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여러 모로 마음이 힘든 요즘, 이번 편의 포스팅에서는 조금 더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다루기로 엄마와 결정하자마자 떠오른 작품이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였다. 오랜만에 다시 이 영화를 볼 생각에 며칠간 괜히 기분이 좋았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무척 애정하는 작품인데, 아마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비슷한 인상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까지도 엄마와 극중의 명대사를 따라 하며 웃을 만큼 ‘유머’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형성하는 과정에 큰 영향력을 선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예술계의 거장인 미타니 코키의 1997년 작인 이 영화(‘영화 감독’으로서는 미타니 코키의 데뷔작이기도 하다)는 요즘 세대에겐 낡고 철 지난 예술 분야처럼 느껴질 ‘라디오 드라마’를 그 주제로 삼는다. 다양하고도 독특한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이루는 군상극, 더 정확하게는 ‘소동극’을 선호하는 감독의 특성답게 라디오 방송국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난리법석’을 그렸다고 요약해도 좋을 것이다.
늦은 밤, 어느 라디오 방송국의 "A 스튜디오"에서는 곧 생방송(!)으로 송출될 라디오 드라마의 리허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중이다. "운명의 여인"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제목을 가진 이 드라마는 그래도 나름 방송국의 극본 공모전 수상작으로, 평범한 가정주부인 초보 작가 "스즈키 미야코"가 자신의 작품이 드라마화되는 감격스런 장면을 지켜보며 설레고 있는 모습도 비춰진다. 어딘가 매너리즘에 빠진 듯 시큰둥하게 구는 감독 "쿠도"와 달리 PD "우시지마"와 다른 스태프들은 미야코를 극진하게 대접하지만, 순탄하게 흘러갈 듯 보이던 분위기는 드라마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왕년의 스타 "놋코"가 주인공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하며 삐그덕대기 시작한다. 배우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다른 이름들이 제시되지만 놋코는 생뚱맞게도 "메리 제인"이라는 영어 이름에 꽃히고, 결국 그녀의 억지 때문에 드라마의 배경 자체가 일본에서 뉴욕으로 바뀌면서 다른 등장인물들도 외국인이 되어 버릴 뿐 아니라 파친코 직원이었던 여주인공의 직업이 변호사로 탈바꿈하기까지 한다. 우시지마는 친분이 있는 베테랑 방송작가 "버키"를 몰래 섭외해 대본을 수정하도록 하고, 평범한 여주인공이 어부인 남자 주인공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던 원작은 점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질'된다.
초반에는 작가 미야코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수정된 내용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시늉이라도 하던 우시지마는 곧 결정을 뒤늦게 ‘통보’한다거나 미야코 모르게 - 그녀를 소외하는 방식으로 - 일을 진행하고, 안 그래도 얌전하고 소심한 성격인 미야코는 점점 더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각색’에 대해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못한 채 어버버하며 끌려간다. 쿠도를 포함한 다른 방송국 직원들은 그런 그녀에게 미안함(또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듯 보이지만 편성 시간에 맞춰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흐름을 따른다.
그렇게 자정이 된 12시 정각 어찌저찌 고쳐 놓은 대본을 따라 방송은 시작되지만, 드라마의 생방송 도중에도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갑자기 추가된 내용에 적합할 효과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직원들은 결국 효과음을 직접 만들어 내고, 작품의 설정을 대거 바꿔 버린 바람에 내용의 앞뒤가 맞지 않게 된 부분들을 급히 수정하느라 녹음 부스 안은 혼돈 그 자체가 된다. 이런 와중에 ‘특별 대우’를 받는 여배우 놋코에 대한 불만이 컸던 남자 주인공 역의 성우 "하마무라"가 아무 예고 없이 애드립을 치며 남자 주인공 "마이클 피터"를 "도날드 맥도날드"라는 이름의 파일럿으로 바꿔 버리는 통에 출연진과 제작진은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난국도 펼쳐진다. 극중에서 남자 주인공이 행방불명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와 여자 주인공과 재회하는 장면이 가장 큰 문제가 되지만, 이들은 광고주인 "다이슨다 항공"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주인공 "맥도날드"를 NASA 소속 ’우주 비행사’로(...) 만들어 버린다. 이로써 드라마는 맥도날드가 우주에서 조난 당한다는 전개로 이어지고, 얼결에 우주 미아가 된 맥도날드가 지구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여기에 사사건건 입맛대로 드라마의 각본을 주무르던 여배우 놋코가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해피 엔딩 대신 "메리 제인 혼자서도 당당하고 행복해지는" 결말로 끝내자는 주장까지 하자 미야코는 간신히 참아 오던 분노와 울분을 터뜨리고 만다.
