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저희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작품으로서는 꽤 ‘최신작’이라고 할 수 있을 한국 영화 “부라더”는, “형제는 용감했다”라는 창작 뮤지컬을 각색해 2017년 개봉되었던 코미디물입니다. 개봉 당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정도의 흥행을 기록하기는 했으나 그 큰 ‘덩치’에 비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이유로 “마블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 마동석과, 여러 작품들에 주로 단역이나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뛰어난 희극 연기 감각으로 어디에서든 빛을 발하는 배우 이동휘가 투톱으로 주연을 맡으면서 그들의 ‘웃음 연기’에 적지 않은 관심이 쏠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장유정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한 “형제는 용감했다”의 대본과 뮤지컬 곡들의 작사, 그리고 연출까지 직접 담당(2008년)했다는, 또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폐막식을 연출했다는 사실에서 ‘내공’을 무시할 수 없는 연출가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뮤지컬을 꾸준히 제작하는 동시에 영화 분야에서는 “김종욱 찾기”라는 – 나름 특이하고 분위기 있는 – 작품으로 처음 데뷔(2003년)했고 이번 영화 “부라더”에 이어 “정직한 후보”라는 또 다른 코미디를 감독(2020년)했던 다양한 경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안동의 ‘뼈대’ 있는 가문 거산(巨山) 이씨 종가의 종손인 “이춘배”가 목판을 새기던 중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장례를 주관해야 할 춘배의 두 아들이 급한 연락을 받고 고향에 돌아오는 모습으로 본격적 이야기를 펼칩니다. 귀향 길에 우연히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오기는 하지만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그들 형제는 학원에서 역사 강의를 하는 “이석봉”과 건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봉”으로, 하필 그 시점 두 사람 모두가 뜻하지 않은 큰 난관을 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천성적으로 ‘꿈’이 크고 자유분방하다던 성격 그대로 “인디애나 존스”를 선망하며 유물 발굴로 ‘일확천금’하는 요행을 바라면서 사는 형 석봉은 미얀마 유적지의 발굴 작업을 위해 1억 원에 달하는 최신 장비를 구입하지만 미얀마 쪽에 내전이 일어난 이후 꿈은 사라진 채 빚만 잔뜩 떠안게 되었고, 학창 시절부터 똑똑하고 공부 잘한다고 인정 받던 동생 주봉은 소속 회사에서 기획 중인 고속도로가 안동 지역 자신의 문중 땅을 지나게 되자 가족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우리란 생각으로 노선 변경을 시도하다가 회사 대표(오 대표)의 오해를 받아 해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본래 사이도 좋지 않을 뿐더러 각자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터라 함께 귀향하는 차 안에서 심한 다툼을 벌이던 그들은 갈지(之)자로 운전을 하다 시골길에서 무언가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당황한 채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던 중 풀밭에 쓰러져 있는 한 여성을 발견합니다. 신고를 한 시골 파출소로부터 출동할 인력이 없는 상황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들이 직접 병원으로 데려다주려 하지만, 차 안에서 갑자기 정신을 되찾은 여성은 어딘가 석연치않은 분위기에 하는 말들까지 영 이상하기만 해 두 사람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지요. 그럼에도 여성이 자신은 괜찮다며 굳이 차에서 내리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형제는 연락처를 건네준 후 다시 안동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 때도 고향에 내려오지 않았던 데다 이후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은 형제를 가문의 어른들은 심하게 꾸짖지만, 그들이 그렇게 발길을 끊은 이유가 평생 종부로 고생만 하다 노년에 암까지 걸린 엄마의 죽음을 자신들에게 즉시 알리지 않은 데 대한 원망을 표하자 도리어 화를 내며 다시는 집에 오지 말라던, 생전의 아버지가 보인 차가운 태도 때문이었기에, 지금까지 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한 그들은 여전히 마음속에 앙금을 남겨 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양반’ 체통을 따지는 엄한 가풍 속에서 늘 엄마를 고생만 시키고는 돈이 아까워 병원에도 제대로 모시고 가지 않았다는 원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그다지 안타까워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지요.
