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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6장 이별. 시한부 선고

시한부 선고     


  2009년에 큰동생의 가족이 5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여섯 살이었던 예영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돌아왔다. 그 사이 동생은 한국 본사에 올 때마다 아버지를 뵈러 갔다. 동생 가족에게 아버지에 대한 짐을 덜어줄 수 있어서 러시아에서 진 빚을 갚는 느낌이었다. 예영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국에 잠시 나온 적이 있었다. 삼 남매의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갓 한 살 된 가영이가 기어서 자꾸만 예영이 옆으로 갔다. 예영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손을 만지곤 했다. 처음 보는데도 언니인 줄 아나 보다 신기했다. 동생이 없는 예영이는 가영을 보며 어찌 대해야 할지 난처한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잔잔한 행복이 밀려왔다. 진이 귀국한 여름에는 삼 남매 가족 전체가 단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 가족이 했던 여행이었다. 내가 얼마나 행복의 절정을 경험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도 그리워했던 동생이 돌아왔으니 아버지가 무탈하게 잘 지내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나를 제일 예뻐했다던 아버지도 장남이라 그런지 동생이 없으면 허전해하고 찾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당시 아무도 몰랐다. 그해 가을, 면회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아버지가 오는지 내다보고 있었는데, 병원 문을 나서서 걸어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버지는 걷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간호사가 아버지를 일으켰다. 조금 더 걷다가 다시 한번 주저앉으려고 하는 아버지를 간호사가 부축했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가 왜 저러지?’ 아버지가 면회실로 들어섰다. 간호사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왜 주저앉으신 거예요? 어디 문제 있으신가요?”

“아버님이 요즘 좀 기운이 없으셔요. 그래서 그러신 거예요.”

간호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왜 기운이 없으신데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노인들이 그렇게 갑자기 기운이 약해지시곤 해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칠십삼 세였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콕 쑤시면서 아려왔다. 이제 아버지도 늙어가시는구나.

“아버지,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픈 데 없어.”

“걷는 거 힘드세요?”

“괜찮아.”

“근데 왜 넘어지셨어요? 평소에 걷는 운동 많이 하셔야 해요.”

“그래.”

아버지와 대화하는 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크게 기운이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면회를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도 아버지의 걸음은 예전과 달랐다. 

  무심한 나는 간호사의 말만 믿고 그저 나이 때문에 쇠약해지시는 거려니 생각했다. 그 후로는 아버지의 걸음걸이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의 걸음이 무슨 병의 징후로 보이지는 않았다. 병원에서도 아무 말을 해주지 않았다. 사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병세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도 한 달에 한 번 멀리서 찾아가는 자식은 세심하게 살필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아버지 상태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2010년 어버이날에 삼 남매 가족이 아버지를 근처 식당에 모시고 식사하기로 계획했다. 나는 오랜만에 모두 모이는 자리가 기대되고 설렜다. 미리 병원에 연락해 아버지 외출을 신청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를 본 나는 충격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아버지에게 한 벌 있는 양복을 입혀 외출을 준비시켰다. 회색 줄무늬 양복을 입은 아버지는 한 달 사이에 살이 쏙 빠져 볼 아래쪽이 움푹 파일 정도였다. 양복 입은 아버지 모습이 막대에 옷을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아버지, 왜 이래?” 나는 놀라고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를 차에 태워 식당으로 가서 식사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스스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래도 갈비탕 한 그릇을 천천히 다 비웠다. 아버지 건강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아버지 틀니가 자꾸 빠져서 식사를 잘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식사를 잘 못하니 살이 갑자기 빠지는 게 당연했다. “아버지 틀니를 교체해야 할 것 같아요.” 병원에서 내놓은 처방이었다. “아버지, 아 해보세요.” 아버지의 틀니 상태를 보니 간호사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 틀니로 식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조금 전에 갈비탕은 잘 드셨는데...어쨋든 원인이 틀니라니 우리는 틀니를 교체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틀니를 교체하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외래로 치과를 데려가야 하는데, 알아봐 달라고 해도 병원에서는 빨리 서두르지 않았다. 생활에 바쁜 동생들이 와서 아버지를 모시고 치과에 가는 건 무리였다. 운전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아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빨리 손을 쓰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몇 달이 지나갔다. 다음 달에는 아버지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간호사는 좀 더 지켜보자고, 노인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간호사의 말만 계속 믿었던 것이 나중에 큰 후회로 돌아올 줄을 그때 어찌 알았으랴. 부모는 자식을 살뜰히 살펴도 자식은 부모를 그리 살피지 못하는 법이다. 

  여름이 되었다. 7월이 되어 무더위가 시작됐다. 나는 무더위가 끝나고 나서 면회를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자꾸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허 성운 아버님이 따님 찾으세요.”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왜 울어요?”
 “선화야, 선화야...”

“말씀하세요, 아버지.”

“선화야, 선화야...”

아버지는 내 이름만 부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린아이같이 울기만 했다. 아버지가 그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슴이 칼에 베이듯 아팠다.

