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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5. 2024

성 안토니우스의 가르침

성 안토니우스의 삶과 서신

이 글은 러시아기독문화연구회 소속 연구자 다섯 명이 공동 번역한 글이며 출판사와 계약을 마치고 출간 준비 중인 글입니다. 읽고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소개 성 안토니우스의 삶과 서신   

  

  사막 은수 수도 생활의 기초를 세운 위대한 성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본보기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제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러한 방식의 수행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해서 제시된 것 즉,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최고의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전기는 성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쓰였고 (그의 저작 제3권 참조) 『독서용 성자전』 1월 17일 자에 거의 축약 없이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그 책을 참고하기를 바랍니다. 이 글에서는 단지 성자전의 일반적 특징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가 수행할 일을 위해 성 안토니우스를 택하신 것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드러납니다. 그는 차분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지만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떠들고 장난치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를 보호하는 부모님의 양육하에 집에서 지내며 살았습니다. 그는 교회에 갈 때만 집 밖으로 나올 정도로 사람들과 떨어져서 지내며 자라났습니다. 이런 생활 분위기와 습관 속에서 세례 때 받은 하느님의 은혜는 그가 스스로 특별히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방해 없이 역사하여 그의 영을 빚어나가셨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의 말처럼 성 안토니우스가 어린 나이부터 하느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달콤함을 경험하고 하느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님도 같은 영을 소유한 분들이었기에 그에게는 가정에서 그런 삶을 사는 데 어떤 장애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세상의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를 지켜주는 동안에 그는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가장이 된 안토니우스는 집안일을 돌보고 누이를 부양하는 일을 떠맡아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삶과 많은 것을 돌아보아야만 하는 이 세상의 삶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굳건한 열망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로 가득했을 때 그는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그리고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34) 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의 열망을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인장(印章)이었습니다. 자신의 영적 갈망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그리고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열망과 갈망을 실현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축복을 성경 말씀을 통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결심하였고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준 후에 하느님 한 분만을 위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거부한 삶을 살기 시작한 처음 몇 년 동안 성 안토니우스는 그 당시 널리 알려진 은수자들의 수도방식을 배우며 독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적 근심을 다 버리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1코린 7:32)에 대해서만 온전히 몰두하면서 은수 수행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본질적으로 필요한 교회의 제도로 여겨졌으며 그 제도에 대한 주요한 규정을 사도들이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금욕 수도자들은 초기에는 세상과 세상의 근심에서 떠나 자기 집에 머무르며 살다가, 기도와 하느님에 대한 묵상, 금식, 철야기도,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수행을 할 때는 어디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 은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경계가 확대되고 신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많은 은수자들이 가족을 떠나서 도시 혹은 마을에서 먼 벽촌으로 가 그곳에 있는 자연 동굴이나 방치된 무덤 속에서, 혹은 스스로 독수방(獨修房)을 만들어서 은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도 성심을 다해 그들의 삶을 따랐습니다. 

