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한국에서는 “일라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으나 원제는 “일라이의 책(The Book of Eli)”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작품은 액션, 스릴러, 드라마, 웨스턴, 공상과학 등 상호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여러 장르들에 모두 이름을 올린, 그럼에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Post Apocalyptic Movie)”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할 2010년 개봉작의 미국 영화입니다. “Doomsday(최후의 심판일) Movie”라고도 불리는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란 말 그대로 세계 멸망 이후, 즉 인류의 현존 문명이 파괴되고 난 이후 세상의 모습을 그리는 영화 장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국 영화 중에서는 “설국열차,” “반도,” “황야”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개인적 의견을 말한다면, 외적으론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 듯 보이는 이 작품이 “기독교 영화”임을 전면에 내세운 다른 어느 작품보다 훨씬 더 깊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 무비”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열두 살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쌍둥이 형제 앨버트 휴즈(Albert Hughs)와 앨런 휴즈(Allen Hughs)가 연출을 맡고 “펠리칸 브리프(The Pelican Brief),”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플라이트(Flight)” 등의 여러 수작에 – 최근에는 글래디에이터 2(Gladiator II)에도 – 출연한 바 있는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는, “레옹(Léon)” 이후 ‘악역 전문 배우’의 이미지가 더 굳어졌음에도 “제 5원소(The Fifth Element)”와 “해리 포터(Harry Potter)” 시리즈, “다크 나이트(The Dark Night)” 트릴로지 등에서 꾸준히 명품 연기를 선보여 온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역시 악역으로, 그리고 “블랙 스완(Black Swan),” “배드 맘스(Bad Moms)” 시리즈 등으로 지명도를 넓힌 우크라니아 출신 배우 밀라 쿠니스(Mila Kunis)가 존재감 강한 조연으로서 인상적 연기를 펼쳐 보입니다.
영화는 불가사의한(그 이유가 막연하게만 설명되는) ‘대재앙’으로 인류 문명이 몰락하며 무법천지가 된, 그래서 물이나 생필품을 구하는 일조차 거의 불가능해진 2043년 미국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일라이(Eli)”는 30년 전 들었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린 음성”의 지시에 따라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성경을 폐허 속에서 찾아내고, 그 성경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장소로 옮기기 위해 미 대륙을 도보로 횡단하며 서쪽을 향해 가고 있는 – 물론 이런 사실은 영화의 끝부분에야 밝혀지지만 – 신비한 분위기의 인물로서, 낮에는 계속 걷고 밤에는 빈 건물에서 잠을 청하는 반복된 삶 가운데 한 마을에 이르게 됩니다. 그 마을은 물을 포함한 필수 자원을 소유한 “카네기(Carnegie)”라는 인물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곳으로, 대재앙 이후 출생한 사람들 모두가 문맹인 세상에서 별 필요도 없을 많은 책들을 소장하고 있던 그가 사설 순찰대까지 조직해 이곳저곳을 다니도록 하며 부단히 찾아 헤매는 ‘또 하나의 책’이 있었으니, 그 중요성을 충분히 알기에 자신의 손에 넣기를 간절히 원하는 -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물을 구하기 위해 한 주점에 들어갔던 일라이는 마을의 폭력배 일당과 원치 않는 시비에 휘말리는데, 그 과정에서 놀라운 솜씨로 열 명 이상의 불량배를 혼자 처치하는 일라이의 실력을 목격한 카네기가 그의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면서 성경을 찾는 일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듯한 그를 휘하에 두고자 ‘공’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호의를 거절하는 그에게 하룻밤 묵어 갈 것을 권하며 물과 음식을 풍족하게 대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부(情婦)인 “클로디아(Claudia)”의 딸 “솔라라(Solara)”를 일라이가 머무는 방에 들여 보내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솔라라와의 동침을 거부하고 그녀를 그대로 내보려던 일라이는 카네기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솔라라가 방에 머물게 해 달라며 사정하자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그녀에게 식사 기도를 가르쳐 줍니다.