“저희 아버지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간호사를 바꿔서 물었다.

“아버지가 자주 자식들을 찾으세요. 면회 자주 오세요.”

“아프신 건 아니구요?”

“괜찮으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나는 아버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폐쇄병동이 아니라 병원 별관 건물에 있었다. 환자 중에서 몸 상태가 일시적으로 나빠진 환자들을 특별히 돌보는 공간이었다. 1층에 있는 큰 병실 안에 이십 명 정도 되는 환자들의 병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는 눈으로 아버지를 찾았지만 금방 보이지 않았다.

“누구 찾아오셨어?”

병상에 누워있던 한 남자가 물었다.

“허 성운 씨요.”

“아이고, 좀 빨리 오지. 저기 계셔.”

  그 남자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병실 맨 구석 자리였다. 누군가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만 보였다. 나는 급히 그곳으로 갔다. 아버지는 몸을 간신히 눕힐만한 작은 병상 위에서 눈을 감은 채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드러난 앙상한 팔에는 수액에 들어가고 있었다. 식사를 얼마나 못했기에 한 달 사이에 이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을까. 내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이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 조심스레 아버지를 부르며 가느다란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버지는 간신히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 이름조차 부를 힘이 없는지 나를 반가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파요?” 아버지는 역시 고개조차 끄덕이지도 흔들지도 못했다.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중환자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버지 손만 잡고 십 분 정도 서 있었다. “아버지, 다른 병원으로 모셔요.” 옆 병상에 있는 다른 남자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문 앞에 책상을 놓고 앉아있는 간호사 혼자 병실에 있는 환자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그 간호사에게 가서 물었다.

“저희 아버지 상태가 왜 저래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는데 지금 좋아지고 계세요.”

저게 좋아지고 있는 거라고? “식사를 잘 못해 기력이 쇠해지셨어요. 여기로 옮겨오셨으니 좋아지실 거예요. 저희가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 돌본다고? 아버지 상태가 저 지경인데도 수액만 주고 방치하는 게 돌보는 거라고? 나는 따지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를 저렇게 방치한 책임이 어찌 병원에만 있겠는가. 아버지 병원을 옮겨야겠으니 그때까지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는 내가 가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더 이상 병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증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바로 대전에 있는 요양병원을 알아봤다. 다행히 적당한 가격에 시설이 좋은 요양병원을 찾았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도 체크해야 했다. 치매를 염두에 둔 나는 대전 충남대병원 신경외과에 예약했다. 필요한 건강검진도 예약해 두었다. 그곳에서 검사한 후 바로 요양병원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때 틀니도 교체하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가 간경화에 걸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신 세월이 너무 길었으니 간이 온전할 리 없었다. 아버지의 증상이 간이 나빠져서 나타나는 것일 거라고 짐작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생각해낼 수 없었다. 좀 더 빨리 건강 상태를 체크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고생하는 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치료할 수 있다면 치료하고 어렵다면 가까운 요양병원으로 옮겨야지. 자주 아버지를 찾아가면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판단은 이미 너무 늦은 것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버지를 옮겨올 날짜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나는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마치고 같은 순의 자매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집에 거의 도착해가는데 휴대전화기가 울리며 민들레 병원이라는 신호가 떴다. 직감적으로 나는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허 성운 님 따님이시죠?”

“네, 네.”

“저, 아버님이 어제부터 황달 증세가 나타나서 오늘 시내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왔거든요. 검사를 해보니 아버님이 췌장암 말기라고 하시네요.”

“췌..장..암이요?”

“네... 저희도 미처 몰랐어요. 병원에서는 이미 치료 불가능한 상태라고 해요. 한 달 정도 사실 수 있을 거라고 하시네요.”

그때 느꼈던 감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눈물이 터져 나와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던 것밖에는. 운전하던 자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그동안 아버지 모셨으니까 남은 시간도 저희가 아버지 잘 돌봐드릴게요. 저희한테 맡겨주세요.” 

그동안 아버지에게서 나타났던 모든 증세가 췌장암 때문이었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병원에서는 아버지를 끝까지 맡겨달라고 했다.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자식들도 살피지 못했는데 병원이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원망한들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니요. 내일 가서 아버지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바로 가능한가요?”

“그렇게 하시겠어요? 가능하긴 해요.”

“그럼 준비해 주세요. 내일 몇 시쯤 가면 되나요?”

“오후 한 시쯤 오세요. 준비 다 해놓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 곁에 누군가 있었다는 게 위로가 된다는 걸 알았다. 자매는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내릴게요.”

“아버지 잘 모셔요.”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남편과 올케에게 전화했다. 동생이 해외 출장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식을 들은 올케도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 전 뵙고 왔을 때 괜찮아 보이셨는데요.” 올케는 나를 위로했다. 동생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막내에게도 전화했다. 막내는 “뭐라고?”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눈물을 삼키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알았어. 어느 병원으로 모실 거야?...내일 가볼게.”