  수행의 삶은 수련 수행 과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은수자들에게 순종하며 그들의 삶을 따라 배우며 은수 생활을 통과해 갔습니다. 수련 수행 과정의 본질은 그리스도교의 덕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확실히 새기고 경험 많은 수도자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자로서 삶의 질서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덕을 배워나갔습니다. 이제 그는 하느님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도 방법이 필요한지 찾아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당시 유명한 은수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수도 방법을 배우고 익힌 후에 그렇게 얻어낸 것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은수처로 가지고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 아타나시우스가 언급한 것처럼 성 안토니우스는 지혜로운 벌처럼 이곳저곳에서 영적 꿀을 따서 영적 벌집인 자신의 마음속에 모아나갔습니다. 한 은수자에게서는 음식을 엄격하게 절제하고 맨땅 위에서 잠을 자고 쉼 없이 밤샘 기도를 하는 습관을 배웠으며, 다른 은수자에게서는 피로를 모르고 기도하기, 주의 깊게 사고하기와 하느님에 대해 묵상하기 등을 배워 익혔습니다. 또 다른 은수자에게서는 근면과 규칙에 충실할 것과 인내의 모범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은수자에게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모든 이들을 향한 형제애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영적 아버지 중 각 사람이 특별히 다른 이들보다 잘하는 수도 방법이 무엇인지를 살핀 후에 그 모두를 자신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영적 스승으로부터 지도받는 일 없이는 그 누구도 수행적 삶의 최고 단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위에 언급한 은수자들을 통해서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삶을 점검하였으며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온전함으로 굳건히 나아갔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마을 뒤에 있는 무덤 안에서 살면서 15년 동안 여러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독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지냈으나 점차로 마을과 더 먼 곳에 있는 무덤을 찾아가 살았습니다. 평소 그를 따르던 마을 사람이 무덤에 찾아와 빵(성 안토니우스의 유일한 음식)을 전해주었고 그 보답으로 성 안토니우스는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전해주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손수 노동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수공예품을 만드는 시간 이외에는 기도와 성경 속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하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우울의 영이 찾아와서 성 안토니우스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때마침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성 안토니우스의 모든 행동을 보고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성 안토니우스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소조멘은 그의 저서 『교회사』 제1권 13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습관으로 만들어진 선한 삶이 비록 처음에는 어렵지만 유쾌한 삶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는 더욱더 엄격한 수행방식을 고안해내었고 매일 매일 더 절제하는 삶을 살면서 항상 그것을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다시 열심을 내었습니다. 노동으로 육체의 쾌락을 잠재우고 정신적 욕망을 지혜로운 증오로 무장하여 막아냈습니다. 그의 양식은 빵과 소금이었고, 음료는 물이었습니다. 식사 시간은 해 질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틀에 하루 이상 자주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밤샘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태양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을 잠자리로 삼았고 잠시 눈을 붙일 때도 대체로 맨땅 위에서 누워 잤습니다. 육신의 편안함을 떨치기 위해 성유(聖油)를 바르거나 씻지도 않았고 어떤 편의품의 사용도 스스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게으름 피우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고 거의 온종일 두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성 안토니우스는 매우 힘든 길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그림자 없이 빛이 있을 수 없고 영적 싸움 없이 그러한 삶을 통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없고 사탄이 없다면 우리 속에는 선만이 나타나서 막힘없이 자라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죄와 유혹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싸움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더 멀리 자유롭게 가기 위해서는 죄와 유혹을 무력화시키고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길로 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의 팔과 다리는 죄와 유혹의 사슬에 묶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 안토니우스를 영적 싸움으로 이끄신 것은 영적 싸움으로 그를 시험하신 후에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의 정신력을 강화하고 또 그의 정신력이 활동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원수들이 성 안토니우스의 마음속에 찾아왔으나, 언제나 내면의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켜주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우스의 전기에서 이 싸움을 웅장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원수의 화살이 아주 매서웠지만 용맹한 전사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것을 격퇴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처음에 원수는 세상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도록 성 안토니우스를 흔들어대며 시험하였습니다. 그는 고귀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멸시당하는 일 없이 부족함을 모르고 살면서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수는 그의 마음속에 돈이나 모든 생활의 편리함을 버린 것에 대한 애석함이나 공허함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특히 자신의 지원과 보호와 위로를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진 누이에 대한 공연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시작한 재미없는 삶의 고단함과 혹독함, 그런 어려움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몸의 미숙함과 끈기 부족을 일깨우며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생활이 한없이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과 끝없이 자아를 죽이며 그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소외되었다는 생각을 그에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원수가 불어넣는 이러한 생각들은 강력한 폭풍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결심 속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던 성 안토니우스는 단호하게 사탄을 물리쳤고 위대한 신앙으로 사탄을 쫓아내었습니다. 그가 절제하고 포기했던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는 삶을 택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무한한 은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물질의 모든 족쇄에서 풀려난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더 편했습니다. 