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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희망과 구원에의 송가

by Joanne

딸 J의 시선



영화 “쇼생크 탈출”은 “미져리(Misery)”, “샤이닝(The Shining)”, “캐리(Carrie)”, “그것(It)”, “공포의 묘지(Pet Sematary)” 등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되었을 만큼 호러의 대가로 유명한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단편 소설,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을 각색한 영화이다. 겁이 워낙 많다 보니 호러 영화라면 꿈도 못 꾸는 나로서는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중 “그린 마일(The Green Mile)”과 함께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그린 마일"에서 사형 제도에 대한 회의감을 판타지적 요소를 통해 드러낸 것과 비슷하게 "쇼생크 탈출" 역시 교도소 체제에 대한 씁쓸함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 분)"으로, 은행 부지점장으로 일하던 소위 '엘리트'였으나 불륜에 빠진 아내와 그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 인물이다. 하지만 관객은 앤디의 마음속 생각이나 내밀한 사정에 접근하지 못하고, 영화의 나래이터이자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레드”라는 다른 수감자(모건 프리먼 분)의 시선을 통해 그를 관찰하게 된다. 앤디의 교도소 ‘적응기’는 매우 험난한데, 1940년대에서 60년대 사이를 다루는 역사적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듯 교도관들은 재소자들을 폭력과 협박으로 억누르고, 앤디는 특히 악질적인 죄수 무리(반어적으로 “The Sisters”라 불리는)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등 레드가 보기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무력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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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앤디에게 교도소 지붕에 타르를 바르는 일을 할 수 있는 – 그러니까 교도소 담장 안이 아니라, ‘야외’에서 햇볕을 쬐며 일을 할 수 있는 - 기회가 생기고, 그것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재소자들에게 유난히 폭력적인 것으로 유명한 간수장이 유산상속에 붙는 세금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듣게 된 앤디가 그의 세금 면제를 도와준 뒤, 예전 직업의 특성을 '살려' 교도관들의 비공식 회계사가 될 뿐 아니라 교도소장 "노튼"이 횡령한 돈을 세탁해 주는 ‘중요한’ 임무까지 맡게 된다. 교도관들의 비호를 받게 된 그는 교도소의 도서관 확장을 건의해 성사시키고 젊은 재소자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도우면서, 또 레드를 통해 구한 작은 돌망치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생활을 해 나간다. 그렇게 19년째 징역살이를 하던 앤디는 그의 지도 아래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젊은 재소자 "토미"로부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단서를 얻지만, 노튼 소장은 본인의 비리에 깊게 관련된 앤디를 돕는 대신 토미를 살해하는 쪽을 택한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고 조용히 절망한 듯했던 앤디는, 어느 비바람 치는 날 마법처럼 교도소를 탈출해 버린다.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나 마찬가지라고 해야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스티브 맥퀸 주연의 “대탈주(The Great Escape)” 같은 탈출기, 다시 말해 '탈옥'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총 142분 정도의 러닝타임 중 앤디의 ‘탈출’은 대략 5-6분에 걸쳐 아주 간략하게 묘사되며, 그전까지 영화는 앤디가 19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장난감처럼 보이는 작은 돌망치로 교도소 벽을 뚫어 터널을 파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는다. 앤디의 주변인들과 교도관들처럼 관객들도 뒷통수를 맞는 셈이다.





여기에서 영화의 원제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영화 제목을 “쇼생크 탈출”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제인 “The Shawshank Redemption”에 포함된 “redemption”이란 "구원" 혹은 "속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사실 영화의 제목은 “쇼생크의 구원”이나 “쇼생크에서의 속죄” 정도로 직역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영화는 교도소를 탈출한, 다시 말해 쇼생크 ‘밖’에서의 앤디의 인생보다는 쇼생크 ‘안’에서의 삶에 더 집중하는 느낌이다. 앤디는 19년 동안 오싹할 정도의 집념으로 ‘탈출’을 위한 터널을 파기도 했지만(진짜 보통은 아닌 사람이다), 동시에 어떤 영적 여정을 거치는 듯도 하다. 이 여정의 시작은 그가 야외에서 일하던 중, 간수장에게 세금 문제로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맥주’를 받아내는 순간일 것이다. 레드는 앤디가 잠시나마 "감옥에 갇힌 죄수"가 아니라, 친구들과 자기 집 지붕을 고치다 맥주 한 잔 마시며 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돌아간 기분을 원했기에 그런 행동을 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 이후 앤디의 행보를 나는 이 순간의 연장선으로, 그러니까 창살과 억압으로 신체의 자유를 빼앗긴 상황에서조차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존엄성과 ‘인간됨’을, 어쩌면 그의 영혼의 ‘자유’를 지키려는 분투로 이해했다. 앤디는 6년간 꾸준히 주의회에 편지를 보내 결국 교도소에 큰 도서관을 세울 수 있는 자금과 지원을 받아 내고, 감옥에 오기 전 가졌던 직업과 비슷한 일을 하며(물론 검은돈을 세탁해 주는 범죄이긴 하지만), 젊은 재소자들이 배움을 통해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돕는다. 비록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인생이 ‘꼬이긴’ 했으나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와 성취를 찾은 셈이다. 이렇게만 보면 그는 모범수 그 자체이다.