이런 ‘심각한’ 사정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코미디라는 장르에 충실하며 웃음 코드를 이곳저곳에 포진시켜 둡니다. 오는 도중 자신들이 차로 치었던 여성의 주머니에서 “오로라”라는 이름과 문화재청 직원이라는 직함의 명함을 발견했던 석봉이 안동 집에까지 돌연히 나타난 그녀로부터 그 집 어딘가에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100억 상당의 황금 불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서울 친구들에게 연락해 ‘1억 원짜리’ 장비를 가져오도록 한 후 집안 여기저기를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도 그런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사실 그 불상은 역사 강사인 그가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아이템’이지만 묻혀 있는 지역이 자신의 고향 “안동”이 아닌 평안남도 “안주”일 것으로 추측했다가 오로라가 문화재청에서 일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정보’를 더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한편 회사에서 곧 해고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고심이 깊던 중 안동 집까지 자신을 찾아온 - 내심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 회사 동료 “윤사라”의 방문을 받은 주봉은, 고속도로 건설 공사에 동의한다는 가족 전체의 서명만 받아 오면 복직은 물론 독일 지사 발령도 내 주겠다는 오 대표의 약속을 전달 받자 평소 관심조차 없던 문중 어른들의 이름과 항렬 등을 외워 그들의 환심을 사면서 서명을 얻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그런 가운데, 황금 불상의 비밀을 혼자만 알고 쉬쉬하던 석봉의 ‘작태’를 알게 된 주봉이 형에게 항의하며 작업을 방해하는가 하면, 동생이 자기 몰래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이유를 알게 된 석봉 역시 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면 황금 불상 발굴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 동생의 일을 훼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던 그들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오로라는 형제끼리 싸우면 안 된다고 말리려다 또 ‘사고’를 당하는데,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시신’을 숨겨 두었던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한바탕 “귀신 소동”이 벌어지지요. 이후 신분을 속이고 집안에 기거하던 승려가 젊은 시절 종손의 자리를 마다하며 출가했던 “이현배”이고 자신들의 아버지 춘배는 입양한 아들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양자인 아버지와 그 아내인 어머니가 부당하게 감내해야 했던 고통에 더욱 분개한 석봉은 값나갈 만한 집안 유물들을 훔쳐 떠나 버리고, 그것들을 되찾아 오는 조건으로 건설 동의 서류에 서명을 모두 받은 주봉은 형을 찾기 위해 나섭니다. 노상에서 오로라의 환영을 보고 사고를 당한 후 안동 집으로 다시 돌아온 형제는 어질러진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다 발견한 예전 사진 속에서 “오로라”가 바로 젊은 시절 엄마 “순례”의 모습이었음을, 그리고 엄마를 지극히 사랑하던 아버지가 치매를 앓는 엄마의 상태를 숨기기 위해, 그리고 아들들이 자기처럼 장손으로서의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안동 집과의 인연을 끊도록 했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엄마가 그네를 타던 동산도 자주 다니던 시골길도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한 주봉이 오 대표에게 건네졌던 동의서를 다시 빼앗아 오고, 엄마의 그네터 근처에서 아버지가 키우던 멸종희귀종 “한란(寒蘭)“이 발견되어 형제가 모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게 된다는 – 게다가 주봉은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에 남게 된다는 – 영화의 마무리가 ‘해피엔딩’의 뻔한 공식을 따른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찾아와 주지 않는 자녀를 늘 그리워하는, 그리고 자신들의 죽음 이후에도 자녀들이 서로 사이좋게 어울려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해피엔딩에서도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은 ‘4수’를 하고서야 대학에 입학한 것과 달리 한 번에 곧바로 합격했다는 이유로 동생을 심하게 구타했던 것은 물론 동생이 열심히 모아 두었던 결혼 자금까지 훔쳐 달아날 만큼 ‘아무 생각 없는’ 형과, 어려서부터 공부 열심히 하며 바르게 성장하고 “얼굴도 잘 생긴” – 것으로 설정된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지만) – 동생이라는, 서로 너무도 다른 형제이기에 좋은 관계를 갖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 개개인이 각기 다른 모습과 생각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가 화목하게 사랑하며 지내기를 바라시기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How wonderful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harmony!; NLT)”라고 다윗의 입을 빌어 말씀(시 133:1)하신 하나님의 속 깊은 뜻은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을 것입니다.
