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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erson Feb 25. 2023

우리가 한달살기를 해야 하는 이유 14

강릉에서 열네 번째 날

이제는 만들 수 없는 소중한 친구




강릉에 오기 전 나의 아침.

귀가 떨어지게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온몸의 감각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아 몽롱하지만, 나는 마치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올라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간 공산품처럼 기계적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아침은 피곤하고 바쁠 뿐이다.


강릉에 온 이후로 핸드폰 알람은 울린 적이 없다.

그저 충분히 자고 나면 눈을 스르르 뜨게 된다. 여전히 누운 채로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아내와 딸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감상하기 위해 기다린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만이 들어오는 어스름한 방안의 고요함에서 아침의 존재가 느껴진다.


우리 가족은 느긋하게 아침을 보내고 자동차에 올라탄다. 태백시 '몽토랑산양목장'에서 아내의 친구 가족과 만남이 약속되어 있기에 우리는 35번 국도를 타고 태백산맥을 넘는다.

자동차 안으로 들어오는 산 바람에는 소나무 향과 흙냄새가 묻어있다.

가슴 뻥 뚫리는 시원함을 선사하는 해안 도로와 달리, 산악도로는 빽빽한 나무들과 깊은 골짜기에서 느껴지는 고즈넉하고 심오한 매력이 있다.



'몽토랑산양목장'은 체험형 동물농장으로 산양과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체험을 할 수 있으나 시설의 규모가 크지 않고 관리 상태도 아쉽기에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 시설의 특성상 태백시 화전동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주변 산악지형이 내려다보이는 수려한 경관을 통유리로 된 카페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가족 단위보다는 오히려 젊은 연인들이 잠시 와보기에 좋을 것 같았다.


태백에 온 김에 겸사겸사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전시물의 종류나 시설의 규모,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올 정도는 아니지만, 태백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한 번쯤을 들러보기에는 좋다고 생각이 된다.


태백에서 여행을 끝내고 삼척에 위치한 아내의 친구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러 왔다. 아내와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던 A의 집은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방문할 때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주고 우리 집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A 부부의 배려 덕분에 강원도에 올 때면 늘 한 번씩 들러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을 재우고 A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맥주 한잔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은 언제나 따뜻하고 즐겁다.




멀리 떨어져 완전히 다른 환경과 세상에서 살고, 1년에 운 좋아야 한두 번 밖에는 만날 수 없는 어린 시절 친구는 그러나 언제 봐도 반갑고 편안하다. 왜일까.


함께 지나온 시간들이 있다.

20대 취업이라는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애쓰던 시절, 번번이 탈락의 쓴맛을 보며 초조해지는 마음을 늦은 밤 바나나 우유 하나씩 들고 대학교 캠퍼스를 함께 걸으며 달랬다.


각자가 믿는 정의와 꿈꾸는 미래가 있었다.

이젠 감추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린 어른들의 세계에서, 꺼내놓는 것이 불가능한 마음속 솔직한 것들을 열변을 토하며 이야기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함께 피던 담배도 참 맛있었다.





순수함이 있었다.

분명히 존재하는 서로의 허물을 눈감아 줄 유연한 마음이 어린 시절 우리의 순수함 속에는 있었다.

미숙했던 덕분에 단점도 대수롭게 보이지 않던 순수함 덕분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친구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매일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얼굴을 맞대고 사는데도 친구가 되기는 힘든 세상이다. 서로 간의 작은 호의나 배려조차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사람들, 예컨대 직장 동료나 '사회적 인연'들은 결국 나에게 피로감을 안겨줄 뿐이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되어버린 탓에 얻을 것이 없으면 타인을 위해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돈과 안락함만이 나에게 정의이며, 타인이 작은 결점이라도 보이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언제 봐도 편안한 친구.

어리고 미숙했으며, 순수했던 덕분에 만들 수 있던 친구.

그 시절 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친구.

이제는 새로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그 친구.


별일은 없는지 먼저 연락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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