다만 엄청나게 건전한 방향으로 발현된 듯한 그의 노력에는 반항과 저항이 내재되어 있다. 교도소의 높은 담벼락이 – 그리고 인간을 통제하고 제압하려는 모든 ‘제도’가 – 표면상으로는 신체만 구속하는 것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 내면마저, 영혼의 생기마저도 억누르고 짓밟기 때문이다. 교도소장의 사무실에서 LP판을 정리하던 앤디가 충동적으로 문을 잠근 채 쇼생크의 음향 시스템을 통해 오페라 아리아를 방송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튼 소장과 교도관들이 당장 음악을 끄라고 난리 치며 그를 위협하는 동안 재소자들은 말을 잃은 채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하고, 한순간이나마 자신들의 영혼이 감옥 창살을 벗어나 '자유로이' 떠다님을 느끼게 된다. 이 소동으로 앤디는 한달간 독방에 갇히지만 그는 그런 고초를 겪고서도 확신에 가득한 얼굴로 그들 모두의 '안'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설파한다. ‘희망’, 바로 희망말이다.


이 희망이 ‘탈출’, 즉 ‘탈옥’에 대한 희망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언젠가 더 나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아닌 것 같다. 물론 앤디가 언젠가는 멕시코의 바닷가 마을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레드와 공유하기는 한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이 희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엄성이, 인간됨이, 그리고 ‘영혼’이 온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아닐까 싶다. 실질적 죽음을 선고 받아 몸의 자유는 빼앗겼을지라도, 그것만은...





그래서 나는 앤디가 쇼생크를 탈출하기 전에 이미 "속죄"를 거쳤으며 "구원"을 얻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기에, 그 어떤 학대도 이 독특한 인물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꺼트리지 못했기에 말이다. 그가 결국 탈옥을 결심한 시점이 토미가 살해당하고 노튼 소장이 도서관을 이용해 앤디를 협박한 후라는 것도, 다시 말해 그의 존엄성과 희망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볼모로 잡힌 뒤에야 이루어졌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앤디의 탈옥은 ‘물리적' 탈출이라는 의미보다는, 그의 영혼을 통제하고 뒤흔들려는 교도소장의 독재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자 승리로서의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19년 간의 이 영적 여정에 "돌"이 떼어놓을 수 없는 모티브로 함께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로 느껴진다. 감옥에 오기 전에도 돌을 깎거나 모으는 게 취미였다는 앤디는 오랜 기간 동안 (말랑말랑한) 돌을 파내어 탈주로를 마련하고, (딱딱한) 돌을 이용해 파이프에 구멍을 낸 뒤 하수구로 기어 들어가 탈옥에 성공한다. 돌은 교도소 마당에 굴러다니는 아주 흔한 것으로 "평범함"과 "일상성"을 나타내기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인내"를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닳거나 변하지 않는 ‘일정한', 또한 ‘불변의’ 물체로서, 흔들리지 않는 앤디의 집념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돌"에 의지해 의미 있기도, 지긋지긋하기도, 아름답기도, 절망적이기도 한 긴 시간을 버텨낸 앤디의 19년에서 나는 "구원"의 여정을 보았다. 세상의 불합리성, 불가해성과 억압 아래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 내기 위한 투쟁 말이다. 엔디의 구원이 쇼생크를 탈출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듯,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붙잡고 놓지 않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결국 끝까지 온전할 것이라는, 즉 이 세상 무엇도 그것을 건드리거나 훼손할 수 없다는 확신이 견고히 자리 잡는다면, 우리의 자유와 구원은 창살로 둘러싸인 쇼생크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P.S. 앤디가 방송한 아리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에 나오는 "‘편지의 이중창: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Duettino – Sull’aria” from “The Marriage of Figaro”)"이다. 들을 때마다 영혼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 된다.