두 주인공이 재회해서 행복해진다는 결말만큼은 유지해 달라는 미야코의 간곡한 부탁은 우시지마를 포함한 ‘윗선’들로부터 외면 당하지만, 내심 죄책감을 느껴 오던 쿠도는 냉소적이고 무심해 보였던 초반의 모습이 무색할 만큼 열정적으로 미야코의 편을 들어 준다. 결국 그냥 퇴근하라고 내쫓겨진 후에도 포기하는 대신 스튜디오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쿠도는, 우시지마 몰래 미야코와 배우들에게 비밀리로 계획을 전달하며 다른 직원들과 함께 스튜디오 안에서의 ‘혁명’을 꾀하는 등 주인공 맥도날드를 지구로 귀환시키기 위한 작전을 개시한다.
[브런치]의 글을 준비하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볼 때는 언제나 공책을 옆에 두고 작품의 내용이나 중요한 장면, 떠오르는 생각 등을 필기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그렇게나 사랑하는 영화를 보는 상황임에도 뭔가 숙제나 업무를 수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를 다시 보는 중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메모했음에도 - 나중에 세어 본 결과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많은 페이지 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 영화를 분석한다는 ‘의식’이나 부담감 없이 끝까지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 크게 소리 내어 웃은 것도 여러 번이다. 혼자 실컷 ‘힐링’만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직장인, 사회인이 되어 다시 영화를 보며 새롭게 다가오는 대목들도 꽤 많았다. 쿠도의 뚱한 매너리즘이 너무나 공감된 것은 물론 여기저기 눈치 보고 굽신대는 우시지마의 어딘가 치졸한 비굴함이 심금을 울렸달까. 관객이 저절로 응원하게 되는 미야코와 쿠도에 반해 상대적으로 ‘못된’ 인물들에 대해서도 연민과 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을 향해 다정하고 따뜻한 관심을 건네는 감독의 시선 아래에서 위로와 희망에 집중하는 작품의 매력을 재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고 말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지금까지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과 이번에 작품을 감상하며 제일 인상 깊었던 장면이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기억되던 장면은 극의 초반, 내레이터 역을 맡은 아나운서 "호사카"에게서 몇몇 소소한 수정 요구를 전달 받고 시무룩해진 미야코를 위로하던 PD 우시지마가 라디오 드라마에 관한 자신의 애정과 철학을 설파하던 부분이었다. ‘우주’를 구현해야 할 경우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세트를 제작하고 특수 효과를 덧입혀야 하는 ‘시각적’ 콘텐츠와 달리, “여기는 우주”라고 말하기만 하면 우주가 생겨나는 것이 바로 ‘라디오’라는 매체의 매력이라는 우시지마의 대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내가 백지에서 그 무엇이든 창조해 낼 수 있는 ‘글’이라는 장르에 매혹되어 인생을 저당 잡히게 된 것에도 이 영화의 책임이 크지 않나 싶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는 자신의 작품이 무정하고 무신경한 사람들 손에 해체되고 변질되는 수모를 참고 참던 미야코가 결국 녹음 부스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부탁이니까 제발 대본대로 해 주세요!”라고 항변하는 장면이 조금 더 눈에 들어왔다. ‘대본’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상황에서, 이미 단단하게 토대를 내린 상식과 도의, 규제를 자꾸 이탈하며 점점 더 수습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폭주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빈번히 발생하는 이 사회에의 항변으로 들리기도 하는 말이다.
