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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6장 이별. 이별

이별     


  대전 성모병원의 내과 교수는 아버지의 진료 기록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되셨나 그래.” 무수히 많은 암 환자를 보았을 의사가 혀를 찰 정도면 아버지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폐 엑스레이를 찍다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검사는 무리였다. 병원을 옮기느라 비슷한 검사를 반복하게 한 장본인이 나였다. 나는 끝까지 미숙한 아버지의 보호자였다. 

  성모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은 병원 안에서 특별한 별도의 공간이었다. 마치 궁전 안에서 후궁들이 칩거하는 별궁이라고 할까. 병동으로 들어서는 육중한 문을 닫으면 밖의 세상과 차단됐다. 가운데 넓은 로비를 두고 몇 개의 병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병실마다 환자들이 거의 다 차 있었음에도 병동 전체는 늘 고요함과 적막함이 감돌았다. 환자들의 신음마저 간간이 들려올 뿐,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 중간 지대였다. 매일 한 명 이상의 환자가 임종을 맞이했다. 그곳에서 죽음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었다. 처음에 6인실에 들어갔던 아버지는 섬망이 올 때 기저귀를 잡아 뜯고 자다가 소리를 지르곤 해서 옆 병상에 있던 환자가 불만을 제기했다. 할 수 없이 이인실로 옮겼다. 비어 있던 옆 병상에 의식을 잃은 할아버지가 들어오셨다. 그런데 밤사이 돌아가셔서 다시 나가셨다. 그 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병동 안에는 기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리아상이 놓여 있는 성당 기도실이었지만 그곳에서 내가 개신교 신자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잠이 들어 할 게 없으면 기도실에 가서 조용히 앉아있거나 짧게 기도하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곁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내가 러시아에 있었거나 수업이 많아서 아버지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면 어땠을지 아찔했다. 그 학기에 수업이 없었던 것을 감사했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그토록 오랜 기간 공포만을 불러일으켰던 죽음은 막상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그리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로 충만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그때만큼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프다고 투정 한마디, 불평 하나 하지 않는 아버지가 장하기만 했다. 살아있을 때 삶의 모델이 되어주지 못했던 아버지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죽는 거란다’라며 모범을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내 유일한 기도를 들어주심에.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떠나는 순간을 위해 기도했다. 고통스럽지 않게 하소서. 그 순간 아버지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어느 날 병원에 가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간병인 아주머니였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왜요, 아주머니?”

“에고, 빨리 와요. 아버지 돌아가시겠어.”

“왜요?”

“지금 피 토하시고 큰일 났어.”

“금방 갈게요.”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고 중앙로역에 내려 걸어가곤 했었다. 전화를 받은 나는 도로로 뛰어가 택시를 잡아탔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 돼요, 아직은. 제발요, 하나님. 오늘 돌아가시지 않게 해주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아직 아버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병실까지 뛰어가면서 ‘제발, 제발’을 연발했다. 다시 전화가 오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무사하시다는 증거였다. 

  병실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고 앉아있었고 간호사가 바삐 아버지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흑’ 하더니 아버지 입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입원 중에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말기 암의 실체를 마주했다. 아버지의 연약한 육체를 사정없이 짓이겨놓은 그 병이 내게 추악한 웃음을 지었다. 이래도 내가 무섭지 않아? 라고. 아버지가 가엾어서 눈물이 철철 흘렀다. “다행이야. 무사히 넘기셨어. 난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 얼마나 놀랐는지.” 간병인 아주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행히 피가 멈추고 아버지 상태가 진정되었다. 지친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버지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이제는 고생 그만하시고 가시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그날 돌아가시지 않은 것이 감사했다. 조금은 더 시간이 필요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 아버지는 잠을 잤다. “찬송가 불러.” 눈을 뜰 때마다 아버지는 이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만 작은 소리로 아는 찬송가를 다 뒤져가며 불렀다. 남편이 오면 나를 대신해 찬송가를 불렀다. 넓은 성모병원 전체를 휠체어로 구경시켜 주려던 내 작은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는 휠체어에 앉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꺼져가던 아버지의 의식은 어느 날 완전히 무의식 상태로 빠져버렸다. 이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눈을 뜬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찬송가를 부르고 병동을 몇 바퀴 돌면서 하루하루가 지루하게 흘렀다.