그의 내면에 가장 달콤한 영적 위안을 가져다주었던 끊임없는 기도로 사탄은 가장 하찮은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싸움에서 패배한 원수는 이 젊은 용사를 다른 방식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를 무너뜨리는 일에 익숙해 있었던 원수는 육체의 정욕을 이용하여 밤에는 젊은이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낮에는 불안하게 만들면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가 어찌나 지독하고 오래 걸렸던지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알아챌 정도였습니다. 원수는 더러운 생각을 집어넣었고 성 안토니우스는 기도로 그것을 물리쳤습니다. 원수가 그의 신체 기관들을 달아오르게 만들면 그는 금식과 밤샘 기도와 몸이 상할 정도의 과도한 노동으로 그 열기를 식혔습니다. 밤에 사탄은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온갖 교활한 방법으로 유혹적인 욕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관상하고, 우리의 본성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해주는 우리의 고상한 신분을 생생하게 의식하면서 고결한 환희에 젖어서 원수의 기만적인 유혹을 떨쳐버렸습니다. 저주받은 원수는 달콤한 쾌락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려 했지만 축복받은 성 안토니우스는 영원한 불 가운데서 지치지 않는 벌레들로부터 당할 무서운 고통을 미리 떠올렸고, 그래서 아무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 끈질기고 추악한 공격은 이 싸움을 하는 그의 마음속에 원수의 온갖 더러운 움직임에 대한 혐오감과 매우 큰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원수가 성 안토니우스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심지어 멀리서라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를 유혹하고 괴롭히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 정욕의 움직임에 대해서 혐오감이나 증오심을 갖는 것은 사탄을 불태워 버리는 불화살이기 때문입니다. 교활한 원수는 이 싸움에서도 정열적인 육체를 지닌 청년에게 패배당하고 수치스럽게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라고 모든 수도자가 함께 고백하는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를 위하여 육체를 지니셨고 그 육체 속에서 원수의 모든 능력을 멸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당신의 종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미워하는 원수의 모든 화살이 전부 소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용사를 향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보고 그 보호하심이 겸손한 사람에게만 축복으로 임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원수는 그 젊은 용사의 마음에 자만심을 불러일으켜서 그것을 빼앗아버리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원수는 시커먼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성 안토니우스에게 거짓된 낮은 자세로 “여러분이 나를 이겼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원수는 성 안토니우스가 이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 자만해짐으로써 그를 도와주고 계신 하느님을 분노하게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성 안토니우스는 “도대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원수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육체를 달아오르도록 자극해서 육체의 죄에 빠뜨리게 만드는 음란의 영이다. 나는 순결 서원을 한 많은 사람을 유혹했다. 육체를 오랫동안 억제한 많은 사람을 내가 넘어지게 했다. 그러나 너 때문에 나의 그물들이 다 찢기고, 화살들이 다 꺾여 버렸다. 그리고 나는 쫓겨났다.” 그때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주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나는 내려다보리라.” (시편 118:7) 그리고 두려움 없이 원수를 쳐다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나의 하느님께서 시커먼 너의 악한 생각 때문에 네가 나에게 시커먼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셨고 너의 무력함 때문에 네가 소년으로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온갖 멸시를 받기에 합당하다.” 이 말을 하자 사탄은 마치 불에 타버린 것처럼 도망갔고 다시는 성 안토니우스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정욕에 대한 승리는 무욕에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무욕이 강해지는 만큼 영혼의 평화가 옵니다. 기도와 하느님에 대한 묵상을 통해 주어지는 달콤한 영혼의 평화는 마음속에 영적인 따뜻함을 불러일으킵니다. 영적인 따뜻함은 혼과 영과 육신의 모든 힘을 모아서 그 사람을 내면으로 인도합니다. 내면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한 분이신 하느님과만 홀로 있고 싶은 물리칠 수 없는 욕구를 느낍니다. 하느님 앞으로 향하는 이 물리칠 수 없는 내면으로 이끌림은 두 번째 단계의 영적 진보입니다. 이제 성 안토니우스는 그 단계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성 안토니우스는 대부분 은수처에서 독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 안토니우스를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마을에서 이따금 찾아오곤 했고 그도 역시 영적 스승들을 찾아가거나 전례(典禮)를 드리기 위해서 마을 성당에 가곤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도 그 나름의 영적 위로를 주었지만, 내면에서 거북함을 느낀 성 안토니우스의 영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단호한 은수를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행의 길을 똑바로 걸으면 영혼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런 변화를 촉진한 것은 자기부정의 강한 충동이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를 향한 악령들의 공공연한 공격이 그런 충동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더러운 생각을 불어넣어서 성 안토니우스의 맑은 영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어지자 악령들은 외부로부터 보이게 나타나서 그에게 해를 끼치고 그의 선한 의도를 흔들 수 있는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높은 영적 수준에 도달하는 길이 성 안토니우스에게 열리고 수도 생활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을 예상하신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은 유혹하는 악령을 다스리는 힘을 그에게 공급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성 안토니우스에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성 안토니우스가 사나운 악령의 공격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마을교회 입구에서 깨어나 겨우 숨을 내쉬면서 친구에게 “나를 다시 은수처로 데려다주게!”라고 말했던 때였습니다. 이런 말을 함으로써 성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유일한 삶이라고 자신이 인정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죽음에 넘겼다는 것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이렇게 각오한 사람을 무엇으로 유혹하고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가짐이 수도 생활의 최초 출발점이며 그것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보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세주이자 우리 ‘수행의 기초를 놓으신 분’이신 주님은 지상에서 머무시는 동안 줄곧 자기 앞에 준비된 죽음을 바라보셨지만,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의 싸움을 하실 때 자신의 인성(人性)으로써 최종적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곳에서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그 후 영광스러운 부활 직전 사흘 동안 ‘육체의 안식’이 이어졌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영혼은 이 길을 지나갑니다. 