돈이 아까워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자신들이 미워 집에 오지 못하게 했다는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아들들이 힘든 삶을 살지 않도록 막으려 했던 아버지 춘배에게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엿보게도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두 아들처럼 하나님을 늘 오해하고 그분의 뜻을 곡해하며 살고 있을 터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굳이 ‘변명’조차 하려 하지 않으시니까요. 다행히도 이들은 영화가 끝나기 전 아버지의 진의를 이해하고 오해를 풀지만 어리석은 우리들 대부분은 천국에 갈 때까지 아버지의 크고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도 느끼게 됩니다.
노년에 맞을 모습 중 가장 큰 ‘악몽’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 보지 못하게 되는 일”과 “나의 과거 삶에 대한 기억을 잃는 일”인 저로서는 ‘기억’이라는 부분을 조명하는 이 영화의 접근법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형제가 운전하는 차에 부딪힌 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던 “로라(실제론 “순례”)”가 “기억을 잃은 대가는 얼마여야 하느냐”고 물으며 “세상을 다 줘서라도 잃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할 수도 있고 가진 것을 다 줘서라도 지워 버리고 싶을 수도 있는 것이 기억”이라 일갈하는 대목을 통해 그녀의 마음속에는 “세상을 다 줘서라도 잃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기억만큼이나 “가진 것을 다 줘서라도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 또한 쌓여 있을 것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녀 안의 소중한 추억들이 어떻게든 잊고 싶은 기억들에 묻혀 버릴 만큼 상처를 갖게 된 이유가 가문의 ‘어르신’들을 향해 석봉이 던졌던 “그 놈의 죽은 사람들 챙기느라 산 사람들 다 죽이는 당신들이 반성해야 한다”는 말 속에서 찾아질 수 있을 듯하기에, 부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세상을 다 줘서라도 잃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기억”을 남겨 줄 수 있기를, 또한 그런 기억 자체로 남게 될 수 있기를, 영화를 다시 보며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딸 J의 시선
현실이 불안하고 팍팍할수록 관객들이 가볍고 소화하기 쉬운 영화, 특히 코미디를 주로 찾는다는 말이 있는데 - 반대로 지루할 정도로 평온하고 안정된 사회에서는 자극적인 컨텐츠의 수요가 오른다고 한다. 북유럽에서 살인 사건 등의 범죄를 다루는 추리물 장르가 특히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일리 있는 이론이 아닌가 싶다 - 그런 맥락에서 장윤정 감독의 2017년 작 [부라더]는 현 시국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영화의 주인공들이자 제목이 가리키는 "이씨 형제"처럼 이 작품에는 어딘가 살짝 모자라고 투박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 없는 가족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면 또한 존재한다.
[부라더]는 "거산 이씨 종가"의 종손이자 주인공 형제의 아버지인 "이춘배"(전무송)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시작된다. 장례를 제대로 치루기 위해 그의 두 아들이 필요하지만 집안의 경직된 분위기와 구태의연한 풍습 등을 견디지 못해 이미 오래전 집을 뛰쳐 나간 형제는 가문의 ‘종부’로 평생 일만 하다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아버지와 가문에 큰 원망을 품고 있는 상태다. 학원에서 역사 강사로 일하는 첫째 아들 "이석봉"(마동석)은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를 자처하며 유물 발굴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철부지로,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거액의 발굴 장비를 샀다가 빚더미에 오른 상태이며, 둘째인 "이주봉"(이동휘)은 그와 달리 안정된 직장을 가진 성실한 ‘엘리트’이지만 회사의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지휘하다 생긴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새로 들어설 고속도로의 경로가 고향 안동, 그것도 이씨 문중에 속한 동산을 지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자신의 가문 사람들은 절대 그 땅을 내놓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주봉이 안동 땅을 비켜 가는 방식으로 공사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의 라이벌인 동료가 동산을 밀어 버리면 시간과 비용이 절약될 텐데 왜 손해를 보면서까지 돌아가는 길을 택하느냐고 시비를 걸어 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주봉은 난데없는 횡령 의혹을 받을 뿐 아니라 화가 난 회사 대표에 의해 해고될 위기에까지 처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 받게 된 아버지의 부고로 형제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귀향 길에 오른다.
