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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S Patient Dec 31. 2022

환자로 첫 발 내딛기

대학병원급 진료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몸이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굳어지고 온몸이 아팠다. 어느 날, 강의가 끝나고 집 근처의 통증의학과에 들러 진료를 보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대학병원 외래를 예약해 드릴 테니 소견서를 가지고 큰 병원을 가서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류마티스 질환이 의심이 되기 때문에 집 근처 대학병원의 류마티스 내과 예약을 잡아 주었다.

  나를 처음으로 봐주신 류마티스 내과 교수님은 다양한 검사를 통해 나를 추적관찰을 했다. 나는 가족들 중에 관절의 기형과 과유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나를 처음 본 의사는 진단명을 적는 곳에 'Hypermobility Syndrome' 이라고 적어 두었다. 당시에는 수기 차트를 쓰던 시기라 내가 발급받은 의무 기록에 고스란히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나는 명확한 진단이 없는 상태에서 1년 간 다양한 류마티스 질환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는 환자로 약물도 여러 차례 변경을 하고 외래 일정도 자주 있었다. 나는 매번 교수님께 점점 더 아파진다고만 말했다. 대증적 요법으로 여러 약을 쓰고 있었지만, 반응이 크게 없었다. 그리고 2학년 1학기가 끝난 여름방학  막바지에 극심한 통증으로 입원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곧 시작할 학기에 대한 걱정이 되었다. 교수님은 보호자인 아버지와 통화를 원하셨다. 아버지는 통원치료를 하는 방향을 말씀하셨다. 교수님은 우선은 따님을 집에 보내드리지만 다음번 상태가 좋지 않을 때에는 입원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협상을 하셨다.

  나는 그 뒤로 정확히 일주일 뒤에 새벽에 극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 정신을 잃었다. '으악' 나는 그날 나도 모르는 엄청난 비명을 지르고 모든 가족을 깨웠다. 자다가 업어가도 모를 동생까지도 내 소리가 너무 커서 깨서 내 방으로 반사적으로 오게 되었다. 그 사이의 나의 의식상태를 느낀 대로 표현을 해보자면 눈을 뜨고 싶어도 뜰 수가 없고 몸 하나 가눌 기운도 없었으며 그럼에도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쩌면 그대로 이 세상과 단절될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각성을 하기 위해 뇌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생은 내가 깨어나자마자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감각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꽤 오랜 시간을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몇 시간 뒤에 시작되는 외래에 바로 가서 교수님을 만나서 입원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 입원장을 받고 2인실에 자리가 나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첫 입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입원을 하면서 찾아가기로 했다.

  병동에서의 생활은 예상보다 힘든 일들이 많았다. 우선 질병의 진단을 위한 검사들도 많았고, 당장 통증을 조절하기 위한 진통제도 처방이 나왔다. 트라마돌 50mg을 혈관에 직접 주사로 맞았는데 라인을 잡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 내내 바늘로 수차례 찔러대는 바람에 주사 맞는 공포가 심한 나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다음 날 혈관이 약한 나에게 3일 간격으로 교체하는 바늘을 고정시켜 놓고 그나마 편하게 진통제나 다른 주사제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입원이 길어지면서 혈관이 붓거나 하는 일로  계획보다 바늘을 자주 교체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나는 혈관전문간호사 선생님이 담당을 해야 할 정도로 혈관 상태가 나빠졌다.

  하루에 들어오는 진통제 양을 가늠해 보고 교수님이 회진 때 통증클리닉에 협진을 의뢰해 직접적 통증을 느끼는 천장관절에 치료를 받아 보는 것을 권유했다. 나는 그게 어떤 건지는 몰랐지만, 극심한 통증으로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협진을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협진이 시작되면서 나의 입원에서의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다. 첫 협진에서 레지던트 선생님 예진을 통해 내 통증에 대한 문제만 집중적으로 평가를 했다. 나는 입원하는 날 새벽 통증으로 의식을 잃었고, 통증점수는 10점 안에서 평가하기 힘들다고 했다. "저는 10점보다 더 아픈 것 같아요."  나는 정말 통증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아픈 천장관절을 눌러보고 나는 또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통증클리닉 교수님과 대면을 하게 되었다. 교수님은 우선 MRI 상으로도 염증이 소견이 있고 내가 통증을 이 정도로 심하게 느낀다면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 왜 이렇게 통증을 방치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솔직하게 이 정도로 내가 아프다고 인지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치료실에서 교수님은 내 골반 여러 곳을 눌러보시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눌러봐서 아이고 멍이 다 들었네요' 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여러 참관인들을 뒤로한 채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아주 두꺼운 천자용 바늘이 오른쪽 천장관절을 뚫고 들어왔다. 좁은 관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늘이 주는 몸의 진동과 뚫고 들어오는 묵직한 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리고 바늘이 안착하자마자 비명을 지르면서 바늘을 빼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교수님은 '아프게 해서 미안, 이제 시작인데 너무 힘들어해서 큰일이네. 환자 위험하니까 못 움직이게 머리랑 팔다리 좀 안전하게 잡아라.' 고 하시고는 두 번째 바늘을 왼쪽 천장관절에 꽂았다. 나는 주변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내가 내지르는 비명마저도 인지가 안 될 정도로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세 번째 바늘이 내 꼬리뼈 사이로 들어오고 나서 현실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 바늘 위로 주시기를 돌려서 고정시키고 약물이 들어오자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5톤 트럭이 골반을 짓누르면서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체념을 했지만 너무 아파서 견디기가 힘들다고 했다. 마지막 약물은 다른 의사 선생님 손으로 넘어갔는데 교수님이 약을 되도록 천천히 주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기억이 없어지고 깨보니 병동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내가 깨어나고 간호사 선생님이 확인을 하러 오셨는데 '선생님, 저는 어떻게 여기에 왔나요?'라고 물어봤다. 치료가 많이 힘들었는지 잠시 의식을 잃은 채로 병동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선생님, 이거 사람 고문이에요. 사람을 잡아요. 너무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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