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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Nov 13. 2024

매일은 아니지만 뭐라도 씀

20241112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번역가이기도 한 금정연 작가의 책이다. 제목만큼 독자에게 글쓰기를 조장하는 부류의 책은 아니다. 정확히는 매일 뭐라도 쓰자며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에 가깝다. 본문은 작가의 일기장 그 자체다. 시간이 지나 책으로 펴낸 작가들의 일기는 다양하게 많지만, 그런 일기책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일기를 쓰는 포멧은 꽤나 신선하다. 그는 흥미롭게도 오늘의 일기를 쓸 땐 다른 작가가 같은 날에 어떤 일기를 썼는지, 그러니까 오늘이 11월 12일이니까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11월 12일엔 그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먼저 읽어보는 습관으로 자신의 일기를 시작한다. 각각 시대도 국가도 성별도, 그걸 썼을 때의 나이도 다르고, 심지어는 전쟁 중이기도 했던 날들의, 날짜만 같을 뿐인 무작위적 타임라인의 기록인데 보편적인 감성으로 읽히는 것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마치 평행 우주 속의 나인 것처럼. 그러니까 남의 일기를 통해 현재의 나(작가님)를 바라보는 책인데, 나는 다시 남의 일기를 통해 현재의 나를 보고 있는 남의 일기를 보며 스스로를 보게 되는 거다. 기획도 좋고 남의 일기 존잼임. (어쩌다보니 나도 작가들의 일기를 사후에 엮은 책들을 꽤 가지고 있더라.) 거기에 금정연 작가의 문장들이 취향에 맞았다.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도 유우머를 잃지 않는 글들이 재미있어 요즘 한창 읽는 중.

오늘 읽은 페이지에 마침 노벨 문학상이 언급 되었다. 다음은 금정연님의 일기에 쓰인 미셸 트루니에의 일기에 쓰여진 부분.

『그 유명한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필경 무시무시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면을 쓰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 상을 받고 나면 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노벨상이 하는 말이 된다. 내가 손에 쥐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고 또 세상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주기도 하는 이 가벼운 붓은 그만 무거운 몽둥이로 변해 버릴 것이고, 나는 그걸 가지고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겁고 살인적인 무기인 양 휘두르게 될 것이다.』

나는 당연하듯이 한강 작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느낄 책임의 무게에 내가 다 부담스러웠다. 이제서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지만 SNS는 온통 그와 관련된 것들로 도배가 됐었다. 과거의 인터뷰부터 지나가는 말로나 언급되었던 사소한 취향, 가족 관계는 물론이고 이혼한 전남편에 대한 썰까지. 존나 뇌절이다. 작가님이 운영해 오던 작은 서점은, 혹시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직접 만나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굳이 그 곳에서 구매하려 멀리서 연차까지 쓰고 온 독자들의 웨이팅으로 마비가 되어 결국 책방 운영에서 손을 뗐다고 하더라.

노벨 문학상을 한국의 남자 작가가 받았어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였겠지만, 여자인 한강님이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사에는 그 점이 빠지지 않고 부각되었다. 아시아의, 그것도 여성인 최초의 수상자. 여윽시 한국의, 여.성. 대단한 쾌거. 상은 쟤네가 줬는데 온갖 생색은 얘네가 낸다. 지들이 낳은 줄. 작가가 잘나서 받은 상이지 그게 한국인이 우월해서, 여자가 우월해서 받은 건 아니잖슴. 물론 나 역시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문득 왜 우리가 이 점을 의미있게 생각 해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 작가가 받았다면 '대한민국 최초'라는 타이틀 정도만 붙었을 텐데. 그럼 의미가 덜 하거나 없는 건가.

『트루니에는 결국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올해 노벨 문학상은 아니 에르노가 수상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열일곱 번째 여성 작가다. 역대 수상자 118명 중에 단 16명만이 여성이었다는 뜻이다. 프랑스 작가로는 열 여섯 번째, 프랑스 여성 작가로는 최초다. 에르노는 "문학이 즉각적인 영향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이어 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금정연 작가의 이어지는 글이다. 해당 수상 작가의 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나도 저 수상 소감에는 괜시리 가슴이 웅장해 진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왜 내가 저 말에 찌찌가 웅장해야 되는거야? 왜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야 하는거고? 지금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왜 아직도 여성 작가가 상을 받으려면 '투쟁'씩이나 해야 되는 거야? 그 투쟁으로 권리를 부여받은 아시아 여성 작가의 수상은 어째서 그렇게 까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인 건데? 아니, 근데 이게 투쟁해서 받은 건 맞고?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강 작가와 페미니즘 문학의 관계성에 대해 커뮤니티에서는 논란이 있었나 보더라. 제목마저 이미 페미니즘적인 [채식주의자]를 쓴 작가가 수상을 하니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페미니즘의 승리'쯤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고,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페미는 싫지만 국뽕엔 차고 싶어서 '한강 작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 않느냐'며 까야 될지 빨아야 될지 아직 결정을 못한 듯 했다. 여초는 그런 남초를 조롱하느라 아주 신명이 났다. 나는 이런 일들에 신물이 났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을 비롯해 종교와 인종을 넘어 소수자와 약자를 포함한 모든 차별에 맞서는 운동 아니었던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채식주의자]도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소수자'인 (남녀 불문의)채식주의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며, 채식주의라 함은 역시 오랜 시간동안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온 '동물권'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그 명칭이 '페미니즘'인 이유는 단지, 여성이 받아 온 성차별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 아니던가. 여성 차별을 각성하며 수많은 다른 차별들도 돌아보게 됐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게 왜 이름이 '페미니즘'이어가지고. 오죽하면 시발. 여전히 이렇게 오해만 쌓여가고 편 가르기만 바쁘고. 최근에 알고리즘에 뜬 쇼츠에는 이런 영상도 있었다. 한 남자가 여자 몇이 있는 그룹에게 '이 중에 페미가 있냐'고 물었고 듣고 있던 한 명이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하자, 나머지 여자들 중 여대를 나왔다는 한 명은 '저는 페미 아니에요'하며 선을 그었다. 늘 그렇 듯 댓글창은 난리가 나 있었다. 저런 질문을 하는 것부터 빻았다느니, 페미들은 저렇게 '나 페미ㅇㅇ'하고 말하고 다녀줬으면 좋겠다느니, 쟤는 머리가 숏컷인데 왜 페미가 아닌 척을 하느냐느니. 나는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 각자 다들 본인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는 알고서 싸우는 걸까. 싸움을 위한 싸움? 혐오하기 위한 혐오? 이럴 때마다 마크 트웨인의 씹명언이 떠올랐다. '바보와 논쟁하지마라. 구경꾼들이 차이를 식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일단 나는 모르겠더라.

한강 작가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권위있는 상을 수상할 자격이 충분히 있기에 상을 받았을 테고, 단지 그 상을 수상한 사람이 아시아인이고, 여성일 뿐인 거잖아. 그게 그렇게 공교로울 게 있나.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에 우리는 왜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드는 걸까. 왜 들먹일 수록 오히려 퇴보되는 것 같은 페미니즘에 대해 자꾸 떠들어 대야 하는 걸까. 왜 모든 존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에 아직도 설명이 필요한 걸까. 왜 차별을 하면서까지 차별에 반대하는 걸까. 한국 여성이라면 누가 상을 받았대도 상관없었을 사람들. 한강 작가가 아니라 한국 여성 작가 중 누가 받았대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호들갑 떨었을 사람들. 이들은 자신이 예약까지 걸어가며 오래 기다려 구입한 책을 쓴 한 사람이 그 글을 통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궁금하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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