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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Oct 04. 2024

부당거래: 당장의 ‘부당’함에 절망하지 말자

딸 J의 시선



전에도 여러 번 언급한 듯하지만 나는 류승완 감독 영화들 대부분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2010년 작 [부당거래]는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손에 꼽힐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류승완"을 언급하면 대체로 떠올리게 되는 ‘액션 영화’의 장르에 속해 있지 않음에도 감독의 냉철한 이성과 시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 안에서 그의 진가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 의견이다. 더불어 이제는 약간 남용되는 듯한 ‘한국형 느와르(noir)’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끔찍한 일을 당한 뒤 시신까지 훼손된 채 발견되는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을 비추며 시작된다. 또 한 명의 아이가 새로운 피해자로 발견되며 민심이 들끓고, 결국 대통령까지 나서 입장을 밝힐 만큼 이 잔혹한 사건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다. 언론과 사회의 비난에 상부의 압박까지 받게 된 경찰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유민철"이 개인적 원한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형사에 의해 체포 직전 사살되는 엄청난 ‘사고’가 발생한다. 골머리를 앓던 경찰은 결국 ‘가짜 범인’을 만들어 수사를 종결하겠다는 계책을 수립하고, 그 일의 실행자로 광역수사대 에이스인 "최철기" 반장(황정민)을 선정한다. 최철기의 가족과 팀원들의 비리에 대한 내사를 착수시켜 그를 교묘히 궁지로 몰아넣은 경찰 간부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승진과 성공이라는 ‘당근’을 제시하며 그를 끌어들이려 한다. 경찰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매번 승진에서 탈락하던 최철기는, 일이 틀어질 경우 쉽게 버려질 패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거부하기 어려운 이번 ‘기회’를 잡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다.


자신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무시 당하던 부하 형사들과 특별 수사팀을 꾸린 최철기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가짜, 그들의 용어로는 ‘배우’를 찾기 시작하고, 결국 여러 용의자들 중에서 강도, 절도 및 아동 성범죄 전과가 있는 "이동석"을 희생양으로 선택한다. 이후 그는 그동안 부딪히며 나름의 ‘친분’을 쌓아 온 조폭 출신 사업가이자 "해동건설" 대표인 "장석구"(유해진)를 이 계획에 동참시키는데, 최철기가 진두지휘한 비리 수사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던 장석구는 그와의 ‘거래’를 받아들여 경찰이 직접 할 수 없는 부분을 도맡기로 협의한다. 조폭으로 활동하던 과거의 특기를 십분 활용해 이동석을 납치한 장석구가 고문과 협박, 회유의 방식을 고루 사용하며 자백을 강요한 후, 결국 그로부터 자신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거짓 자백을 얻어 낸 최철기와 광수대 팀은 위풍당당하게 이동석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한동안 떠들썩하던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지만, 같은 시각 검사 "주양"(류승범)이 최철기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름을 바꾼다. 건설업계의 큰손인 "태경그룹" 회장 "김양수"에게서 소위 ‘스폰’을 받고 있던 주양 검사가 김 회장의 비리 혐의를 물고 늘어지며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는 최철기를 견제하기 위해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최철기의 계획에 공범으로 참여함으로써 그의 ‘약점’ 또한 손에 쥐게 된 장석구는, 범인 조작 사건의 증거를 빌미로 최철기를 이용하려 들면서 자신의 경쟁 상대인 김 회장을 청부 살해할 정도의 대담함을 보인다. 당시 김 회장의 살해 현장에 함께 있던 주 검사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며 물주였던 김 회장과 자신의 관계를 감추려고 애쓰고, 그 과정에서 최철기와 부딪히며 서로에게 날을 세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이동석이 거짓 자백을 하는 대가로 장석구에게서 약속 받았던 조건들(금전적 보상, 변호사 선임과 ‘심신미약’에 의거한 무죄 판결 등등)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달으면서 장석구를 불러오라고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힘 있는 장인의 인맥으로 "이동석 사건"을 배정 받은 후 이런 그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 주양은, 장석구와 최철기에 대해 더욱 면밀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두 사람이 이동석을 가짜 범인으로 만들어 죄를 뒤집어 씌웠음을 짐작한다. 자신의 사적 비리를 덮으려는 주양과 범인 조작 정황을 숨기려는 최철기는 상대의 약점을 쥔 채 서로를 압박하고, 점점 악화되는 상황 속에 최철기를 자신의 입맛대로 휘두르려는 장석구까지 가세하면서 이들 사이의 힘겨루기는 더욱 아슬아슬하게 진행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가 류승완 감독의 연출작 중 특히 뛰어난, 어쩌면 지금까지의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감독의 연출력과 통찰력이 이 [부당거래]에서 가장 예리하게 정점을 찍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섬세한 조각칼로 깎아 낸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던 만큼, 이 작품의 대표적 특징과 장점을 ‘군더더기 하나 없다’라는 한마디로 축약해도 좋을 것 같다. 감정과 열기를 절제한 채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 부패를 향해 냉철한 ‘객관자’의 시선을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성공적으로, 또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당과 불의를 그려냈다고도 생각된다.


