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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땡선녀 May 23. 2024

정님 씨표 김밥 도시락

갓 회사에 입사해 수습 기간 3개월 때였다.

당시 사무실 사람들은 집에서 점심 도시락을 가져와 함께 먹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막내 수습이었던 나도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인천에서 대학로까지 왕복 4시간여를 출퇴근하는 큰 딸을 염려한 나의 엄마 정님 씨가 흔쾌히 도시락을 싸 주시기로 했다.  

그것도 매일 김밥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 밥이 최고라 생각하던 때였으므로 감지덕지.

그런데 엄마표 김밥 한 달 즈음인가.

처음엔 엄마한테 감사하며 먹으라던 선배들과 과장님마저

"어머니가 김밥 싸시는 거 힘들어하시지 않아?"

처음 한두 개 맛보던 이들이 두 번은 젓가락을 대지 않더라.

"OO 씨는 매일 먹는 김밥 물리지 않아?"

은근히 웃으면서 묻기도 했다.

"괜찮아요.ㅎㅎ"

대답은 그리했지만 사실 나도 김밥에 질리던 차였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감사히 먹던 김밥.

어느 순간부터 오이 냄새가 비릿했고, 단무지는 너무 짜게 느껴졌다.

계란 맛마저 비릿하게 차가워서 별로였다.

사실 엄마 김밥은 정말 맛이 없었다.


전날 밤 썰어둔 단무지와 프라이팬에 지진 오이를 쟁여두었다가

새벽에 계란만 부쳐 싸준 김밥이었다.

때로는 계란마저 전날 미리 부쳐뒀다가 아침에 흰쌀밥에 휘뚜루 말아준 꼬마 김밥.


당연히 점심에 먹는 김밥은 오이와 노란 물이 든 찬 밥알이 입 안에서 굴러다녔고,

짙은 색 오이는 낡은 기름 맛과 물컹한 식감,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오래 묵은 단무지는 짜기만 했고 오이, 계란과 섞여 비릿하고 물컹했다.

각기 다른 개성의 맛을 지닌 재료들이 오래 뒤섞이며 서로의 맛을 비빈다고나 할까.  

먹으면 먹을수록 오래된 오이가 씹히는 식감이 이물거렸다.

오래된 단무지의 물컹거림이 오이맛과 섞여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오이 냄새가 본연의 짠맛, 단맛을 이기고 있었다.


결국 3개월을 다 버티지 못하고 정님 씨에게 고백했다.

김밥이 질려서 도시락을 싸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과감히 사 먹는 방법을 선택했다.

대학로 주변은 온통 맛집 투성이었다.

해방이었다.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김밥을 먹지 않았다.

내 아이들 도시락으로 김밥을 만들 때에도 나는 안 먹었다.

오이는 절대 넣지 않았고 속이 터질지라도 가능한 한 많은 재료를 넣었다.

정님 씨 표 김밥 맛을 잊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코로나 시기, 방학기간 학교에서 자습하던 고등학생 딸아이의 도시락을 싸며 다시 한번 엄마의 김밥을 떠올리게 되었다.

바쁜 와중에 이른 새벽 도시락을 준비하던 나의 엄마 정님 씨.

나름 정님 씨로서는 최선의 가성비 김밥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좀 더 맛있고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싸주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때 먹은 김밥 맛은 두고두고 기억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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