"작가님", "선생님"이라고 존칭하며 예의를 갖추는 듯 보이다가도 상관의 눈치와 압박에 부딪히자 곧바로 미야코의 의견과 존재를 묵살하는 우시지마가 그 장면에선 미야코를 아예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작품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수없는 ‘타협’이 필요하다고 윽박지르듯 설득하는 모습도 무척 씁쓸하게 다가온다. 작품성이 그다지 뛰어나진 않을지언정 애정과 진심으로 자신의 극본을 대하는 미야코, 그리고 그녀 나름의 신념과 글의 의도를 존중하는 쿠도나 다른 직원들과 달리, 광고주와 톱스타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편성된 시간 안에 방송을 끝낼 생각만 하는 윗선 책임자들의 태도 역시 상당히 실망스럽다.
평범하게, ‘대본대로’, 상식대로 사는 삶을 지켜 내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욕심과 이기심, 야망, 증오 등등의 이유로 우리를 ‘대본에서 벗어난’(off script) 곳으로 이끌려는 세력들에게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옳은 말을 하는 것이 민폐로써 손가락질 받거나 조롱 당하기 일쑤인 전반적 분위기 안에서 소신이 거부당하고 깎여 나가는 경험을 반복했던 사람들이 주변에 대해 무관심한 방관자가 되는 모습을 탓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작품은 결국 "저 사람이 틀린 게 아니라 우리가 틀린 거예요"라고 말하는 쿠도에게 조명을 비춘다.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변칙’이 반복되는 대로, 어찌저찌 작품을 짜집기해 방송하는 것에만 집중하며 현상에 대한 책임이나 소유권을 거부하던 그는 우시지마를 제압한 채 스튜디오로 들어와 “이제부터 모든 일은 제 책임”이라며 결국 작가가 원했던 해피 엔딩을 이루어 낸다.
이 과정에서 그가 조직의 계층 안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직원들과, ‘놋코’에게 밀려 그녀만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배우들, 직접 효과음을 만드는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로 방송국에서 일했지만 기계에 밀려 설 곳을 잃었던 경비 할아버지 등과 ‘다 함께’ 힘을 합쳐 이 작전을 성공시킨다는 설정 또한 고무적이다.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맡은 듯 보였던 이 인물들은 결국 ‘연대’와 ‘연합’을 이룸으로 인해 A 스튜디오 안에서 작은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쿠도는 미야코에게 비밀리에 연락하며 “도날드는 내가 데려옵니다”라고 장담하지만, 우주에서 조난 당한 도날드 맥도날드(...)를 메리 제인의 곁으로 돌려보낸 것은 외면받고 무시 당했던 그들 모두의 업적인 셈이다.
여전히 복잡하고 힘든 나날들이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도날드"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기적을 꾸준히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힘겨운 일상을 버텨 내느라 지친 채 잠잠했던 사람들이 뜨겁고 즐겁게 연대하는,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 내려던 세력에 맞서는 광경을 보며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느낀다. 지금 당장은 정의와 공의, 평등과 관용, 깊은 상처를 감싸고 어루만져 주는 다정과 사랑이 손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듯 느껴질지라도, 결국 모두가 소망하는 천국은 우주를 떠도는 대신 지금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 곳으로 돌아올 것임을 믿는다. 이 작품의 영어 제목에서처럼, “귀환을 환영한다”(“Welcome Back, Mr. McDonald”)고 그분을 반겨 맞는 언젠가를 기대해 본다. 그때까지 단 한 사람도 지치거나 외롭게 남겨지지 않기를.