엄마 C의 시선


1994년 개봉되었던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은 이 영화를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은 물론 영화라는 매체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조차 제목만은 익숙할, 그리고 개봉 이후 감옥 내의 비리 고발이나 극적인 탈옥 장면 묘사 등을 유사하게 모방한 '아류'가 대거 생산되었을 정도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한국 영화의 예만 들더라도, 주인공이 두 명의 재소자이고 그 중 하나가 숟가락으로 감방 아래의 땅을 파 탈옥하는데 그것이 '마침' 비오는 날이라 두 팔을 벌려 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그 장면이 포함될 수 '있었던' 코미디 영화 "광복절 특사"와 - 이것까지는 그래도 패러디(parady) 혹은 오마주(homage)라고 귀엽게 봐 줄 수 있지만 - 김구 선생의 젊은 시절을 다루겠다며 야심차게 기획했음에도 결과는 참으로 실망스럽던, 더욱이 전체 내용의 상당 부분을 포함해 주인공의 '헌신'으로 동료 죄수들이 반대급부를 누리는 감동적 상황까지 어이없는 모습으로 모방한 "대장 김창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개봉 당시엔 큰 관심을 얻지 못했지만 이후 비디오 테잎과 DVD, 케이블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된 "쇼생크 탈출"은, 한 광고의 문구처럼 2015년 기준 미국 네티즌이 선택한 최고의 영화인 동시에 AFI(미국 필름 연구소) 선정 역대 최고 헐리우드 영화 100편 가운데에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의 흐름은 내용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이 끝난 시점 "투톱 주인공" 중의 한 명이라 할 "레딩(Redding)"이 - 동료 죄수들 사이에서 "레드"라고 불리는 - 지난 일을 회고하며 독백하는 내레이션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중죄수들만 수감되는 교도소이자 살인범인 레드가 장기 복역 중이던 "쇼생크"에 아내와 그 정부(情夫)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고위 금융인 "앤디(Andy)"가 입소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특별히 다른 '볼거리'가 없을, 그래서 "신입"들이 새로 들어올 때마다 기존 재소자들이 구경을 하러 몰려 드는 현장에 이 영화의 "투톱 악역"인 교도소장 “노튼(Norton)"과 간수장 “해들리(Hadley)"가 나와 이들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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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 후 한 달 동안이나 입도 떼지 않고 잠잠히 지내던 앤디가 처음으로 말을 건 상대가 바로 레드였는데, 그 특별한 '재능'으로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레드에게 "암석 망치(rock hammer)"를 구해 달라고 - '취미'인 돌 조각을 하기 위해 - 부탁한 인연을 통해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 죄수들로부터의 성폭행 등으로 앤디는 심한 고초를 겪게 됩니다. 하지만 동생이 자신에게 남긴 유산에 매겨질 세금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는 간수장 해들리의 대화를 엿들은 앤디가 자신의 과거 '경력'을 이용해 완벽한 면세를 가능하게 해 주겠다고 제안한 이후, 또한 그 소문을 들은 교도소장 노튼이 그에게 '검은돈'의 "세탁"을 맡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수감생활은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하지요. 재소자 중 최고령인 브룩스(Brooks) 혼자 담당하던 교도서 도서실의 사서라는 편한 보직에 배치되어 밤마다 노튼의 뒷돈을 '처리'한 후 관련 서류를 교도소장 방 벽의 비밀 금고에 - “심판의 날이 오리니 곧 오리라”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로 가려 놓은 - 넣어 두는 일을 하던 앤디는, 절도죄로 수감된 청년 "토미(Tommy)"로부터 어느 날 충격적인 말을 전해 듣게 됩니다. 여러 감옥을 전전하던 토미가 예전에 있던 교도소에서, 앤디의 아내와 정부를 죽인 '실제' 살인범이 자기 죄에 대해 자랑하듯 떠벌리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앤디가 노튼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앤디의 출옥을 결코 원할 리 없는 노튼은 오히려 그를 독방에 가두고 해들리와 공모하여 탈옥을 시도했다는 구실로 토미를 사살해 버립니다. 그들 둘에 대한 분노에 더해 자신의 무죄 입증을 통한 출옥 가능성의 전무함을 확인한 앤디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밤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했던 탈옥을 감행하고 성공함으로써 "쇼생크 탈출"하면 떠오르는 그 유명한 장면을 연출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도구로 땅을 파는 일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작은 망치로 19년간 밤마다 자신의 방 벽을 파냈던 앤디는, 구멍 뚫린 벽을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이던 "리타 헤이워드"의 사진으로 가려 둡니다(이 영화의 원작인 중편 소설의 제목이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인 이유가 그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1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계속 바뀌면서 벽 위 사진의 주인공도 마릴린 몬로, 라켈 웰치 등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노튼의 돈세탁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 "스티븐스"의 자격으로 12곳의 은행을 다니며 숨겨 둔 그의 돈을 모두 출금한 앤디는 탈옥 때 가지고 나온 노튼의 비밀 장부를 신문사에 보내 고발함으로써 해들리의 구속, 노튼의 자살이라는 결말까지 이끌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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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 직전의 앤디로부터 언젠가 가서 살고 싶다는 곳(멕시코의 "지후아타네호")에 대해 들었고, 혹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되면 자신이 아내에게 청혼했던 한 장소(Buxton 근처의 목초밭)에 꼭 들러 달라는 부탁을 받었던 레드는, 마침내 가석방이 결정되어 출소한 후 앤디가 알려 준 곳으로 찾아가 돈과 편지를 발견하고, 앤디를 만나기 위해 "주거 제한 지역"까지 이탈하며 태평양 연안에 있다는 그 작은 마을로 향합니다. 사실 레드의 출소는, 영화 내용 중 10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가석방 심사에서 심사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선한 모습을 위장하며 가식적 태도를 취하던 앞의 두번(20년차와 30년차)은 불승인(Rejected)의 '고배'를 마셨던 레드가, 40년차의 심사에선 자신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이면서 "현재의 내가 진심으로 충고를 전하고 싶은 젊은 시절의 나는 어차피 사라지고 없으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진심을 토로하자 도리어 승인(Approved) 결정이 남으로써 이루어진, 이제는 오히려 감옥 안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출소를 원하지 않게 된 그에게 내려진 '형벌'과 같은 조치였습니다.