다음날 돌아온 솔라라가 아침 식탁에서 엄마인 클로디아의 손을 잡고 식사 기도 하는 모습을 본 카네기는 안 그래도 범상치 않던 일라이가 하나뿐인 성경을 지닌 인물일 수 있으리라 짐작하며 그가 가지고 있던 책이 없었는지 솔라라에게 캐묻고, 글자를 모르는 그녀로부터 표지에 십자가 있는 책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떠날 채비를 막 끝낸 일라이를 포위하여 책을 내놓으라고 위협하지요. 하지만 일라이는 종전의 뛰어난 실력으로 카네기의 부하들을 처치한 후 카네기에게도 부상을 입히고 마을을 떠나는데, 그 마을을 혐오하던 솔라라도 함께 가겠다고 하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물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 중인 일라이는 그녀와의 동행을 거부하며 따돌리려는 시도도 하지만, 혼자 길을 헤매다 성폭행 당할 뻔한 그녀를 구해 주면서 결국 여정을 함께하게 됩니다.
걷다가 눈에 띄어 들른 교외의 외딴 집에서 인육을 먹는(!) 부부와 만나게 된 일라이와 솔라라는 부부를 피해 도망 나오던 길에서 카네기 일당과 - 다시 세를 규합해 자신들을 추격해 온 - 맞닥뜨립니다. 온갖 화력으로 무장한 그들의 전면적 공격에 집이 모두 파손되고 그 집의 부부도 사망한 뒤, 목숨 바쳐 지켜 온 성경을 카네기에게 빼앗긴 일라이는 그가 쏜 총을 복부에 맞아 치명상까지 입습니다. 강제로 그들의 차에 태워져 마을로 돌아오던 중 용감하게 맞서는 공격으로 오히려 차를 탈취하고 그 차로 일라이에게 되돌아간 솔라라는, 초인적인 힘으로 계속 길을 걷고 있던 일라이를 발견하곤 그의 목적지인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로 함께 향합니다. 잿더미가 된 금문교와 바다를 헤쳐 지난 그들은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와그너의 작품 같은 인류의 위대한 문화 유산을 보관하고 있다는 작은 섬 “알카트라즈(Alcatraz)”에 마침내 다다르게 되지요.
책을 손에 넣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되돌아온 카네기와 책을 잃고 중상까지 입은 채 알카트라즈에 겨우겨우 도착한 일라이의 모습을 교차하며 보여 주는 마지막 부분이 영화의 백미이자 반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집으로 돌아와 자물쇠로 잠겨 있던 책을 열어 본 카네기는 그것이 점자로 된 책이라 자신은 읽을 수 없다는 사실과 성경을 빼앗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본인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실, 그리고 폭도로 변한 마을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강탈하는 상황을 목도하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시각 장애인임이 밝혀지는 일라이는 지난 30년 간 매일 점자 성경을 읽으며 암기하게 된 전체 내용을 알카트라즈의 책임자에게 구술로 받아 적도록 해 결국 “뉴 킹 제임스 성경(New King James Bible)” 한 권을 세상에 남기고 생을 마감하게 되니까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일라이(마 27:46; 막 15:34)”를 주인공의 이름으로 정한 이 영화가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생활 밀착형’입니다.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불량배들을 처치하기에 앞서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thorns and thistles it shall bring forth for you…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이라는 창세기 3장 18-19절을 선포한 일라이가, 서쪽을 향해 가던 중 잠시 머물던 곳에서 밤 늦게까지 성경을 읽는 자신을 보고 “정말 매일 같은 책을 읽느냐”라 물으며 자기에게도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솔라라에게는 시편 23편을 암송해 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30년 동안 걸어다녔다면서 길을 잃은 적은 없는가,”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그녀를 향해서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Walk by faith, not by sight)”라며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인용해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자신 안에 내면화하고 있고 – 툭 치면 저절로 튀어나올 만큼 – 위의 고린도후서 말씀을 들은 솔라라가 그 의미를 물었을 때 “모르더라도 안다는(You know something even if you don’t know something)” 뜻이라 설명하고 “그게 말이 되느냐”고 다시 항의하는 그녀에겐 “반드시 말이 될 필요는 없지. 그건 믿음(faith)이니까”라고 대답할 만큼 순수한 신앙을 소유한 일라이가, 중상을 입고 생명이 위독해진 영화의 후반부 솔라라에게 “성경에서 배운 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I forgot to live by what I learned from it)”라며 그처럼 ‘배운 대로 사는 삶’이란 “자신을 위해서보다 남을 위해 행하는 삶(do for others more than you do for yourself)”이라고 풀이하는 대목에서는 회개의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성경을 내면화하지도, 그렇다고 외현화(실천)하지도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대사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빼앗으려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자신에게 일라이가 그 이유를 묻자 성경이 “무기(weapon)이기 때문”이라고 답한 카네기는 그것이 “연약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hearts and minds)을 정확히 겨냥하는 무기”라는 설명까지 덧붙입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역시 말씀을 ‘무기’로 믿고 있는(고후 6:7; 10:4; 엡 6:14-17) 모든 기독교인들의 확신과 맥을 같이하지만, 성경의 ‘힘(power)’을 믿는다면서도 그 힘이 “타인들을 지배(control)할 수 있는 힘”이라고 여기는 그의 ‘믿음’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귀신들도 믿고 떤다”는 야고보서 2장 19절의 말씀을 불현듯 떠올리게 합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가 본인의 언어로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 사실은 통제할 수 - 없지만 그 책(성경)의 말들로는 그 일이 가능하다고 외치는 장면에선 “같은 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문구가 떠오르기도 했고 말이지요.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믿는 그것이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묵상해 보도록 만드는 대목입니다.