엄마 C의 시선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영어로 붙여진 영화의 원래 제목은 “웰컴 백(Welcome Back) 미스터 맥도날드”이지만)는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하여 1997년 개봉되었던 일본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미타니 코키는 엄청난 수에 달하는 작품을 다양한 배우들과 함께 제작하며 흥행에도 크게 성공함으로써 일본 정부가 문화 분야 공로자들에게 수여하는 “자수포장(紫綬褒章)”이라는 훈장까지 받은 거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가운데에도 역시 코미디를 ‘주 종목’으로 표방하는 그는, 스스로를 ‘작가’로 여기며 각본가의 입장에서 연출을 한다는 평소의 소신처럼 - 또한 자신이 극본을 쓴 본 작품의 경우도 그러하듯 - 한두 명의 주인공이 전체 사건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서로 엉켜 해프닝을 벌이며 전개를 이어 가는 “군상극(群像劇)” 혹은 “소동극(騷動劇)”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이전에는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던 한국에서 좋은, 그리고 ‘수준 높은’ 일본 영화들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시기에 해당하는 1998년부터 2004년 사이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수입 제한’ 정책이 사실상 ‘수입 허용’ 정책으로 전환되면서인데,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이 시기에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나 그와 비슷한 느낌의 일본 코미디 영화가 다양하게 제작됨으로써 저희가 1년여 전 이 공간에서 다루었던 “기쿠지로의 여름(1999년 작)”을 포함하여 “쉘 위 댄스(1996년 작),” “간장 선생(1998년 작),” “우리 개 이야기(2005년 작)“ 등이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수입, 개봉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수준 높은 유머 코드를 장착한 재미있는 영화들인 만큼 앞으로도 이 공간을 통해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상황 설정을 즐겨 하고 또 그에 능한 미타니 코키답게,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라디오 드라마가 제작되는 스튜디오 안이며 시간적 배경도 ‘생방송’ 드라마가 진행되는 하룻밤 동안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녹음이나 녹화와 같이 편집과 보정이 가능한 방식이 아니라 무대책적으로 흐름이 이어지는 생방송이라는 설정이 ‘재미’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는 이 영화는, 이미 언급했듯 군상극(群像劇, Ensemble Cast)이라는 특성상 소수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에게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핵심 주제와 전반적 구성으로 볼 때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드라마 제작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젊은 감독 “쿠도 마나부”와, 해당 라디오 방송국의 극본 공모전에 본인의 작품이 당선된 후 그 극본이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스튜디오를 방문한 가정주부 “스즈키 미야코”가 가장 중심적인 배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쿠도의 경우 배우(성우)들뿐 아니라 방송국 윗선의 압력과도 맞서면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입장이고 미야코의 경우는 방송국 스튜디오라는 낯선 환경과 이름난 대배우들 간의 힘겨루기 경쟁에 주눅이 들어 자신의 작품이 완전히 궤도를 벗어나는 상황 속에서도 발만 동동 구르게 되긴 하지만 말이지요.
지금까지 ‘주부’라는 호칭으로만 불리며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해 본 경험이 없었던, 그러다가 라디오 드라마 공모전에서 “운명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쓴 본인의 글이 당선되고 그것이 극화되며 난생 처음 꿈 같은 현실을 맞게 된 미야코는 큰 기대와 부푼 희망을 안고 방송국을 찾지만,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 과거에는 잘 나가는 스타였으나 이제는 명성이 퇴색한 - 여배우 “센본 놋코“로 인해 첫 번째 난관을 맞게 됩니다. 대본을 받아 본 놋코가 자기가 맡은 배역의 이름(리츠코)과 직업(파친코 직원)이 마음에 안 든다며 미국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메리 제인”으로 설정을 바꿔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놋코의 이런 주장이 이후 다른 배역이나 상황들에게까지 연쇄적인 악영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첫 번째” 난관이라기보다 전체적 혼란의 시발점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입니다.
여주인공이 평범한 주부에서 전문직 여성으로 ‘변신’하자 예전부터 놋코와 사이가 좋지 않던 남자 주인공 역할의 “하마무라 죠”도 상대가 변호사라면 자기도 ‘파일럿’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원본에서는 작은 어촌의 어부로 정해져 있었으나) 우기기 시작하더니, 원작 내용의 수정을 맡은 방송작가 “버키”의 고집 때문에 - 이야기 흐름상 ‘기관총’의 효과음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 뉴욕으로 설정되었던 공간 배경 또한 난데없이 ‘시카고’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로 인해 새로이 대두된 문제는 해변을 걷다 파도에 휩쓸린 여주인공이 자신을 구해 준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 전개와 달리 시카고에는 바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댐을 폭파”시킨다는 무리수를 두어야 할 상황에 다시 직면하게 되지요. 이에 더하여, 다시 지어진 “마이클 피터”라는 이름에 불만이 많던 하마무라가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밝히는 대목에서 스스로를 “도날드 맥도날드”라는 이름(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다 남겨 두었던 포장지를 보며 순간적으로 떠올린)의 미국인 비행기 조종사로 느닷없이 ‘변모’시켜 버리기까지 합니다.