  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는 아버지를 보내드릴 준비가 다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을 매일 하며 병원에 갔다. 밤사이에 전화가 올지도 몰랐다. 출장에서 돌아온 동생은 곧바로 다시 해외 출장이 잡혔지만, 일정을 미뤘다. 9월도 끝나가고 있었다.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추석 당일, 명절을 지내러 간병인 아주머니가 서울 집에 올라가셨다. 대신 대전에 와 보기 어려웠던 두 동생이 내려왔다. 남편과 두 동생, 세 남자가 처음으로 아버지 병상 주위에 모였다. 

  세 남자가 아버지 병상 맡에서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 ‘아빠, 듣기 좋지? 남자들이 같이 부르니까 내가 혼자 부를 때보다 멋있지?’ 아버지의 얼굴에는 이제 어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만이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표시였다. 까딱까딱하던 발가락의 움직임도 멈춘 지 오래였다. 나는 셋이 오랜만에 뭉친 김에 온천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유성이 가까웠다. 아버지가 듣고 있다면 아들들과 사위가 함께 온천에 간다는 말이 듣기 좋을 것이었다. 셋이 온천에서 돌아오니 오후가 되었다. 이제 아들들이 떠날 시간이 됐다. “다시 올게요, 아버지.” 큰동생이 아버지 얼굴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그때 놀랍게도 아버지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나면서 아버지의 두 손이 가슴으로 올라갔다. 의식을 잃은 아버지가 동생이 간다는 말에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네가 가서 서운하신 모양이네.” 동생은 아버지 손을 잡아드렸다. 아버지는 다시 부동의 자세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감은 눈에 살짝 물기가 어린 것도 같았다.

  두 동생이 떠나고 나와 남편이 남았다. 오후 네 시경이 되자 간호사의 움직임이 갑자기 부산해졌다. 아버지의 혈압과 맥박을 자주 체크하러 들어오더니 얼마 후 나를 불렀다. 

“마음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 환자분이 돌아가실 것 같아요.”

“어떻게 아세요?”

“최고 혈압이 60밖에 안되세요. 그럼 돌아가시는 사인이에요.”

“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드실 거예요.”

내 마음은 의외로 차분했다. 아침에 얘기해주었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진과 철이 가지 않았을 텐데. 동생들이 같이 아버지 임종을 지킬 수 있다면 좋았을걸. 아쉬웠다. 아버지의 팔과 다리가 며칠 전부터 많이 부어있었다. 그것이 전조였다. 혈압이 60까지 내려가면 곧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나와 남편은 바빠졌다. 담임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추석 당일이었는데 집에 계셨다. 혹시 와 주실 수 있느냐고 했더니 오시겠다고 했다. 순모임 식구들에게도 연락했다. 감사하게도 시간이 되는 분들이 많았다. 저녁 8시부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병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는 순간 나와 남편만 아버지 옆에 있지 않아서 좋았다. 한 달 동안 아버지 면회를 온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찾아와 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돌아가시는 순간만이라도 쓸쓸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추석 덕분에 이뤄졌다. 9시가 되자 병실 안이 사람들로 거의 꽉 찼다. 사람들은 병실 밖 로비에 나가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렸다. 나도 오랜만에 사람들로 활기가 도는 병실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곧 있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9시 반이 넘었을 때 목사님이 오셨다. 나는 병실 밖으로 목사님을 모시고 나가 그간의 일과 아버지의 상태를 나눴다. 갑자기 병실에 있던 남편이 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아.”