본가로 내려오던 길에 그들 둘이 우연히 재회한 후 석봉은 주봉의 차를 얻어 타는데,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형제는 계속 티격태격대면서 감정이 점점 격해지고 아예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다가 사고를 내게 된다. 무언가를 들이받은 듯한 느낌에 차를 세운 둘은 주변을 살피다가 젊은 여성(이하늬)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허둥지둥 그녀를 차에 실어 근처 병원으로 향한다. 다행히 곧 깨어난 여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안동에 와 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석봉이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명함을 발견한 덕분에 그녀가 문화재청 직원 "오로라"일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그녀를 걱정하며 - 더 정확히는 로라가 잘못될 경우 자신들에게 돌아올 책임을 걱정하며 - 병원에 데려다주려는 형제와 달리 로라는 자신이 멀쩡하니 병원에 갈 필요 없다면서 그들을 안심시킨다. 석봉과 주봉은 불안한 가운데에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처럼 헛소리를 내뱉다가 천진하게 까르르 웃곤 하는 로라에 질려 결국 부탁대로 그녀를 차에서 내려 준다.
어찌저찌 고비(?)를 넘긴 형제는 본가에 도착하지만, 수년 전 어머니의 임종 시 연락이 되지 않아 장례식을 놓쳤을 뿐 아니라 당시 아버지를 포함한 집안 어른들과 거하게 싸운 전적도 있는 둘을 반갑게 맞아 주는 가족은 거의 없다. 여전히 삐딱하게 나가는 두 형제는 상주임에도 전통 상복이 불편하다고 입기를 거부하면서 장례 절차만 마치면 이 놈의 집구석 따위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생각뿐이다. 하지만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로라가 갑자기 그 둘 앞에 나타나 각자에게 솔깃한 정보를 건네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석봉에게 이씨 가문의 가보이자 백억 원 이상의 가치를 가진 "쌍둥이 황금 불상"이 이곳 안동 본가 어딘가에 묻혀 있음을 알린 로라는,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문중 소유의 동산을 넘기도록 가문 어른들을 설득만 하면 독일 지사장 자리에 앉혀 주겠다는 회사 대표의 언질을 받은 주봉에게도 찾아가 어르신들을 살살 꾀어 동의서를 받아 낼 수 있는 방법까지 귀띔해 준다.
각자의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찾게 된 석봉과 주봉은 시큰둥하고 적대적이던 태도를 돌변시켜 장례식 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해 나간다. 불상을 찾기 위해 함께 학원에서 일하던 친구들까지 불러들인 석봉이 발굴 장비로 본가를 샅샅이 뒤지는 동안, 통째로 외운 족보를 무기 삼은 주봉은 어르신들의 환심을 사며 동의서 서명을 설득한다. 그러나 본인들의 꿍꿍이에 열중한 두 사람 앞에 로라가 다시 등장한 후 어딘가 기이하고 신비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기에 바빴던 형제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들의 부모와 관련된 비밀 또한 점차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일단 영화에 관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이 작품이 굉장히(적어도 개인적 취향으로는) ‘웃기다’는 점이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 책 같은 매체 안에서의 유머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한 편이지만 - 다만 실제 삶에서는 웃음버튼이 지나치게 쉽게 눌린다.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괴리이긴 하나 뭐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축복인 것으로 납득하고 넘어가겠다 - 이번에 작품을 다시 보는 동안 정말 여러 번 소리내어 웃었다. 물론 여기에는 배우들의 기여도가 상당한데, 저렇게 몸집이 크고 위협적으로 생긴 사람도 귀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마블리" 마동석과 표정 변화 없이 툭툭 던지는 코믹 연기로 극한의 효율을 뽑아 내는 이동휘의 케미와 진가가 이 영화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극한직업]에서도 보여 줬듯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하늬의 능청스런 매력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 외에도 가문 전통의 계승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촌동생 "미봉" 역할의 조우진이나 조신한 척 와일드한 그의 아내를 연기한 송상은, 당숙 역을 맡은 베테랑 배우 송영창과 가문의 일원임을 숨긴 어설픈 승려 역의(요즘 특히 핫한) 허성태 등등 모든 조연 배우들이 자신감 있고 맛깔나게 각자의 캐릭터를 표현하며 빈틈없는 연기 열전을 펼쳐 보인다.