남자 주인공이 행방불명되는 원래의 스토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 비행 도중 그가 사고를 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려던 그들은, 프로그램의 광고주가 항공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이번에는 그의 직업을 ‘그냥’ 비행사가 아니라 ‘우주’ 비행사로 바꾸기로 한 후 우주에서 실종되는 것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안 그래도 “도날드 맥도날드”를 - 영화에서는 “도나르도 매끄도나르도”로 발음되는 - 못마땅해하던 놋코가 ‘우주’에서 실종된 그라면 지구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며 좋아하는 바람에 둘이 영영 이별하며 드라마가 끝나는 쪽으로 방향이 급변되고, 이 사실에 절망한 미야코는 난생처음일 듯한 ‘반란’까지 감행하지만, 그런 그녀를 위해 자신의 ‘직’을 건 쿠도와 다른 배역들이 모두 도와 준 덕분에 마침내 다시 지구로 귀환한 도날드가 메리와 재회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드라마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 영화의 제목이 “웰컴 백 미스터 맥도날드(Welcome Back, Mr. McDonald)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요.
미야코의 극본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의 결실을 축복하며 성혼을 선언하는 성직자 역할이었으나 내용이 엉망이 되면서 자신의 배역도 사라졌던, 그럼에도 본인의 등장 장면을 다시 넣기 위해 노심초사하다 결국 “만난 적은 없지만 인품이 훌륭한 목사”로 소개되며 “사랑의 힘을 믿으라!”라는 대사 한마디를 포함시키게 된 “노다 벤”과, 아내의 심부름으로 스튜디오에 들렀다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성을 선택하는 여주인공이 사실은 자기 아내 미야코가 본인의 속마음을 투영해 설정한 배역임을 알게 되면서 여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훼방하기 위해 생방송 중 난입까지 불사하는 미야코의 남편 “스즈키 시로,” 그리고 심야 운행을 하면서 라디오 드라마를 듣던 중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내용에 감동해 방송국까지 찾아와 감격의 눈물을 쏟으며 화룡점정을 찍는 이름 모를 “트럭 운전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의 배우들이 이 즐거운 희극에서 나름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대사이자 작품의 주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대사로 PD 역할의 “우시지마 다쓰히코”가 전한, 라디오의 경우 만약 공간 배경이 ‘우주’라면 “여기는 우주!”라는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을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오래전 딸과 함께 이 영화를 본 후 우리 사이에서 자주 인용하는 ‘인사이드 조크’가 되기도 했지만, 저는 이 짧은 대사 안에 라디오가 – 그리고 ‘책’이 – 자신들을 접하는 상대에게 허락하는 ‘상상력’의 무한성이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조차 옛말이 된 듯도 하지만 한때 TV를 “바보 상자”라고 일컫는 표현이 회자되곤 했는데, 책이나 라디오가 독자와 청자들의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매체인데 반해 그 같은 여백 자체를 차단하며 눈으로 보이는 ‘실물’들을 직접 ‘손에 쥐어’ 주는 TV에서는 보는 이들의 상상력이 작동할 공간이 조금치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런 말을 생겨 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믿음을 갖는 일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제 나름대로 정립하게 된 ‘가설’ 중에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은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상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질적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상상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으로, 물론 말씀에 근거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이해하는 ‘논리력’이 그와 병행되어야 하고 또 성지순례 같은 답사 등의 방법에 의해 입체적으로 성경(역사서, 복음서)을 바라보게 되는 실제적 경험도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 모든 여건이 주어지기 이전 ‘거듭남’의 순간에는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던 영적 상상력의 작동이 필수적 조건이리라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편의 글을 올리면서 저희가 다룬 영화를 보도록 추천한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 저희가 이 기획을 시작한 이유 자체가 ‘영화 추천’을 위한 것은 아니었기에 – 이번에 소개하는 “웰컴 맥도날드”는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시청해 보시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한국의 혼란한 정국, ‘제정신’으로는 매 순간을 버텨 내기 힘들 정도의 암흑의 시간을 인내하며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그저 순수하게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고통스런 현실을 이겨 내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즉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믿고 있는,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느리더라도 결국은 정의가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오염되지 않은 코미디물이 때로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기능을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게 되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