“응?”

나는 병실로 달려 들어갔다. 내 눈앞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아래서부터 점점 노랗게 변해갔다. 그 점 외에는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신 거야?”

“조금 전에 크게 세 번 숨을 내쉬셨어. ‘후’ 하시더니 아무 소리가 없었어.”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버지의 눈을 열어보고 목에 손을 대 보더니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깐 나간 사이에 임종을 놓쳤다. 남편이라도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것이 다행이었다. 노랗게 변해가던 아버지의 얼굴이 나를 향한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드디어 모든 고통이 끝났다. 내 속에서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빠, 잘 가요.”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다. 모인 사람들이 아버지를 둘러싸고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셨다. 아버지와 나를 위해 이보다 큰 배려는 있을 수 없었다. 처가댁인 강릉으로 운전하던 큰동생에게 전화했다. 동생은 바로 차를 서울로 향했다. 동생의 집에서 가까운 목동 이대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남편이 운구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갔다. 나는 남은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동생의 집으로 향했다. 추석 연휴가 끝나지 않아 장례식은 다음 날로 예정되었다. 


  짙은 회색의 행렬이었다. 사람인지 시체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형체들이 끝없이 늘어서 지그재그로 줄을 맞추어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다. 형체들은 모두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이 입은 회색빛 옷은 헐렁했다. 얼굴은 무표정하거나 고개를 숙여서 분간할 수 없었다. 그 무리 가운데서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도 회색 옷을 입고 아주 천천히 행렬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형체들은 아버지를 지나쳐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형체들을 쳐다보았다. 누구도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오르고 심장이 녹아내렸다. “아버지, 아버지...”

  꿈이었다. 새벽 네 시. 이틀 동안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발인하는 날 새벽이었다. 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내게는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힘이 없어 더 가지 못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의 신앙과는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그런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편안히 가시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을까. 나는 슬픔과 아픔에 가슴이 찔려 아버지 영정 사진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진정되지 않은 채 몇십 분을 울고 있으니 남편이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줬다. 나는 횡설수설하며 꿈 얘기를 했다. “여보, 아버지가 편안히 못 가나 봐. 엉, 엉, 엉.” 나는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잠시 후 큰동생이 나를 발견했다. 누나 왜 그러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악몽을 꾸었다고 답했다. 동생은 단호한 목소리로 “누나, 그만 해.”라고 말했다. 내가 동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진정시켰다. 

  그 후에도 한 번 더 비슷한 악몽을 꾸었다. 나는 두 가지로 꿈을 해석했다. 첫째는 아팠을 때의 아버지 모습을 내가 잊지 못해 꿈에 나타난 것이었다. 둘째는 아버지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의 불안이 꿈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내 마음 상태를 나타낸 것이었지 아버지에 대해 알려주는 꿈은 아니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내 꿈에 젊었을 때 모습으로 몇 번 다시 나타났을 뿐 아플 때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술을 마셨고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부끄럽고 무서웠다.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후 생활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이전과 달라 보였다. 나는 진짜 고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보호자였던 때가 없었는데도 아버지가 있는 나와 없는 나는 달랐다. 세상이 꿈에서 본 것처럼 온통 회색으로 보였다. 텅 빈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더 이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고 허전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찾아갈 수 있을 때가 좋았다. 아버지 목소리라도 녹음해둘 걸, 아버지 동영상이라도 찍어둘 걸, 때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유언을 들을 수 있는 자녀들이 부러웠다. 

  나는 아버지 인생을 회고해 보았다. 가족의 가해자로 살아온 삶이 아닌 아버지 자신의 인생을. 자녀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삶을 평가하게 된다. 아버지도 나름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 중독으로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했던 아버지가 가여웠다. 자녀들에게 준 상처와 아픔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었던 아버지. 나의 존재가 아버지의 삶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러고 싶어서 나도 더 힘들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부모로서 자녀에게 이런 아픔과 짐을 남겨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는 별도로 나는 냉정하게 아버지의 삶을 평가했다. 

