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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6장 이별. 면회가는 길

6장 이별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와 이별할 때가 다가왔다. 나는 아버지를 수용하고 비로소 아버지에게 헌신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잘한 일 중 하나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면회 가는 길  

   

  민들레 병원은 주변에 아무 건물이 없는 산 아랫자락 호젓한 장소에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면 병원 마당이 나왔고 정면으로 병원 건물이 보였다. 나무와 꽃들을 가꾼 흔적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면회실을 겸한 식당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평소에 식사하는 곳은 아니었다. 면회객들이 오면 그곳에서 챙겨온 음식을 먹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면회실 안에서는 간단한 음료수나 과자를 팔기도 해서 나는 면회를 갈 때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사 가지 않았다. 대전에서 파주까지 뭔가를 사 들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전역에서 서울역까지 기차, 서울역에서 금촌역까지 다시 경의선 기차를 타야 했고 금촌역에서 병원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긴 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면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면회 신청을 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십 분쯤 후에 간호사와 함께 아버지가 면회실로 들어섰다. 흰 바탕에 파란색 잔무늬가 있는 환자복은 아버지의 마른 몸을 감싸기에는 헐렁했다. 입원한 후로는 볼록 나왔던 뱃살도 다 빠지고 운동이 부족해서인지 허벅지와 종아리가 유독 가늘어졌다. 우리는 늘 면회실 앞쪽에 놓인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지내요, 아버지?”

“별일 없어.”

“심심하진 않으세요?”

“심심하진 않아.”

아버지는 나와 대화할 때도 주변에 누가 있는지 연신 두리번거리곤 했다. 아는 환자라도 있으면 아는 체를 했다. 

“내 딸이야. 러시아 유학 갔다 왔어.”

동생들이 오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내 아들이야. 서울대 나왔어.”라며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어이구, 자식 잘 두셨네.” 그 소리를 들으면 아버지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번졌다. 그 맛에라도 지내시라고 만류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폐쇄병동에 있었기 때문에 병원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직접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말을 통해서만 대충 짐작할 뿐이었다. 한 방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매일 프로그램을 해서 시간은 잘 간다고 했다. 아버지는 매번 사탕과 콜라를 사 달라고 했다. 

“아버지, 이런 거 드시면 이빨 상해요. 다른 거 드세요.”

“난 이게 좋아.”

아버지는 골초였던 탓인지 유난히 단것을 좋아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사탕과 건빵을 몇 봉지나 사 달라고 했다. 
 “내가 저번에 다른 사람한테 얻어먹어서 이번에는 내가 살 차례야.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잖냐.”

맞는 말이었지만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오래전에 해 넣은 틀니가 자꾸만 빠지고 검어지는 게 단 음식을 많이 먹은 탓인 것 같았다.

“아버지,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가족이 면회와요?”

“연고가 없어서 여기서 계속 사는 사람들도 있어. 불쌍해.”

“아버지는 자식들이 면회 와 좋아요?”

“좋지, 그럼. 언제 오나 그거만 기다리는데...”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병원의 일상이나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얘기는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말없이 그저 앉아있는 시간이 면회 시간의 절반을 채웠다. 간호사가 아버지를 데리러 오면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서운하고...” 이 말을 대사처럼 되풀이했다. “다음 달에 또 올게요, 아버지. 잘 지내셔요.”

“그래.”

아버지는 사탕과 건빵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소중히 들고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뒤로 돌아 병동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등이 구부정해 있었다.

  가영이가 세 살쯤 되었을 무렵 어버이날에 동생 가족과 함께 면회했다. 가영이는 어린이집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었다며 할아버지에게 드리겠다고 가져왔다. 꼬물꼬물한 작은 손으로 만든 카네이션이 제법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와, 할아버지 보시면 좋아하시겠는걸. 우리 가영이 최고!”

칭찬받은 가영은 으쓱해져서 병원 마당에 있는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뛰었다. 아버지가 나오시고 가영이가 만든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손녀에게 받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카네이션이었다. 

“아버지, 카네이션 오늘 하루 종일 달고 계세요.” 

“그럼 그래야지.”

중독으로 허망하게 날려버린 세월이 야속했지만, 대를 이어 아버지의 자손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삶이 전혀 헛된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날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근처 파주 영어마을과 헤이리마을을 들렀다. 아버지는 병원 밖으로 나와 기분이 들떴다. 그런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민들레 병원에 환자가 꽉 찼다며 아버지를 인천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도 되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인천 병원은 폐쇄병동이 아니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제는 대전에서 서울역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전철로 동암역까지 가서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까지 가는 길이었다. 파주까지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병원은 도로변에 있는 빌딩이었고, 한 층 전체에 노인들만 지내고 있었다. 큰 방 몇 개에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나누어 방을 썼는데 각자 병실 침대를 사용했다. 큰 거실이 있어 그곳에서 대화도 나누고 바둑을 두기도 했다. 아버지가 생활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게 좋았다. 그곳에는 매점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드시고 싶을 만한 음료수나 과자 등을 사 갔다.

  인천 병원에는 민들레 병원보다 힘센 남자 간호사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가끔 지나가는 한 남자 간호사를 보고 욕을 해댔다.

“저놈이 나를 침대에 묶었어. 나쁜 놈이야, 아주.”

그 간호사는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다. 가끔 난폭해지는 아버지를 저지하기 위해 침대에 손발을 잠시 묶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아주 꽉 묶는 건 아니에요. 금방 풀어드려요.”

“네에...”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항의를 할 수 없었다. 병원을 믿는 수밖에, 그리고 아버지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는 노래방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주 모여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그나마 즐거운 시간일 터였다. 하루는 병원에 들어서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거실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거실로 나갔다. 

“여기 있어라. 나 노래 부르는 거 들어.”

“네.”

나는 거실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사람씩 나와 마이크를 잡고 반주에 맞춰 옛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간호사들과 내가 청중이었다. 열심히 박수치고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 아버지 십 팔 번이었다. 아버지는 소리를 꺾어가며 제법 구수하게 노래를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반주보다 한 박자 빠르게 노래를 부르며 끝까지 박자를 맞추지 못했다. 그래도 열심히 부르는 아버지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마이크를 잡았으니 한 곡으로 끝낼 수 없다는 듯 연달아 몇 곡을 불러제꼈다. 다른 할아버지들의 항의를 받고서야 제 자리로 돌아왔다. 노래방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고 병실을 나섰다. 아버지도 그날은 손만 번쩍 들어 흔들 뿐 나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2008년에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한 번 더 집에 모셔 온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는 친척들 집에 다 전화를 돌렸다. 아버지가 다녀갔다는 말은 하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후 홀연히 아버지가 집에 나타났는데, 그 몰골이라니! 입고 나간 옷은 흙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머리칼은 다 헝클어지고 얼굴은 새까매져 있었다.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는 구겨진 천원, 만원 지폐로 불룩해져 있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 날에 아버지가 밖에 나갔다. 누군가 벨을 눌러 나가보니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부축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가 길에 쓰러져 계셨어요.”

“이런 고마울 데가. 정말 고맙다, 얘야.”

“아니에요.”

아이는 쑥스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여 빗길에 쓰러져 옷과 얼굴에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아버지를 퇴원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병원 밖에 있다가는 아버지가 길에서 돌아가실 수도 있었다. 민들레 병원에 다시 자리가 났다고 해서 인천에서 다시 파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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