장윤정 감독이 제작했던 창작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를 직접 각색한 영화인 만큼 작품과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부분도 장점으로 들 수 있다. 통통 튀는 대사와 재치 있는 연출 방식에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상황을 설계하는 것 외에도 각각의 인물들이 가장 매력적이고 귀여워 보일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려는 의도가 읽히기도 하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실제로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무대 위에서 신나게 날아다니며 부족한 개연성이나 서사를 각자의 매력으로 메꾸어 준다.
하지만 플롯의 ‘산만함’, 혹은 ‘직통선’(throughline)의 부족이라는 아쉬움 또한 남기는 한다. 물론 뮤지컬 원작 자체의 스토리가 그닥 탄탄하고 정교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 넘버(수록곡)를 통해 자연스럽게 ‘에피소드’ 혹은 vignette 형식으로 진행되는 뮤지컬과 달리 서사의 뚜렷한 궤적이 필요한 영화 매체에서는 [부라더]가 가진 스토리의 빈약함이나 허점들이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초반과 중반부까지 흔들림 없던 영화의 코미디적 톤 또한 후반부에서 ‘감동 주기’의 문법(한국 코미디의 고질적 문제라 생각되는)에 조금씩 휘말리며 어딘가 불안정해지기도 한다.
대신 이런 산만함, 혹은 서사와 주제의 혼란함은 영화를 전형적 "감동 가족극" 대신 "약자의 통쾌한 복수"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희석될 여지가 있다. 이 작품의 주요 테마 중 하나는 앞서 말했듯 아버지와 가문을 향한 주인공 형제의 원망과 분노로서, 그들 형제는 ‘종부’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어머니 "순례"를 마치 일꾼처럼 부리고 착취한 이씨 가문에 대해 큰 원망을 품고 있으며 그런 그녀를 제대로 감싸거나 보호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는 더 큰 실망과 분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가문, 그리고 그 가문이 상징하며 귀히 여기는 모든 가치와 유산 역시 거부하는데, 이는 어머니를(또한 어린 시절 힘없는 ‘약자’였던 자신들도) 옥죄고 억누른 가문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다. 그들은 미봉 같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이씨 가문’에 대한 경외나 존중심이 전혀 없으며 가문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가치를 둔다. 장남 석봉은 본가에 걸린 유서 깊은 현판이나 조상들이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목판들의 실질적 ‘가격’에만 관심이 있고, 둘째 주봉 또한 직장에서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문중 소유의 동산을 ‘팔아 넘기’겠다는 생각뿐이다. 이처럼 그들은 가문의 어르신들이 자기 어머니 같은 약자들의 노동과 희생 위에 쌓아 올린, 그토록 전전긍긍하며 지키려 애쓰는 가문의 명예나 명성, 유산 등을 하찮게 여기는데, 이런 심리 자체가 어머니를 이용했던 가문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복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가문에서 소모품 취급을 당했듯 그들 또한 이씨 가문을 ‘이용’하고 ‘소비’할 대상으로 처우하는 일이니 말이다.