  길을 가다가도, 집안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라 멍하니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가끔 눈물이 터지면 참지 않고 울었다. 아버지의 애도는 어머니처럼 평생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삼 개월 정도 지났을 때 대전 성모병원에서 카드가 한 장 배달되었다. 최근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을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초대받은 날짜에 혼자 병원을 찾아갔다. 모임 장소는 호스피스 병동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입구부터 꽃으로 정갈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홀 안으로 들어섰다. 홀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수녀님 한 분이 앞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저희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어떻게들 지내셨어요? 여기 오신 분들 가운데 어떤 분은 부모님을, 어떤 분은 배우자를, 어떤 분은 자녀를 최근에 떠나보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겪은 슬픔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아마 비슷한 마음들이실 겁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서로에게 위로를 주실 수 있을 거예요.”

수녀님은 이렇게 모임의 취지를 설명했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본인의 이야기, 고인의 이야기를 나와서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분이 나가시더니 아내를 떠나보낸 이야기를 했다. 그분의 뒤를 이어 젊은 여자가 나가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한 명씩 나가서 짧게 고인을 보낸 후 그들이 겪은 심정을 나눠줬다.

  나는 홀에 들어서면서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자리에 앉아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홀 안에서 그렇게 계속 우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가 싶어 나를 쳐다봤다. 나도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수녀님이 나에게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우시던데 나오셔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앞으로 나갔다. 나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다는 것,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의 상태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말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눈물이 진정되었다.

  사람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그 테이블 위에는 카드가 놓여 있었다. 수녀님이 얘기했다. “여러분 앞에 카드가 보이시죠? 이제 그 카드에 고인에게 보내는 짧은 인사말을 적어보세요. 작별 인사인 셈이죠. 카드를 다 쓰고 나면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서 풍선에 카드를 매달아 하늘로 올려보낼 거예요.” 나는 그것이 애도의 예식임을 이해했다. 너무나 멋지고 의미 있는 애도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적어 내려갔다.     

  아버지, 저 선화예요. 잘 계세요? 아버지가 떠나가시고 나서 벌써 석 달이 흘렀어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이 허전하고 쓸쓸해요. 아버지를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 이제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해요. 저 잘 살게요. 아버지도 이제 편안하게 쉬세요. 아버지, 사랑해요. 잘 가세요. 안녕.

  

그때 나는 아버지가 내 아버지여서 좋았다고, 고맙다고 쓰지 못했다. 내가 죽기 전에 그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수녀님을 따라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빨간색, 분홍색, 초록색, 흰색, 파란색, 보라색, 노란색 온갖 색깔의 풍선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분홍색 풍선을 골랐다. 그리고 카드를 넣은 봉투를 풍선에 매달았다. “자, 다 준비되셨으면 이제 풍선을 날려 볼까요? 풍선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바라보세요. 그리고 이제 고인을 보내드리는 거예요.” 나는 손에 붙들고 있던 풍선을 놓았다. 헬륨 가스를 먹은 풍선은 저절로 공기 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한꺼번에 수십 개의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갖가지 사연을 담은 카드를 매달고 풍선은 고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높이, 높이 올라갔다. 나는 내 풍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하늘을 바라보았다. 쉼 없이 분홍색 풍선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빠, 안녕. 안녕.” 다시 그쳤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몰려왔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 이상 풍선들이 보이지 않았다. 점만큼 작아진 풍선들이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밝아진 얼굴로 옥상을 떠났다.

  삼 개월 후 다시 한번 병원에서 카드가 왔다. 나는 한 번 더 병원에 갔다. 그때는 다과를 나누며 간단히 지낸 이야기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날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 번 더 카드가 왔지만 나는 더 이상 병원을 찾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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