이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물론 많지만, 이 글에서는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가장 눈에 띄었던 부분인 "평행적 구조(parallel structure)"라는 연출 방식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런 방식으로 특정 인물이 보여 주었던 행동이나 특징, 상황 등이 이후 다른 인물에 의해 반복되거나 재현되면서 그 장면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기에, 영화 속의 그런 장면들이 서로 ‘짝’을 이룬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예를 들어 최철기가 여동생의 허름한 미용실에서 동생의 구박을 받으며 밥을 얻어 먹는 장면이 지나가고 난 얼마 후엔, 청담동 어딘가에 있음직한 화려한 헤어샵에서 스타일리스트의 고급 케어를 받으며 머리를 정돈하고 있는 주양 검사의 모습이 비춰지는데, ‘빽’도 줄도 없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처절하게 살아가야 하는 최철기의 형편과, 엄청난 장인을 뒷배로 둔 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하는 주양의 상황이 시각적으로 대비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나 설정 등을 ‘반복’하는 구도는 영화의 주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작품 초반부의 장석구는 거짓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이동석을 무릎 꿇린 채 폭행하고 협박하며 그의 위에 군림하지만, 이후 장면에서는 최철기에게 사정없이 얻어 맞으며 그의 앞에서 무릎 꿇는 수모를 겪는다. 마찬가지로 주양 검사는 자신에게 굽신대는 김 회장 앞에서 오만하게 떵떵대며 고가의 시계를 뇌물로 받았으나, 영화 후반부에는 청탁을 넣기 위해 친분 있는 기자를 ‘접대’하며 그 시계를 그대로 가져다 바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런 식의 반복과 재현 장면들을 통해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가 되는, 즉 상황에 따라 힘의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고 변하는 권력의 변덕과 일시성, 더불어 악습의 되풀이와 고착화가 역동적으로 표현된다. 마치 쳇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부패와 타락, 폭력의 ‘굴레’를 작품의 이러한 반복적, 혹은 평행적 구조에 의해 형상화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 연출 구도에 내재된 대칭적(symmetrical), 상호 보완적(complementary) 면모는 사건과 상황들 사이의 연관성이나 관계성을 설립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영화의 초반, 사건의 유력 용의자이던 유민철을 우발적으로 사살하게 된 두 형사는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해 사체를 숨기고 사건 현장의 혈흔을 물로 청소하며 증거를 훼손하는데, 이 일은 이후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의 촉매제로 작용한다. 상부의 제안을 받아들인 최철기가 했던 첫 번째 행동이 바로 유민철의 시신을 직접 처리하며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은폐한 것으로, 최철기는 이를 통해 "범인 조작 사건"이라는 엄청난 음모와 기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 범인 조작이라는 그간의 행위가 탄로될 위기에 처한 최철기는 자기를 협박하는 장석구와 그의 2인자를 처리하려다가 자신의 충실한 오른팔 "마대호"(마동석) 형사를 실수로 살해하고 만다. 본인이 한 짓의 실체를 깨달은 최철기는 절망과 슬픔으로 포효하지만, 곧 그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을 물로 청소하고 증거물의 위치를 바꾸며 마 형사의 시신을 훼손하는 식으로 유민철을 죽인 두 형사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현’ 혹은 답습한다. 