일라이가 사망한 후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전한 알카트라즈 섬에 머물 것을 권하는 그곳의 책임자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힌 솔라라의 결심은 과거 일라이가 그녀에게 건넨 한마디 말의 결실이었으리라 저는 추측합니다. 마을을 떠나던 자신을 따라 나서며 “원래 이 마을이 싫었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그러면 네가 직접 바꿔야지”라고 무심한 듯 던진 일라이의 말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로까지 맺히게 되었으리라는 것이지요. “당신이 바꾸려고 하지 않는 한 세상은 저절로 바뀌지 않습니다(The world will not change unless you change the world)”라는 작가 Savou(Taitusi Williams Savou)의 말이 교훈하듯, 불평하거나 좌절하기에 앞서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과 주위를 변화시킴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 가는 일에 함께 나서는 우리의 모습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 위에 오버랩해 봅니다.
딸 J의 시선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생들이 직접 기사를 작성하고 글을 투고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던 학생용 신문 “Youthink”에서 기자 비스무리한 무언가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지금 찾아 보니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 모양이라 조금 아쉽다). 그때 짧은 영화 리뷰를 써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 봤던 작품이 - 당시만 해도 신작이던 - 휴스 형제의 2010년 작 [일라이: The Book of Eli] 였다. 편집부에서 건네 받은 파일의 화질이 그리 좋지 않아 눈을 한껏 찡그리며 겨우겨우 영화를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썼던 글의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내 인생에서 ‘평론’을 목적으로 보게 된 첫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자리하고 있다. 인생과 신앙의 폭이 좀 더 넓고 성숙해진 뒤 이에 대한 글을 다시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을 숙제처럼 남기기도 했고 말이다.
[일라이]는 세계가 모종의 이유로 멸망한 이후 야만과 광기만 남은 암울한 디스토피아(dystopia)를 배경으로 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tic)” 장르에 속한다. 30년 전의 세계대전(핵전쟁으로 추측되는) 여파로 지구 인구의 대부분이 사망하고 전기와 수도 등의 공공 기반 시설이 파괴되어 자연 또한 황폐해진 참혹한 환경에서 주인공 "일라이"(덴젤 워싱턴)가 보내는 하루하루의 삶은 외롭고 고단하다. 관객의 눈엔 별것 아닌 잡동사니가 귀중한 통화(currency)가 되어 버린 세상에는 인육을 먹거나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리지만, 일라이는 밤마다 낡은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고 한 권의 책을 반복해 읽으며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최소한의 존엄과 인간성을 지켜 나간다. 이 인물의 ‘비범함’은 도움을 청하는 여성을 미끼로 행인을 끌어들여 살해하는 강도단과 그가 마주치는 영화의 초반부터 목격되는데, 여러 명의 괴한들에 둘러싸여서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가지고 있던 칼로 모두를 단숨에 처치할 만큼 무술에 능통한 면모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후의 일라이는 다른 범죄자들이 힘없는 약자를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Stay on the path; it’s not your concern(길에서 벗어나지 마, 내 알 바 아니야)”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애써 외면하는 등 뭔가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일라이의 임무가 본격적으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은 "카네기"(게리 올드먼)라는 인물이 지배하는 한 지역에 머물게 되면서부터이다. 힘센 부하들을 앞세워 자기 구역을 통제하는 카네기는 ‘멸망 전’의 문명에 큰 관심과 회귀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글도 읽지 못하는 부하들에게 "눈에 띄는 책이란 책은 모두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리며 어떤 ‘특별한 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췄을 뿐더러 멸망 전 세상을 기억하고 글도 읽을 줄 아는 일라이에게 카네기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애인의 딸인 "솔라라"(밀라 쿠니스)까지 이용하려 들던 중 그가 솔라라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 자기가 찾고 있던 ‘특별한 책’이 일라이의 수중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책에 담긴 언어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선동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는 카네기가 책을 자신에게 넘겨 주고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회유를 거듭함에도, 일라이는 지배나 조종, 통제의 목적으로 소유를 원하는 그에게 책을 건네기를 거부한다. 결국 카네기는 부하들을 시켜 강제로 책을 빼앗으려 하지만, 마치 무형의 힘으로부터 보호 받는 듯 보이는 일라이는 유유히 위험에서 빠져나가며 카네기의 다리를 쏴 큰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카네기의 폭정에 지쳐 있던 솔라라 또한 자신에게 인간적 호의를 보여 준 일라이를 따라나서면서, 두 사람은 책을 빼앗으려 혈안이 된 카네기와 부하들을 벗어나 함께 ‘서쪽’으로 향한다.
