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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S Patient
Dec 21. 2022
우리나라에서 희귀 질환자로 살아가기
대한민국은 희귀 질환 낙후 지역
나는 유전성 희귀 질환인 '엘러스단로스증후군(Ehlers-Danlos Syndrome)' 환자다. 나는 선천질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7년 동안 검사 상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으면서 이상한 통증을 느끼는 '섬유근육통(Fibromyagia)'환자로 오진을 받은 채 살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특정 부위의 관절에 심한 통증이 심했을 뿐인데 류마티스 질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붙은 배제 질환의 하나인 섬유근육통의 낙인이 찍혔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우리 가족들이 유독 관절통이 심하고, 관절이 과유연하다는 점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관련된 키워드를 통해 논문과 전문서적들을 통해 관련 질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가계도를 그려보니 50퍼센트의 확률로 유전이 되는 상염색체 우성의 경향성이 보였다. 어느 날 대학병원에 입원한 병상에서도 논문을 읽고 병문안 온 친구(의사)에게 우선 내 상황을 설명하고 논문과 여러 상황들을 통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을 털어놨다. 사실 이미 한 번 교수님이 '이 질환은 너무 희귀해서 가능성이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는 후회할 것 같으면 다시 한번 교수님과 잘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오후 회진 때 레지던트 선생님과 동행한 교수님께 레지던트 선생님 없이 독대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논문과 책의 근거를 통해 내가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진단을 위한 유전자 검사는 당시 병원에서 가능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과유연성 관절(Hypermobility Syndrome)'이라는 진단코드를 부여받았다.
그 후 3년 정도 지났을 때, 내 통증은 이상할 정도로 더 심해지고 몇 달은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로 악화되고 있었다. 진통제는 이미 마약성 진통제를 쓰고 있었고, 중재적 통증 시술과 수술을 통해서 겨우 일부를 줄일 수 있었다. 남편이 어느 날 자기 전에 병원을 옮겨볼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나는 실행력이 좋은 장점을 살려서 서울대학교병원 희귀 질환센터에 100자 이내의 짧은 병력(history)을 상담게시판에 올렸다. 이틀 후에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성인 미진단 희귀 질환 담당하는 교수님께서 나를 하루빨리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주었다. 나는 17년의 의무기록을 모으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1개월 뒤에 심층 진료를 예약했다. 1개월 동안 나는 수백 장의 의무기록을 분류하고 중요한 이벤트를 2장 정도로 요약해서 진료실에 가져갈 준비를 했다. 재판독이 필요한 영상기록도 준비했다.
덤덤한 마음으로 수백 장의 의무기록과 요약 기록을 들고 첫 진료를 봤다. 나는 장장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교수님과 내 상태를 이야기하고 가족들의 특징들을 끊김 없이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교수님께서는 임상적으로 엘러스단로스증후군이 맞다고 했다. 그리고 유전자 검사, 뇌 MRI/MRA, 심장초음파, 호르몬 검사, 심전도, 혈액검사를 받도록 처방해 주었다. 기본적인 엘러스단로스증후군 환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확인하는 검사들이었다. 몇 달 뒤, 유전자 검사에서 COL5A1 유전자 변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렇게 유전자 검사를 확인한 날, 나는 응급실로 보내져 담낭염을 진단받고 외과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 몇 주간 복통과 식이장애에 시달리다가 어느 병원에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담낭염 마저도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진단을 받았다. 엘러스단로스증후군 환자는 전신 결합조직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기기가 쉽고 담낭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만 나를 진료한 외과 교수님은 그냥 단순한 담낭염 환자로 나를 치부했다.