또한 영화의 앞부분에 이동석을 고문하며 회유하던 장석구가 그 장면을 녹화하게 하는 - 최철기를 압박할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 - 대목이 있는데, 이때 장석구의 지시로 휴대폰 카메라에 상황 전체를 녹화했던 그의 운전기사는 이후 똑같은 지시를 받고 역시 모든 상황을 촬영하다가 최철기가 마대호 형사를 죽이는 장면이 그대로 휴대폰에 녹화됨으로써 초반부와 동일한 상황을 재현해 낸다. 그 영상들은 마 형사의 갑작스런 죽음에 의문을 품고 사건을 조사하던 팀원들의 손에 들어가고, 분노한 형사들이 장석구의 운전기사를 조종해 최철기를 살해하는 결말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 같은 연출 구도를 어떤 인과 관계, 혹은 ‘인과응보’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한데, 유민철의 죽음을 숨겼던 최철기에게 자신이 은폐했던 사건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 다시 말해 그가 숨기고 수습하려 들었던 ‘죄’가 그대로 본인의 것이 되고 결국 그 자신의 파멸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죄’가 ‘징벌’ 혹은 ‘심판’으로 연결괴는 흐름이라고 해석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 장면들에 대해 조금 다른 해석을 하게 된 부분은, 이 평행적이고 반복적인 연출 구도가 악과 악행의 ‘예측 가능성’(predictability), 그러니까 ‘뻔함’과 평이함을 나타내는 요소로도 느껴진다는 점이다. 악행이나 부정, 부패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모습들을 보이는 듯하지만 결국은 이기심과 비겁함, 욕심이라는 기반을 공유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미 사용되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반복되다가 결국 파국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 형사를 죽인 최철기가 예전에 두 형사들이 한 그대로 사건 현장을 수습하는 모습, 장석구가 똑같은 방식으로 협박용 증거를 얻으려 들던 모습 등을 보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악과 불의에 발을 들인 이 인물들이 헛되고 뻔한 방식으로 한심하게 허우적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한심한 헛짓거리는 이동석이 사실 아동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이었음이 밝혀지며 아이러니의 정점을 찍는다. 주양 검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철기는 진범을 잡아 놓고서도 ‘생쑈’를 한 셈인데, 그가 광수대의 베테랑이자 ‘에이스’임에도 처음부터 거짓과 기만에만 눈이 멀어 있었기에 바로 앞에 있는 진실도 보지 못하고 어두운 시야로 방황했다는 설정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평행성"이라는 영화 속 설정을 하나 더 예시한다면, 범인 조작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는 과정 중 살해되는 이동석과 장석구의 오른손 집게 손가락의 훼손을 들 수 있겠다. 장석구에게 고문을 당하면서 이동석의 오른쪽 집게 손가락이 가짜(의수)임이 드러나는데, 이후 이동석의 시신을 확인하던 최철기가 손가락이 하나 없는 그의 손을 주시하는 모습이 크로즈업된다. 이동석을 고문했던 장석구는 최철기에게 구타 당하면서 똑같은 오른쪽 집게 손가락에 부상을 입고, 최철기의 계략으로 살해될 당시 손가락에 깁스를 한 상태로 사망한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를 고발(accuse) 혹은 비난하며 ‘손가락질’ 할 때 쓰이는 집게 손가락이 훼손된 것으로, 처음부터 ‘가짜 범인’을 만들어 낼 생각만 했던 인물들, 거짓과 악에만 집중했던 사람들은 결국 누가 진범인지 분별할 능력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암시가 아닐까 싶다. 기만과 불의, 욕심을 기반으로 선택을 이어 가는 자들은 결국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되고 무용한 방황을 거듭하느라 갈망하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리라는 경고일 수도 있을 것이고.  




