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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인 Jan 21. 2023

이탈리아의 이발사에게 투블럭 설명하기

Il barbiere di Siviglia



머리를 제때 자르고 출발하지 못해서 유럽 여행 중에 머리가 너무 길어졌다. 사진도 잘 안 나오고, 말리는데도 오래 걸렸다. 여러모로 지저분한 머리카락은 불편했다. 그래서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사실 타지에서의 이발은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자르지 않으려고 참았던 것이지만. 언제 유럽에서 머리를 잘라보겠냐 싶어서 도전해보기로 했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오전 일과를 마치고 구글맵으로 숙소 근처 미용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세 군데를 추려서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마트 내부에 있는 미용실은 비쌀 거라 생각해 개인 미용실 두 곳을 먼저 들렀다. 한 곳은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고, 한 곳은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하릴없이 비싸고 거리도 있는 마트 미용실로 향했다.


 편의상 마트라고 부르는 건물 내부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마트도 있지만 전자 제품 상점이나 스포츠 상점이 따로 존재했다. 넓게 깔린 대리석 바닥의 끝에는 정원과 투명 엘리베이터도 있고, 중간중간 아이들을 위한 오락 기기도 있었다. 구글 맵은 건물까지만 안내해 주기 때문에, 내부에서 미용실을 찾는 건 우리의 몫. 구경도 할 겸 1층부터 미용실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로비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손님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건물 내부는 굉장히 세련됐고, 가게마다 직원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마트를 발견했다. 우리는 미용실을 다녀오고 나서 들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길 끝에 있던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향했다. 저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이 신기했다.


마트에 있던 투명 엘리베이터


2층에서는 쉽게 미용실을 찾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어는 전혀 모르지만 누가 봐도 미용실이었기 때문이다. 내부로 들어가니 가격이 좀 비싸보였다. 카운터에 계시던 검은색 웨이브 머리를 한 여성분이 반겨주셨다. 커트 가격을 여쭙고 안내를 받으니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돈 2만 원 아래였던 것 같은데, 물가를 비교해 봤을 때 낼만한 돈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2시간 뒤에 재방문하기로 했다. 


 우리는 뒤돌아서 숙소로 향했다. 2시간 동안 뭘 할지 고민했다. 사실 숙소에 가봤자 누워서 핸드폰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래서 가던 도중 다시 뒤돌아서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 구경하기로 한 마트에서 요깃거리를 구매해 먹기로 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 애매한 시간이어서 출출했던 참. 우리는 우리나라에 있는 즉석식품 따위를 기대하며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오가는 길에 있었던 마을 시계탑


우리는 홀린 듯 즉석식품 코너를 찾았다. 이탈리아 마트에 삼각김밥이 있겠냐만은.. 아니? 김밥 빼고 다 있었다. 삼겹살부터 스테이크까지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들부터, 각종 파스타와 샐러드들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 7천 원에서 1만 원까지 다양한 가격대에 많은 오븐 음식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핫 윙에 등갈비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치고 마트를 나오니 어디서 먹을지를 정해야 했다. 사실 그게 뭐가 중요해. 건물 내부에서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 경고문을 읽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돌로 된 난간. 식탁으로 쓰기 안성맞춤인 높이였다.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좌) 즉석식품 코너는 아니지만 꽤 넓었던 마트 중 채소 코너, (우) 우리가 구매한 음식과 보자마자 선택한 식탁


나는 여행 중에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참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문화가 흔하지도 않고 길에서 음식을 먹으면 부정적인 시선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개의치 않고 음식을 즐기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장갑도 수저도 없지만 화장실은 깨끗했기 때문에 손을 박박 씻고 온 우리는 신나게 음식을 먹었다.


 밥을 먹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동네 산책을 했다. 참 조용한 동네였다. 이런 표현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건물들이 마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 같아 그 안이 비어있고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이국적이었다는 말이겠지만. 어디가 들어가는 입구고 어디가 사람이 사는 곳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예쁜 집들이 계속됐다. 한 가지 익숙하게 즐길 수 있던 것은 아름다운 노을. 한국에서도 이런 맑은 노을을 본 날이 있었지만, 유럽의 맑음은 느낌이 달랐다. 유명한 투리구슬을 보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한 바퀴를 대충 돌아보니 약속한 시간이 되어 미용실로 향했다.


 나의 머리를 담당해 주실 분은 멋있는 올백 머리의 키가 큰 남자 이발사였다.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 줘서 기분 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이발사가 물어봤다. 나는 소통이 안될 것을 예상해 사진을 몇 장 준비했다. 가장 무난하고 유명한 투블럭으로. 이발사라면 만국 공통 헤어스타일은 다 알고 있겠지 싶어 사진을 보여드렸다. 한참을 보시더니 잘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설명을 원하셨다.


 나는 옆머리를 들어 9mm로 커트해 주시고 다시 옆머리를 덮고 뒷머리는 상고머리로 올려달라고 정말 열심히 설명했다. 사실 번역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상고머리라는 것이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라인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거나 앞머리가 눈썹까지 떨어지는 것 같은 디테일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발사의 열렬한 듣기 평가가 시작된 지 5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이해했다는 사인을 보냈다. 카운터 직원을 포함한 대여섯 명이 다 같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웃었다.


 커트가 시작되고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말하거나 덜 말한다고 머리가 대단히 예뻐질 것 같지 않아서 이발사가 삭발을 시도하지 않는 한 조용히 하기로 했다. 한국의 방식과는 달랐지만 투블럭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시도하는 방법치고는 꽤 유사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남자 이발사가 익살스럽게 땀을 훔치며 "휘유"를 외쳤다. 커트가 끝났다는 뜻이다. 자기도 모르는 스타일을 바디랭귀지로 자르려니 힘드셨겠지. 그래도 거의 40~50분을 노력해 준 이발사에게 박수를..

 

 이 스타일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옆머리를 들면 짧은 머리가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구현이 되었다. -사실 이발사가 투블럭을 모른다는 게 더 신기- 하지만 머리가 뜯어진 곳도 없고 온 정성을 다해서 잘라주셨기 때문에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서로 일이 끝났다는 웃음을 지으며 끝까지 친절했던 미용실에 큰 감사인사를 전하고 건물을 나섰다. 해는 거의 지고 있었고, 유럽은 가로등이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살살 달렸다.


결국엔 망했지만,

그 사람에게 꽤나 진상이었을 내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그냥 아무렇게나 자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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