  이 길을 시작하는 첫 번째 발걸음은 자기부정입니다. 자기부정이 아무리 작은 첫걸음이라고 해도 그 속에는 죽음에 대한 각오가 일정 부분 존재합니다. 그 때문에 자기부정이 커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각오가 커지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에 대한 각오는 자기부정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구세주가 지니셨던 정도의 각오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즉시 영 안에서 십자가로 상승하는 일과 영적 안식이 이루어집니다. 그 후에 주 예수의 영광 가운데 영의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영 속에 이제 이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괴로움을 당했던 바로 그곳으로 다시 옮겨달라고 친구에게 건넨 말을 통해서 성 안토니우스는 구원자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직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태 26:46) 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마음이 자신의 영 안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한 후에 그는 머나먼 광야로 떠나 그곳에서 20년간의 침묵 은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 안에서 그의 십자가와 안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거지를 떠나 광야로 향하는 2~3일의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성 안토니우스는 악령들이 만든 고통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버려진 오래된 이방인의 사원에서 은수하며 지냈습니다. 그곳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고, 그의 친구가 반년 동안 그에게 빵을 얻어다 주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가 이곳에서 어떤 노동과 수행을 했는지,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가 은수 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 판단해 보건대, 이 기간은 그의 영혼이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로 변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 그에게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애벌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벌레는 아예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자연의 힘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번데기에서 아름다운 작은 나비가 나와서 날기 시작합니다. 성 안토니우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누구도 보지 못하게 그리고 성 안토니우스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서 그의 내면에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세우셨습니다. 영적 성장의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신자들을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성 안토니우스는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속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성 안토니우스도 이제 영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을 지니고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성 안토니우스의 영이 단련되는 과정이 끝났습니다. 그 후 이어진 그의 삶은 생애 초기 두 시기에 심었던 씨앗들의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시기는 신자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받아 은혜로운 교회를 위해 사목하는 시기였습니다. 그의 사목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영역이 넓었는지는 성 아타나시우스가 쓴 기록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성령께서 주신 모든 은사를 가지고 사목하였습니다. 그는 어떠한 은총의 선물을 받았을까요? 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 귀신과 자연의 힘 그리고 동물들을 제압하는 능력, 생각을 꿰뚫어 아는 능력,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을 보는 능력, 그리고 계시와 환상을 보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많은 열매를 맺고 널리 사용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은사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으로 성 안토니우스는 나약한 형제들을 섬겼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께서 성 안토니우스에게 마음속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는 강력한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을 큰 권위를 가지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군인과 유력 인사들과 큰 부자 중에서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많은 사람이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깊은 슬픔에 빠져 성 안토니우스를 찾아왔던 이들 모두가 위로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찾아왔던 이들도 즉시 눈물이 멈추었습니다. 또한, 분노한 상태에서 찾아왔던 사람들도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거처에서 함께 지내던 수도사들도 태만에 빠져있다가 그의 말씀을 듣고 다시 수도 생활에 매진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를 만나서 그의 말씀을 들은 젊은이들은 이 세상의 즐거움을 거부하고 순결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처녀 중에서 많은 이들이 그저 멀리서 안토니우스 성자를 보기만 해도 그리스도의 신부의 지위로 옮겨갔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성 안토니우스는 하느님께서 주신 지식의 원천이 무엇인지 감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합당한 가르침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성 안토니우스는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서 그들을 가르치고 꾸짖으며 권면의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전에서 ‘어떤 때에는 성 안토니우스에게서 말씀이 마치 큰 여울처럼 쏟아져 나오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20개의 짧은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간단한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의미와 능력으로 충만한 짧은 금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후에 이 짧은 금언들은 수없이 많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도 생활을 위한 일반 규칙이 되기도 하였고 마침내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을 전하는 선집에 수록되었습니다. 이따금 성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영적 자녀들이나 여러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편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특징이 총체적으로 묘사되기도 하였고 또 형제들의 개인적인 연약함에 대한 치료의 지침이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가 구술로 전한 것, 편지로 전해져 온 것, 그리고 그가 썼던 모든 것들은 교훈을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된 양식을 제공할 것입니다. 장문의 글 이외에도 전기 속에 수록된 많은 글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전기에 수록된 글은 수도사에게 보내는 20편의 편지, 선행과 악덕에 관한 20편의 짧은 말씀, 선행에 관한 170장의 글, 2개의 부록이 딸린 수도사를 위한 규칙, 그리고 성 안토니우스가 구술로 전한 많은 금언과 말씀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여러 편의 ‘간략한 형식의 교부 성자전’에 흩어져 있던 것으로 항상 덕을 세우며 교훈을 주는 글들입니다. 

  러시아어 번역으로 된 성 안토니우스의 서신과 글은 『그리스도교의 독서』에 초기 몇 년간 실렸고, 그 장들은 『도브로토류비예』에 포함되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금언과 말씀은 『고대 교부 성자전』의 첫 부분을 구성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밍(Migne) 신부가 편집한 『헬라어 교부학(Patrologiae graecae)』 제40권에서 원전 그대로 찾아보고 읽을 수 있습니다. 본 선집 속에 수록된 성 안토니우스의 모든 글은 그 책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다음의 글을 주목해서 읽기를 제안합니다.

1) 편지와 글에서 가져온 발췌문

2) 선한 도덕에 관한 170개의 장

3) 은수자의 삶의 규칙

4) 성 안토니우스의 금언과 그에 관한 말씀

5) 성 안토니우스의 몇 가지 금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과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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