엄마 C의 시선



감독 류승완의 일곱 번째 장편 영화이자 류승완, 류승범 형제의 또 하나의 ‘공동작’인 “부당거래”는, 2010년 가을 개봉 당시 개봉 후 18일만에 관객수 200만을 기록하고 다음 해 “청룡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흥행성과 작품성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인정 받는 작품입니다. 검찰과 경찰 집단의 비리를 실감나게 그린 범죄 스릴러 장르의 이 영화가 국민을 상대로 ‘조작’을 공모하는 ‘사회지도층’에 대해 다루었다는 이유 때문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즈음 한국에서 연일 보도되는 믿기 힘든 현실, 흔히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고 표현되는 상황들을 생각할 때 만약 이 영화가 지금 개봉되었다면 최근 방송되는 정기 뉴스의 내용보다 오히려 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제목 그대로 ‘부당’한 ‘거래’가 도처에서 벌어지는 이 작품에서는 “부패의 온상”이라고 불려 마땅할 여러 등장인물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내용 또한 상당히 복잡다단해집니다.  


수도권 일대에서 발생한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성폭행을 당한 여자 초등학생들이 사체까지 훼손된 채 발견되는)으로 전국이 충격과 경악으로 들끓는 지경임에도 검거 실패가 반복되면서 수사기관들이 궁지에 몰리는 가운데,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용의자가 검거 과정 중 사살되는 사고까지 일어납니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경찰청 수뇌부가 궁리 끝에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배우(가짜 범인)”를 만들어 체포한 후 사건을 종결 짓겠다는 ‘기발’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 물론 기발하다는 말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수준에 입각한 표현이지 검경 내부에서는 드물지 않게 시도되는 일일지 모르지만 - 이런 희한한 ‘수사 방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전말이 밝혀질 경우라도 “가지 치기”가 용이한 수사관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찰청 수뇌부가 경찰대학 출신이 아니기에 ‘줄’도 ‘빽’도 없는 광역수사대의 “최철기” 반장을 적임자로 선정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런 이유로 ‘스카웃’ 되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학연이 없어 승진에서 계속 밀려나는 데다 예전 수사에서 팀원들이 저질렀던 비리로 내사까지 받게 된 최철기는, 아동 성추행 전과가 있는 “이동석”을 대상으로 낙점한 후 평소 자신이 쓸모있게 활용해 온 조폭 출신의 “해동그룹” 대표 “장석구”를 시켜 그로부터 ‘자백’ 아닌 ‘자백’을 받아 냅니다. 





한편, 생김새나 말투만으로도 ‘부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검사 “주양”은 자신의 ‘스폰’ 역할을 해 온 부동산 업계의 거물, “태경 그룹” 회장 “김양수”를 입찰 비리 건으로 구속한 것이 최철기 반장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의 약점을 찾고자 뒤를 캐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전국적 관심사가 된 이 연쇄 살인 사건을 장인의 영향력으로 배정 받은 주 검사가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철기 반장과 장석구 사이에 맺어진 모종의 거래를 감지하게도 됩니다. “승진 보장”과 “비리 무마”라는 미끼에 현혹된 최 반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장석구에게 ‘오더’를 내렸고, 그간 조직이 범한 온갖 불법 행위들을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조건에 더해 이번 기회를 활용하여 태경그룹 산하 업체로서 받아 온 수모와 멸시를 단번에 해결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 섰던 장석구가 그 거래에 응하게 되었다는 것 말이지요. 그러는 가운데 최 반장의 약점을 - 자기를 보호해 줘야 할 처지가 된 - 잡았다고 생각한 장석구가 평소 원한이 깊던 태경 김 회장을 보복 살해하는 사건이, 하필이면 그 일이 김 회장으로부터의 접대 형식으로 주 검사도 동석했던 골프장에서 일어납니다. 계산 빠른 장석구가 주 검사와 김 회장이 골프장에 함께 있던 모습을 사진 찍어 그에게 보내자, 최철기의 농간으로 생각하며 이성을 잃은 주양은 또 하나의 부패 인물 “김기철” 기자에게 이번 사건의 전말이 기사화되도록 사주합니다.     


