지 마세요. 거기 할아버지들이 아버지 때문에 힘드시대요.”

“내가 뭘 어쨌다고?”

“담배 달라, 돈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다 싫어해요. 이제 가지 마시고 집에 계셔요.”

  아버지는 한동안 경로당 출입을 삼가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만 지내도 괜찮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해진 아버지는 다시 경로당에 가기 시작했고 또 전화가 왔다. 그렇게 삼 개월을 버텼다. 이제는 남편에게도 미안해졌다. 조금씩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나의 우울증에 알콜성 치매까지 있는 장인까지 남편이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결국 다시 아버지를 입원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삼 개월 밖에서 계셨으니 그래도 갑갑증이 좀 풀렸으리라 스스로 위안했다. 아버지는 순순히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대전에 와서 대전 온누리 교회를 다녔다. 교회의 소그룹인 순모임에서 내 우울증에 대해 말하면 다들 잠자코 들어줬다. 특히 리더인 순장의 아내는 과거 자신에게도 심한 우울증이 있었다면서 약을 먹지 않고 극복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게 꼭 나을 거라며 희망을 줬다. 부동산을 하던 한 여자 집사님은 사업 실패와 질병 등 고난을 종합세트로 겪은 분이었다. 내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한번 집에 갈게.”라고 했다. “언제 오실 거예요?”라고 물으면 “너무 바빠서. 그래도 꼭 한번 갈게.”라고 했다. 아버지를 다시 입원시키고 난 어느 날 집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한번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되네. 미안해서 전화라도 했어.” 

  집사님은 아버지를 왜 계속 모시지 못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냥 모시고 살지 그랬느냐고 말씀하시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덧 나의 어린 시절을 거슬러 내 인생 전체로 확장됐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동안 집사님은 단 한 번도 “으응.”이나 “그랬구나.”라는 짧은 응답조차 없었다. 온몸이 귀가 되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무려 두 시간 동안 내 인생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하다 울먹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누군가 내 말을 그렇게 오랫동안 끊지 않고 들어준 적은 없었다. 말을 마치고 나는 집사님이 어떤 충고를 할지 기다렸다. 그런데 집사님의 말은 아주 짧았다. “자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네. 잘 살아왔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 눈에서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러움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이해받은 데서 오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음을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내가 원했던 것이.’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통찰이 섬광처럼 나의 뇌를 0.1초 만에 스쳐 지나갔다. 죄책감! 그거였구나, 내가 아팠던 이유가. 집사님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잘 살아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풀어진 것 같았다. 비밀의 문을 굳게 채워놓았던 자물쇠가 열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가 드러났다.

  나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내가 그 순간 우울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이다. 폭포처럼 흐르던 눈물이 잦아들고 시냇물처럼 계속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천변에 앉았다. 4월이었다. 새하얀 목련이 바람에 흩날렸다. 따스한 봄 햇살이 천을 흐르는 물과 깔깔거리며 장난을 쳤다. 온 세상이 생명의 약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삼 년 동안 산 채로 무덤 속에 갇혀 있던 내가 나사로처럼 무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회복은 ‘아하!’와 함께 홀연히 찾아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날 0.1초 만에 내가 깨닫게 된 우울증의 작동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결혼한 후, 더 이르게는 러시아에 유학하면서부터 내 마음에는 원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시간이 지나도 죄책감은 해결되지 않았고 한국에 돌아오면 나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왔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의 해소되지 않은 죄책감은 결국 나를 심리적으로 처벌했다. 죄에는 용서 아니면 처벌 두 가지 해결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가차 없는 나의 양심은 자신을 처벌하여 죽음과 같은 상태에 처하게 했다. 삼 년이라는 기간은 나의 무의식이 선고한 형벌의 기간이었다. 그 시간이 다 차서 드디어 내 양심은 내게 방면을 명했다. 만약 집사님의 말을 듣지 못했더라면 그 기간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의 무의식이 나를 놓아주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해결됐다. 우울증은 결코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었다. 나를 벌한 것은 내 양심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자신을 벌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울증으로 자신을 벌하는 동안 하나님은 가슴 아파하면서 내가 자신을 놓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깨달음에도 꼭 적합한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거짓된 죄책감으로 고통받았음을 알게 됐다. 집사님의 말을 통해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러시아에 간 것도, 결혼해서 돌아올 수 없었던 것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한 것일 뿐, 가족이 고통스러워한다고 해서 그게 내 탓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들이 많았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나 나는 한사코 “아니야, 내 탓이야.”라고 말했다. 그만큼 나는 경직되어 있었고 어쩌면 고집스러웠다.

  스물세 살에 거듭남을 체험한 이후 나는 다시 한번 커다란 정신적, 영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때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범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됐다. 소위 정상성의 범주 밖에 있는 현상들이 더 이상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우울증을 비롯해 불안장애, 공포증 등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아’라는 단어를 접하게 됐다. 코아(COA)는 ‘알콜 중독자의 자녀’(Children of Alcoholics)라는 영어 단어의 약자였다. 역기능 가정이라는 용어도 만났는데, 그 용어가 알콜 중독자 가정을 연구하면서 생겨났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특정한 용어로 정의되고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학문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새로웠다. 

  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우울증의 원인이 멀게는 나의 어린 시절, 알콜 중독자를 아버지로 둔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하고 스스로 많은 것을 떠맡으려고 하는 내 성향은 우울증에 취약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중독이 대물림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걸 고려한다면, 우리 삼 남매 중에 알콜 중독자가 출현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우리는 중독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된 대가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은 나를 가장 먼저 찾아왔고 이어 큰동생에게 찾아갔다. 막내는 다행히 우울증의 방문을 피했다.

  나의 관심은 자신을 넘어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확장됐다. 언젠가부터 내 주변에 우울증, 불안장애, 사회 불안증, 성격장애, 심지어 조현병으로 아픈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넘쳐나고 우리 사회가 그런 이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혹독하고 잔인한 사회임을 보게 되었다. 전에는 이해의 영역 밖에 있던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됐다. 나는 언젠가 심리상담을 공부해 그런 이들을 돕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무려 십 칠 년이 흐르고 나서, 다시 우울증이 재발한 후 나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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