감옥에서 거의 평생을 보냈다는, 감옥 밖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브룩스가 가석방 허가가 나자 다시 죄를 지어 교도소에 남으려고 동료 죄수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일까지 감행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출소한 후, 가석방자 수용소에 살며 일터인 식료품점에서 매일 '구박' 받는 생활이나 '자동차(수감 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라는)'로 온통 뒤덮인 복잡한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과, 뒤이어 출소하여 브룩스가 쓰던 방을 쓰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 레드 역시 교도소로 다시 돌아갈 방법만 궁리하면서 - 자신이 잘 아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독백과 함께 –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 "안심 지대(comfort zone)"라는 것이 어떠한 모습으로까지 변질될 수 있는지, “시간“의 힘에 의해 '비정상'이나 '불건강' 등에도 얼마나 쉽게 길들여질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레드를 끈질긴 자살 충동에 함몰되지 않도록 도와 준 유일한 요소는 앤디와의 약속이었습니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음악'과 '희망'을 논하던 앤디에게 “희망은 위험한 것이자 감옥 안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했던, 더욱이 예전에는 그토록 바라던 가석방 처분을 오히려 두려워하며 자신을 “이 안에서는 뭐든 구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밖에 나가면 쓸모 없고 불필요한 사람"이라 비하하던 그에게도 앤디가 남긴,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마음속의 그 어떤 것"에 대한 찬미는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레드를 위해 목초지에 숨겨 놓은 편지에서 앤디는 "희망은 좋은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Hope is a good thing, maybe the best of things, and no good thing ever dies)"라며 - 이제는 유명한 문구처럼 사용되는 말인 -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희망의 당위성을 증명해 보입니다.


실제 소설에는 레드의 선택이 명확히 적혀 있지 않다지만, 레드가 앤디를 - 바닷가에 작은 호텔을 열고 낡은 배를 수리해 손님들을 태우고 낚시하는 것이 꿈이라던 - 찾아가 둘이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롱 쇼트로) 보여 주는 영화의 결말이 저는 더 좋습니다. 앤디를 만나러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너무 기쁘고 흥분되어 가만히 앉아 있기도 어렵다던, 긴 여행을 떠나는 "자유로운 사람"으로서의 삶을 처음 경험한 레드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런 친구를 얻게 되었으니 감옥에서 보냈던 40년이 결코 청춘을, 인생을 낭비한 시간만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었으리라 혼자 흐믓한 마음으로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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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날이 오리니 곧 오리라(His Judgement cometh and that Right Soon)”라는 글귀가 새겨진 - 아내가 이웃들과의 모임에서 만들었다는 - 십자수 액자 뒤에 자신의 검은돈을 숨겨 두었던 노튼이 앤디의 탈옥 후 그 액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여러 주제 가운데 “인과응보“와 “사필귀정“도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한 이 영화의, 정의(justice)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메시지도 적지 않은 위안을 선사합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이해하기에 이제는 친구를 넘어 가족이 '되어 버린' 앤디와 레드가, 멕시코인들이 태평양을 일컫는 명칭이라는 “아무 기억도 없는 곳(It has no memory)”에서 그 날씨만큼이나 따뜻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새장 안에 갇혀선 살 수 없는 새들이 있다. 그러기엔 그 깃털이 너무나 찬란하다“라고 레드가 평가한 앤디의 영혼도 그곳에서 변함없이 자유로울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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