다음날 조간신문에 “초등학교 여학생 연쇄 성폭행 살인범, 제기되는 의혹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뜨면서 수사국장의 문책을 받게 된 최 반장은 주 검사를 만나 장석구에게서 받은 골프장 사진을 보여 주며 김 기자에게도 같은 사진을 보냈다는 말로 회유를 시도하지만, 그동안 이루어진 최 반장과 장석구 간의 통화 기록을 내미는 주 검사에 의해 도리어 사태는 역전되고 맙니다. 궁지에 몰린 최철기는 이동석의 입을 막기 위해 장석구를 시켜 유치장에 있는 그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하는데 - 가족들에게 상당 금액의 돈을 주겠다고, 또한 전관 변호사를 선임해 “심신장애”를 주장하며 무죄 판결을 받도록 해 주겠다고 유혹했던 것이기에 - 뜻하지 않은 피의자 사망으로 부장 검사와 동료 검사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주 검사는 최철기의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검사실로 불러들입니다. 과거의 비리 사건으로 내사 대상이던 자기 팀의 팀원들은 물론 자신의 여동생 가족까지 검사실로 끌려 간 것을 알게 된 최 반장은 결국 주 검사에게 항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요.   





주 검사가 자주 들르는 술집으로 찾아간 최 반장은 대뜸 옷을 벗고 무릎까지 꿇으며 항복의 뜻을 표하고, 골프장 사진 원본을 제출하며 화해를 청하는 그의 제의에 주 검사도 못 이기는 척 응하면서 두 사람은 애초의 각본대로 일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암묵적 합의를 합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상황을 종료하기 어려웠던 – 앞으로도 자신을 계속 협박하고 이용하려 들 것이 뻔한 장석구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 최철기는 장석구의 오른팔인 “수일”을 매수해 해동 빌딩 건설 현장에서 그를 추락사 시킨 후 전말을 아는 수일까지 살해하려 하는데, 지금까지 꼬리를 문 석연치 않은 일들에 의구심을 품고 최 반장의 뒤를 쫓다가 이 현장을 목격한 수사 팀원 “마대호” 경위가 수일을 죽이려는 최 반장을 저지하다가 오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자신과 각별한 사이인 부하의 죽음에 순간 당황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컸음에도 자신의 안위가 더 긴요했던 최철기에 의해 사건 현장이 훼손, 조작됨으로써 마 경위가 조직폭력배와의 상납 관계에 얽힌 갈등으로 사망한 것처럼 사태는 흘러가지만, 이 비상식적 상황을 의심하며 마 경위의 누명을 벗겨 주려 동분서주하던 팀원들이 그 모든 상황을 공사장 빌딩 옥상에서 촬영한 장석구의 운전기사로부터 녹화본을 전해 받으면서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납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영화의 피날레이자 마지막 반전은 ‘배우’로 삼았던 이동석이 진짜 범인으로 밝혀지는 장면으로, 지적장애를 가진 아내와 결혼했던 그의 목적이 그녀의 딸(자신의 의붓딸)에 있었을 만큼 죄질 나쁜 소아성애자였음이 유전자 감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이 ‘권선징악’의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 경위가 안치된 납골당에 들렀던 최철기 반장이 그의 추악한 행태를 알게 된 팀원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으로 삶의 끝을 맺는 반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장인의 후광을 입고 있는 주양 검사는 골프장 사건이 세간에 밝혀진 이후에도 별 문제 없이 승승장구할 것이 암시되면서 영화가 마무리되기 때문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종류의 불법, 탈법,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가 가진 배경과 지원 세력에 따라 그 끝이 달라지는 - 또 다른 불의와 불공정이 생산되는 - 추악한 사회상을 고발하는 모습으로도 여겨집니다.   





저의 과문의 소치인지는 모르지만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처럼 검찰과 경찰 간의 갈등이 미묘하고 첨예하며 심층적인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 그 주제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상당수 존재할 정도로 – 수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는 데에는, “수사권”이나 “기소권”과 같은 ‘권력’이 다른 어느 것 못지않게 엄청난 힘과 권세가 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지형 때문이 아닐까 라는 유추가 가능합니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Power corrupts.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라는 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액튼(John Emerich Edward Dalberg-Acton)의 유명한 말이 한국의 공권력, 그중에서도 특히 수사기관의 권력에 가장 적절하게 들어맞는 말이리라 생각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최철기 반장을 비웃으며 빈정대던 주 검사가 “우리 최 반장님 털다 보니까 먼지 많이 나오시네”라고 하던 말이나, 최철기의 사주로 자신의 보스인 장석구를 살해한 수일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한 공사장 엘리베이터에서 날리는 먼지를 보며 “아, 먼지 참 많이 나네요”라고 건네는 대사가 그러한 정황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도 되고 말이지요.  