형제에게 도움을 준 오로라가 사실은 귀신, 더 정확히는 순례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는 반전도 이 ‘복수’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물론 그녀가 그들에게 주는 조언은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조차 아들들을 돕고자 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로라"로 분한 순례가 석봉에게 황금 불상에 대한 정보를 전한 일은 석봉(금전적 목적만 추구하는)이 그 귀중한 가보를 손에 넣기 위해 본가를 헤집고 다니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주봉에게 가문의 어르신들을 꼬드길 방법을 알려 줌에 의해 순례는 문중 소속의 땅, 다시 말해 가문의 ‘터전’ 일부가 파괴되는 일에도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로라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에도 그동안 억눌렸던 그녀의 한과 분노는 여지없이 표출된다. 여태껏 아들들 앞에만 나타났던 그녀는 처음으로 가문 구성원들이 모여 상을 치르는 마당, 즉 그녀에게 끊임없는 고통과 모욕을 가한 집단이자 제도 앞에서 말 그대로 ‘시댁 귀신’이 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귀신이면 물러가라"는, 이 집에서 나가라는 승려의 주문에 순례는 "나가라고 하지 마"라고 격분하며 상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 ‘고고한’ 어르신들도 엉망진창으로 나뒹굴게 하는데, 이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해 주기는 커녕 평생을 ‘종부’라는 의무로만 대우하며 외부인 취급한 가문에 대해 나름의 반격을 가하는 행위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부모님의 비밀 - 사실은 순례가 삶의 말미에 치매를 앓았다는 것 - 또한 어떤 의미에선 그녀가 평생 강요 당한 의무와 정체성을 집어던지고 ‘자유’를 찾으려 했다는 소소한 반항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아내를 사랑했으나 남들이 꾸짖거나 흉보는 것을 막기 위해 본인이 더욱 호통을 치는 일밖에는 하지 못했던 무능한 배우자 이춘배는 아내가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잃고 나서야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모든 대소사를 폐하고 본가의 문을 걸어 잠근다. 그토록 마음 쓰며 지켜 온 지위와 명예, 유산 등이 결국 가장 소중한 가치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셈이다. 아내의 죽음 이후 슬픔에 잠긴 그는 순례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가문 사람들의 대화에 분노하면서 아들들에게 어머니의 사망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도록 손을 쓰지만, 사랑하는 아들들이 자신처럼 이 가문에 얽매여 고통 받지 않게 하려는 그의 ‘진심’은 자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지켜야 할 존재들을 지키지 못하고 해야 할 말들을 하지 못한 과오의 대가를 고스란히 떠안은 결과로도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오로라의 ‘정체’를 알게 되고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게 된 형제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접고 가문의 동산을 지켜낸다는 결말을 가족 간의 화해/화합이라는 전형적 ‘해피 엔딩’으로만 이해하는 것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석봉과 주봉이 동산을 지키려 한 주된 이유가 그곳이 순례가 늘 그네를 타던 장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대목에서 눈에 띄었던 설정은 영화의 마지막에야 드러난 진실, 즉 어머니가 그네를 타던 자리 바로 아래 깊숙한 곳에 석봉이 그렇게도 찾던 가문의 가보, 쌍둥이 황금 불상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가문의 어르신들이 자랑스러워한다는 것 외에는 별달리 ‘값’이 나간다고 볼 수 없는 이씨 저택 안의 문화 유산들과 달리 실제로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그렇기에 ‘진짜’ 보물로 분류할 수 있을 이 황금상이 그 긴 시간 내내 가문에서 그토록 하찮은 취급을 받았던 순례의 발 아래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동산을 지켜 낸 석봉과 주봉의 노고 역시, 당연시하던 약자의 희생과 노동, 착취와 우상화로 점철된 명예 위에 거짓된 유산을 쌓아 올린 ‘가문의 땅’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에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진짜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거나 내어 주지 않았던 순례의 유산을 보호한 것으로 이해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그 ‘진짜 보물’을 자격 없는 자들이 손댈 수 없도록 보호함으로 순례의 유쾌한 ‘복수’ 또한 이루어졌고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품, 젊은 시절의 춘배가 순례에게 건넨 양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괴로운 비바람을 막아 주는 우산이 아니라 ‘햇빛’으로부터 지켜 주는 양산을 선물했다는 사실의 의미심장함 때문에. 온 세상을 감싸는 환한 햇살 아래에서 양산이 만드는 단 한 뼘의 그늘로 제한된 그 공간이 자신의 행복과 자유, 밝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의무와 희생만을 요구 받으며 외롭게 살다 간 순례의 삶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우산은 되어 줄 수 없다 해도 냅다 양산만 쥐어 주는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저 허상으로 남을 명예와 유산에 목을 매느라 그 아래에서 소비되고 이용 당하는 약자들을 잊는 비극 또한 없기를 소망한다. 힘들고 지친 우리들 모두가 서로를 억누르고 옥죄이는 왜곡된 가치와 구습을 벗어 던지며 함께 대항하고 기뻐하는 여정 위에는 주님의 축복이 따스한 햇살처럼 내리쬘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