요약된 내용으로도 쉽게 유추되듯 일라이의 ‘특별한 책’은 성경으로, 이는 영화 속에서 별다른 비밀도 아니다. ‘성경’이라는 단어가 영화의 후반부에서야 등장할 뿐, 폭력배들과 대적하며 성경 구절을 읊는다거나 솔라라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는 등 일라이가 밤마다 읽는 ‘책’의 정체를 영화는 굳이 숨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탄생한 작품치고는 종교적(기독교적) 색채가 꽤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혹평을 받은 측면도 물론 있으나 평론가들에게서 기대 이상의 우호적 반응을 얻은 것 또한 사실이다. 선과 악, 도덕과 윤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장르적 특성이 될 수밖에 없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세계관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이 영화에는 같은 장르에 속하는 [매드 맥스](Mad Max) 시리즈나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The Road) - 재미있게도 이 소설을 영화화한 [더 로드] 역시 2010년 개봉되었다 - 등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들이 존재한다. ‘멸망 후 세계’를 다루는 창작물 대부분이 인간 ‘내면’에 자리한 선과 악, 인간성의 실체를 헤집으려 드는 반면, 이 영화는 인간 ‘외부’의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좀 더 정확히 말해 이 영화가 문명이 사라지며 한계에 몰린 인간의 상황보다 모든 인간이 견뎌 내야 하는 ‘인생’이란 여정을 묘사한 우화(parable)에 더 가깝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한국에서 [일라이]로 번역된 이 영화의 원제 [The Book of Eli]는 물론 “일라이의 책”으로 직역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라이서”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을 구성하는 66권처럼 한 인물의 ‘신앙의 여정’을 담은 책으로서, 혹은 [천로역정]처럼 은유의 의미가 강한 서사시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관객에게 보여지는 표면적 플롯이나 장면들보다 그 뒤편의 상징과 숨은 메시지에 더욱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그 목적을 위해 중심 인물들의 이름을 포함한 여러 설정 속에서 이중적 의미와 테마를 사용하기도 한다.