하나님을 만난 이후 저의 삶에서, 그 같은 수사기관의 권력 사유화와 공권력 남용으로 자격 미달인 위정자가 집권하고 여전히 ‘건재’하게 된 오늘날 한국의 상황만큼 이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 즉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표준새번역, 새번역 (whoever resists the authorities resists what God has appointed; ESV),” “여러분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주님을 위하여 복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새번역 (submit yourselves to every ordinance of man for the Lord’s sake, whether to the king as supreme, or to governors; NKJV)”라는 말씀들(롬 13:2; 벧전 2:13-14)의 해석에 갈등을 느꼈던 경우는 없는 듯합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적 사건 이후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새번역 (Obey your leaders and do what they say; CEV)”라는 말씀(히 13:17)이 아무 의심 없이 선내 방송에 복종하던 순진무구한 학생들의 얼굴과 오버랩되면서 혼란스러움을 불러일으켰던 것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여쭤 보면서 나름대로 얻게 된 결론은,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들에 대한 적용 과정에도 우리가 부여 받은 이성과 지성을 활용하는 일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회의와 반항조차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다양한 말씀들을 주신 것은 현실과 상황을 무시한 채 반지성적(反知性的) 추종을 반복하라는 뜻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확신과 더불어 말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위에 소개된 권면들뿐 아니라 “가난한 백성을 억누르는 악한 통치자는, 울부짖는 사자요, 굶주린 곰이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A wicked ruler is as dangerous to the poor as a roaring lion or an attacking bear; NLT),”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 번 낫다; 우리말성경 (Better a poor but wise youth than an old but foolish king who no longer knows how to heed a warning),” “내가 세상에서 본 잘못된 일 또 하나는, 역시 통치자에게서 볼 수 있는 크나큰 허물이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There is an evil I have seen under the sun, the sort of error that arises from a ruler)”와 같은 경구들(잠 28:15; 전 4:13; 10:5)도 지혜서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바이니까요. 





우리 삶의 마지막이 늘 해피엔딩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의 ‘정의’만은 실현되는 세상에서 살수 있길 바라는 대다수 사람들의 소망과는 달리, 실제 삶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 심지어 그분의 살아계심까지 의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욥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으며 성경 속의 수많은 선지자들 역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 질문을 건네거나 항의를 표하면서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올려 드렸으니까요. 그러나 ‘유한성’이라는 시간적 한계와 ‘근시안성’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지닌 우리가 당장 구현되지 않는 정의로 인해 실망과 좌절을 느끼게 되는 때일수록 시공을 초월하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내가 악인의 세력이 커져 그 본토에 심긴 푸른 나무처럼 번성하는 것을 보았지만; 우리말성경 (I have seen a wicked, ruthless man, spreading himself like a green laurel tree; ESV)”이라고 전제되었던 다윗의 말이 “그는 곧 사라져 없어졌습니다. 내가 그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But he passed away, and behold, he was no more; though I sought him, he could not be found)”라고(시 37:35-36) 마무리되었으며, 또한 “얼마 후면 악인들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입니다 (Soon the wicked will disappear. Though you look for them, they will be gone; NLT)”라는 약속(시 37:10)으로도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The Unjust”임을 보면서 “하나님은 공평하지(fair)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공정한(just) 분이심은 분명하다”라고 하는, 제가 자주 묵상하는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진실은 겨우겨우 밝혀지고 정의는 가까스로 실현된다”라는 말이 회자된다고 하지만, 유한하고 근시안적인 한계를 지닌 우리가 스스로의 제한성으로부터 눈을 돌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악인들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되돌이키며 기억할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마침내 이루어질 정의를 믿고 기대할 수 있는 여유를 회복한다면, 당장의 ‘부당함’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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