나는 지혈 문제와 조직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비치 로봇수술을 통한 담낭절제술을 먼저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덕분에 수술 날짜가 빨리 잡혔다. 그런데 수술 이후, 통증 조절 실패로 나는 엄청난 고통에서 3일 간 거동을 못했다. 보통은 3일 정도 후에 퇴원을 한다고 했다. 나는 엘러스단로스증후군 환자의 담낭수술에 대한 자료와 수술 후 통증관리에 대한 자료를 준비했지만, 집도의는 수술시간만 통보하고 가버렸다. 수술 후 통증관리의 어려움을 겪자 주말에 레지던트 선생님을 보내 내 자료들을 가져갔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생각보다 아픈 것이 많이 줄었다. 확인을 해보니 진통제 오더가 펜타닐 50 마이크로그램을 4시간마다 바꿔서 달도록 변경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요구할 때마다 펜타닐을 진통제로 요청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나는 이미 펜타닐을 패치로 붙이고 있는 환자였고, 거기에 무려 50 마이크로그램이나 더 얹어져야 겨우 아픈 것이 조절되는 것이었다. 나는 통증전문의와 협진을 요구하고 교수님이 오전 회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병원 차트상 이미 엘러스단로스증후군 환자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간단한 수술조차도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지금 내 질병에 대해 그나마 이해를 하고 있는 분은 임상유전체의학과 교수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전신질환으로 이미 다발성으로 증상을 보인다. 심장, 신경계, 근골격계, 혈관, 뇌하수체, 빈혈, 중증 통증 등 문제가 많아서 여러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나마 협진 교수님들이 논문도 찾아보시고 나를 도와주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나는 1차 의료기관에서 진료거부를 당한다.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을 문제를 감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방 광역시에 거주한다. 지역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심장성 실신을 했을 때 받아주기는 했지만 나에게 적절한 처치는 하지 못했다. 정확히 4주 뒤에 같은 이유로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내 의무기록을 바탕으로 중증 심장 구역으로 빠르게 이송되어 심전도와 응급 심초음파를 했다. 그리고 금세 또 뇌와 심장 CT를 찍고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나를 낙상 고위험군으로 판단하는 곳은 서울대병원이 유일하다. 내가 지역대학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 의사가 나더러 일어서서 엑스레이를 찍으라고 했다. 나는 관절 탈구가 쉬운 환자라 불안정한 상태에서 절대 세우면 안 된다. 서울대병원에서는 나를 절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포터블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화장실로 서서 이동도 못하게 하고 철저히 누워서 모든 검사를 다 했다.
나는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전쟁터 위에 갑옷도 없이 짧은 단검 한 자루를 차고 싸우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우리나라에서 희귀 질환은 진단 방랑(Diagnostic Odyssey)을 겪어도 진단받기가 매우 어렵다. 환자의 의지가 강하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어디에서 진단받을 수 있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질환을 진단받고 나서도 적절한 치료적 관리가 매우 힘들다. 대부분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나 겨우 관리를 받을 수 있다. 그마저도 본인이 증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놓치고 넘어가기가 십상이다. 나는 평생을 단일 질병으로 인한 증상과 합병증으로 고생을 했지만 그 어느 의사도 이 상황이 하나의 질병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37년이 지나서야 진단을 받았고, 여러 대증적 요법을 통해 관리를 받는다. 유전질환은 이렇다 할 완치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서 오래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 집안에서 이 질환을 보유한 사람은 대부분 요절했다. 하지만 나는 치료와 관리를 통해서 얼마나 오래 살아갈 수 있는지 내 스스로 증명해 낼 것이다. 환자수가 많은 희귀 질환은 의료진의 관심이 그나마 많다. 하지만 2021년 기준으로 10명밖에 안 되는 질환은 그만큼 의료진으로부터 관심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매번 나를 만나는 의사가 어쩌면 항상 첫 번째로 엘러스단로스증후군을 보는 환자라는 생각으로 대화와 설득을 해나간다. 나에게 좋은 언변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이러한 상황에서 헤쳐나가는 무기를 장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리한 전쟁터 위에서 싸우는 전사에게 개인적 무기만으로는 한 없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