영화는 촬영 기법 자체를 통해서도 이야기의 ‘비현실성’을 보여 주는데, 흑백과 세피아 톤의 중간 색감이나 네거티브 필름 사진같이 콘트라스트(contrast)가 극명해지는 효과를 사용해 영화 속 장면들 위에 인위적 분위기를 덧입히고 있다. 일라이가 보여 주는 액션 역시 화려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으며, 카메라는 그 폭력과 잔인함의 현장에 오래 머물지 않는 방식으로 일라이의 무술 능력에의 실체감을 뭉그러뜨린다. 인물들의 서사와 과거사가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 것, 악역들의 과장된 특성이나 비현실적으로 꿋꿋하게 살아남는 일라이의 '초능력' 같은 설정 모두, 영화 속 일라이의 여정을 현실로가 아니라 어떤 거대한 은유로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일라이는 어느 날 자신 안에서 들려온 ‘신의 음성’만을 믿고 어떠한 약속이나 구체적 정보 없이 세상에 하나 남은 성경을 들고 ‘서쪽’이라는 모호한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겨 온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서사는 어느 날 '문득' 태어나 예측할 수 없는 끝을 향해 떠듬떠듬 나아가고 있는 우리의 ‘인생’ 자체와도 닮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일라이의 앞을 막아서는 여러 인물들(특히 카네기)은 분명 ‘악인’이지만, 작품 속에서 이들의 존재 의미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보다 그가 가는 길을 멈춰 세운 ‘방해물’이라는 정체성으로 더욱 확실히 설명된다. “길에서 벗어나지 말자”고 주문처럼 외우는 문장에서도 엿보이듯 일라이는 악인을 처단하는 보편적 영웅 서사의 정도를 따르기보다 ‘빨리 갈 길을 가는’ 일에 더 중점을 두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카네기 또한 주인공이 단죄해야 하는 악인 그 자체라기보단 어떻게든 믿음의 인생을 살아 내려는 인간을 방해하고 뒤흔드는 여러 유혹과 난제, 혹은 고난 등처럼 상징적인 외부의 힘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영화의 후반부까지 일라이가 카네기를 비롯한 모든 방해와 탄압, 폭력들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라이는 자신이 성경을 ‘서쪽’으로 운반하는 여정 중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실제로도 카네기의 부하가 그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에서 총알이 모두 빗겨 나갈 만큼 어떤 초자연적 힘에 감싸여 있는 듯 보인다. 압도적으로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조차 카네기의 다리에 총상을 입히며 그들의 구역을 유유히 벗어나는 일라이는 그만큼 ‘강하’고 ‘단단’(impenetrable)한 인물이다. 하지만 ‘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의무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고통과 죽음도 외면하던 일라이가 인간적 우정을 쌓은 솔라라를 구하느라 ‘길에서 벗어나고’ 마는데, 이후 그는 처음으로 ‘연약’(vulnerable)해진 자신의 모습을 노출하게 된다. 카네기 일당에게 따라잡힌 후 솔라라의 목숨이 달린 협박이 이어지자 그렇게도 철저히 숨겨 오던 성경을 넘겨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카네기가 일라이를 총으로 쏜 순간, 지금까지 완벽했던 기적적 행보가 허무해지리만큼 일라이는 쉽게 상처를 입는다. (이때 그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은 쉽게 잊기가 어렵다. 카네기에 대한 분노나 물리적 고통이 아닌 당황, 충격, 그리고 슬픔이 이 과묵한 인물의 표정에서 너무나 또렷이 읽히기 때문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신 예수님의 얼굴이 저렇지 않았을까 싶도록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장면이다.)
“널 보호하던 힘은 어디로 간 거야?(Where’s your protection now?)”라며 이죽거리는 카네기가 방아쇠를 직접 당긴 악인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라이를 고꾸라트린 존재가 그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순간 일라이를 절망케 한 것은 지금껏 초자연적 힘으로 자신을 지켜 주시던 하나님의 부재, 힘겹고 지난한 여정을 감내할 추진력이었던 확신과 신념이 기반이 무너지며 고개를 든 의심과 번뇌가 아닐까 싶다. 믿음의 여정에서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악인이나 악행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의 흔들림, 하나님이 더 이상 나에게 귀 기울이시지 않는 듯 느껴지는 외로움과 두려움인 것처럼 말이다.