  전화로 소식을 알린 후 나는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울 수 있는 만큼 실컷 울었다. 한 달.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이었다. 그 한 달 동안 아버지를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만 온전히 관심이 집중된 시간은 그 한 달이 전부였다. 

  그날부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애도가 시작되었다. 세상에 슬픔의 안개가 끼었다. 어머니를 보낼 때는 울지 못했던 나는 이제 성인이 되어 마음껏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남편이 돌아오자 다시 한번 눈물샘이 터졌다. 남편도 내 옆에서 함께 울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살이 빠지는 게 암이라는 신호였는데...내가 너무 무심했어...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해...”   

“당신 잘못 아니에요. 암 발견했어도 치료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랬을까? 오히려 치료하느라 더 고생하셨을까? 췌장암은 발견하기 힘들다던데...그래도 알았으면 빨리 가까이 모셔 오기라도 했을 텐데...아버지 혼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래서 그렇게 자꾸 전화했나 봐...난 그것도 모르고...자식 있어야 다 필요 없어...” 

나오는 대로 쏟아내는 내 말을 들으며 남편은 내 등을 토닥거릴 뿐이었다.

  다음 날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아버지를 이송할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병원 별관 로비에 나와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로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멍한 눈길로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휑한 두 눈과 푹 파인 볼, 앙상한 팔과 다리. 영락없는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구조를 요청하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기운이 없어 입을 열지도 못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을 흘릴 새도 없었다. 간호사들이 아버지를 병상에 눕히고 신속하게 앰블런스에 태웠다. 나는 정산을 다 한 후 아버지의 병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병원을 떠났다. 아버지가 2003년부터 6년 동안 머물렀던 병원은 달리는 차 뒤로 멀어졌다.

  일단 파주 시내에서 아버지의 암을 발견한 병원으로 아버지를 이송했다. 그곳에 가서 아버지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아버지를 돌볼 계획이었다. 차는 금세 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응급실에 옮기고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내게 아버지의 복부를 촬영한 CD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암은 이미 복부 전체로 퍼져 있어서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의사는 한 달 정도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황달을 잡기 위해 담즙을 밖으로 빼내는 시술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며칠 내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했다. 바로 시술을 시작해야 했다. 아버지가 시술하는 동안 나는 병원 컴퓨터로 CD를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은 온누리교회에서 일대일 양육을 해주셨던 장로님에게 CD를 보내드렸다. 고대 의대 교수이자 고대 구로병원에서 권위 있는 내과 전문의였던 장로님은 별것 아닌 건강상의 문제로 연락을 드려도 늘 친절하게 상담해 주셨다. 이번에는 별것 아닌 일이 아니라 장로님의 전문성을 활용할만한 중대한 문제였다. 장로님은 남편에게 파주 병원 의사의 소견에 동의한다고 하셨다. 한 달 이상 살기는 힘들어 보인다며 아버지를 호스피스 병동에서 돌보라고 권하셨다. 나는 그 말을 염두에 두고 나중에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버지의 시술이 끝나자 어느덧 밤이 되었다. 응급실로 돌아온 아버지는 낮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다. 나를 알아보고 말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 많이 아파요?”

“아니, 안 아파.”

아버지는 내가 곁에 있어서인지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의 습관대로 시트 밖으로 드러난 발가락을 까닥까닥했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였다. 그동안 아버지가 불안했구나. 딸이랍시고 곁에 있으니 안정이 되나 보다 싶었다. 응급실에는 아버지 외에 다른 환자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병상 옆에 놓인 침상에서 밤을 지내기로 했다.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응급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막내였다. “왔구나.” 동생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잠들어있었다. 동생은 아버지 얼굴을 보자마자 “흑”하며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몇 분 뒤 울음을 멈췄다. 내 앞에서 동생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날 올케와 통화했을 때 미국에 있는 동생도 전화로 아버지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아내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동생들이 내 앞에서는 여간해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동생은 한 시간 정도 응급실에 머물다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버지 상태에 대한 것 말고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남매들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하지 않았고 특히 감정에 대해서는 말하는 법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버지의 암 선고를 듣고 각자 무엇을 느끼는지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감정을 말하지 말라. 그것이 코아의 삶의 방식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감정을 잘 나누었지만 나 역시 동생들과는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여전히 어색했다.

  밤이 깊어졌다. 아버지의 숨소리가 편안해지고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나도 침상에 누웠다. 병원에서 자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아버지 옆에서 잠드는 기분은 다른 행성에서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 꿈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 미안함, 통렬한 아픔이 가라앉고 아버지를 잘 지켜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달이라도 아버지를 외롭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지. 아버지 옆에 있어야지. 아버지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드려야지. 그 생각만 떠올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래 살길 바라지 않았었다.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단 하나였다. 아버지가 너무 큰 고통을 받지 않고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췌장암은 통증이 극심하다고 알려진 암이었다. 아버지가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걸 볼 자신이 없었다. 부디 큰 고통 없이 지내다가 돌아가시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 외에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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