성경을 빼앗기고 솔라라까지 납치 당하며 일라이의 여정은 불행하게 ‘끝나’는 듯 보이지만, 카네기 일당을 따돌리고 되돌아온 솔라라에 의해 다친 몸을 이끌며 계속 ‘서쪽’을 향하는 일라이의 모습이 발견된다. 이때 일라이의 태도가 또한 예사롭지 않은데, 이전까지 ‘서쪽’에 대한 일라이의 확신과 맹목이 어딘가 독단적이었던 것에 반해, 성경을 잃었음에도 여정을 이어 가는 그에게선 어떤 자유함과 성숙함을 엿보게 된다. 큰 짐을 덜어 낸 듯한 표정의 일라이는 자신이 여태껏 성경이라는 물건을 ‘지키는 일’에만 집중하느라 그 안의 가르침에 '따르기'를 잊고 있었다고 솔라라에게 고백한다. 역시 부상을 당해 죽어 가면서도 성경을 움켜쥔 채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카네기와 비교할 때 그는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일라이와 솔라라는 함께 서쪽 바다에 도착하고, 같은 시간 일라이의 성경이 브레일(Braille) 문자, 즉 점자로 적혀 있음을 깨닫는 카네기의 모습이 비춰지며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 등장한다. 시각 장애인인 애인을 마음대로 부리고 멸망 이후 태어나 문맹인 부하들을 뜻대로 휘둘러 온 카네기가 그토록 원하던 성서를 읽을 수조차 없는 ‘눈먼’ 상태로 권력의 종말을 맞는 반면, 일라이와 솔라라는 성경을 전달하기 위해 인류 문명의 마지막 성채가 된 알카트라즈(Alcatraz) 섬으로 인도된다. 예술품과 문학 작품들을 보존해 후세에 남김으로 문명 사회를 재건하려는 안전한 요새 안의 일라이는 매일 밤 읽으며 저절로 외우게 된, 자신의 머릿속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던 성경을 구술을 통해 전승한다.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경이나 예배, 종교 의식 등 규격화된 ‘신앙 활동’에만 열중할 때 우리가 놓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다. ‘최선’을 다해 ‘선’의 길을 가고 있는데도 악의와 고통이 우리 삶을 집어삼키는 이해되지 않는 순간, 주님이 우리를 외면하는 듯 느끼며 절망하는 순간들이, 사실은 그분이 우리에게 성경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도록 주신 기회일지 모른다는 깨달음 또한. 일라이가 타인을 위해 가던 길에서 비켜나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표면적 목적을 내려놓았을 때에야, 성서를 ‘배달’한다는 수동적 과제를 넘어 자기 안의 말씀을 끄집어내며 적극적, 능동적인 형태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는 영화의 설정처럼 말이다. 성경을 안전하게 ‘보관’만 하는 대신 그 가르침에 따라 진실한 사랑과 이타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했을 때 비로소 성경이 제대로 읽히고 들릴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생명의 말씀으로 세상 속에 나오게 된 셈이다.
일라이가 목숨을 바쳐 지켜 낸 솔라라는 그의 마지막까지 곁에서 함께하고, 알카트라즈로 향하는 나룻배에서 힘이 빠진 일라이 대신 노를 저으며 그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물려받는다. 일라이가 성경의 내용을 구술한 길고 긴 시간 동안 그의 옆에서 말씀을 들었던 그녀는 일라이의 죽음 이후 그의 무기를 지니고 그의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향한다. 험악한 세상에서 격리된 안전한 요새 속에 안주하는 대신, 악인들에게 짓밟혀 더러워진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 모습이다. 돌아간 그녀가 무엇을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자신에게 희생과 사랑의 모범을 보인 친구가 가르쳐 준 진리를 따라 새로운 정의, 새로운 질서를 불러올 것이라 기대해 본다. 어쩌면 일라이의 진짜 임무는 성경이라는 ‘물건’을 특정 장소로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인간의 선함을, 사랑과 긍휼을 선택할 자유의지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부활절이 돌아올 때마다 구원의 ‘되풀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덤조차 막지 못했던, 우리를 찾기 위해 ‘살아’ 오신 주의 사랑 덕분에 끝없이 반복될 용서와 회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세상의 주인에게 마련된 편하고 반듯한 ‘길’에서 기꺼이 ‘벗어나’ 우리를 찾으러 오신 주님의 손에 붙들려 계속해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 믿음의 여정 아닐까 싶다. 모호한 목적지를 향해 방황하는 고되고 피로한 나날 가운데, 수많은 걸림돌이 우리를 넘어뜨리고 말씀을 빼앗으려 들지만, 보이지 않음에도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붙잡고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우리 또한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에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기계적 도덕성이나 의무감이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곧게 뻗은 도로에서 벗어나 구부러진 곳들을 찾아 들어간다면, 그분이 터 주시는 새로운 오솔길을 따라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P.S. 영화의 주연이자 제작에도 참여한 배우 덴젤 워싱턴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저 배우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 자체가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경탄의 마음을 일게 하는 연기자다. 언젠가 덴젤 워싱턴이라는 배우에 대해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최근 Vanity Fair에서 배우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의 독실한 신앙에 놀란 적이 있는데, 어떤 면에서 [The Book of Eli]는 덴젤 워싱턴 자신의 다짐이자 희망의 현현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 일라이의 목소리를 빌어 그가 말했듯, 나 또한 내 여정의 끝에 이르러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노라"(딤후 4:7)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