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에세이> 2024년 8월호 기고글
봄과 가을, 좋은 계절이 오면 삼양주를 빚는다. 맑고 엷은 노란 빛에 쌀의 흰 기운이 살짝 비치는 청주다. 쌀과 누룩만으로 빚었지만 향긋한 과일향이 올라온다. 한 모금 마셔본다. 은은한 겉모습과 달리 진한 달콤함이 훅 하니 들어온다. 산뜻한 산미가 뒤따라오며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처음 맡았던 향기들은 입 안에서 더욱 풍성해져 코를 즐겁게 한다. 목으로 넘기고 나면 알코올의 적당한 쓴 맛이 입을 정리하고 사라진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맛이다. 맛 본 사람들은 모두 언제 술을 다시 빚는지 묻는다. 늘 먹던 쌀로 이런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 줄 몰랐던 탓이다.
술을 좋아한다.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닌, 술 그 자체의 매력에 푹 빠져 산다. 술에 대한 애정이 넘쳐 많은 것을 했다. 한동안은 와인에 빠져 있었다. 포도의 특성을 알기 위해 품종별로 사서 시음을 한다. 떼루아의 특성이 짙은 것들을 따로 사서 마신다. 같은 산지의 가격대별 특성이 궁금해져 그랑크뤼와 세컨드라벨 와인을 모두 사서 비교한다. 한때 눈이 돌아가 로마네 콩티와 DRC, 보드로 5대 샤토 같은 최고급 와인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월급쟁이의 얇은 지갑 탓에 눈만 버리고 돌아섰다. 싱글몰트 위스키도 꽤 집적댔다. 하이랜드, 스페이사이드, 캠벨타운, 아일레이 각지의 위스키를 사 모았다. 한참을 마셔보고 몰트, 피트, 캐스크의 특징을 이해하게 된 후 느낀 성취감은 짜릿했다. 맥주는 라거 계열과 에일 계열의 계보도를 대략 읊을 수 있을 정도까지 파 들어갔다. 술에 대한 자격증을 준비하고, 더 다양한 술을 다루게 되었다. 그래도 지적인 호기심과 맛에 대한 탐닉이 멈춰지지 않았다.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지켜보고 싶어졌다. 막걸리를 만들어보고 자신감이 생겼다. 삼양주로 청주를 빚기로 마음먹었다. 막걸리는 누룩과 쌀을 한 번 섞는 단양주(單釀酒)로 담았었다. 삼양주(三釀酒)는 이 과정을 두 번 더 한다. 정성이 더 들어가고 번거롭지만, 단양주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일정한 맛의 술을 만들 수 있다.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흰죽처럼 생긴 범벅을 만든다. 이것을 식혀 누룩과 섞어 항아리에 넣는다. 술 냄새가 나며 밑술이 익으면 다시 범벅을 만들어 덧술을 추가한다. 다음날 고두밥을 짓는다. 제일 먼저 쌀을 씻는다. 발효가 잘 되려면 잡스런 것이 없어야 한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쌀을 씻는다. 뿌옇던 물이 씻겨 맑게 뜨면 이 백세(百洗)를 마친다. 쌀이 충분히 붇고 난 후 물을 완전히 빼 고두밥을 짓는다. 밥을 식혀서 밑술과 섞는다. 팔이 없어진 느낌이 들 때까지 주무른다. 땀이 나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밑술과 고두밥이 혼연일체가 될 때까지 한다. 죽처럼 변한 밥을 항아리에 넣고 한 달 정도 숙성시킨다. 이 때 온도는 반드시 22도에서 29도 사이를 맞춰야 한다. 너무 낮으면 발효가 되지 않고, 너무 높으면 쉬어버린다. 여름과 겨울을 피해 봄가을에 술을 빚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술이 숙성되는 꽤 긴 시간동안 항아리를 쳐다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사람이 참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애쓰는 듯 보여도 사실 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효모균이 만드는 것이다. 모든 술은 곡물이나 과일에 있는 당분이 알코올 발효되며 생기는 결과물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균들이 잘 살아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다. 백세를 하는 것도, 고두밥을 팔이 빠지도록 주무르는 것도 다 효모를 위해 하는 일이다. 효모균이 더 많이 생기도록 밑술에 식량을 두 번 더 준다. 균이 잘 스며들도록 밥알에 물기가 적은 고두밥을 짓는다. 봄가을에 술을 빚는 것도 자연을 거스르지 못 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바꿔 쳐다보면 일은 그들이 하고 인간은 도우미일 뿐이다. 자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누리는 사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쌀이 삭아 가라앉고 투명한 술이 위에 뜬다. 이 때 용수를 가운데 박아 맑은 술만 취한다. 자연이 부린 마법으로 쌀은 향긋한 청주가 되었다. 내가 한 게 뭐라고 너무도 훌륭한 선물을 받는다. 막 뜬 술 한 잔을 마신다. 입에서 시작해 온 몸으로 퍼지는 짜릿함이 느껴진다. 이 감동이 술을 맛보는 다른 이에게도 전해지나 보다. 투박하게나마 삼양주를 빚으며 알게 되었다. 겸허한 마음으로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자연은 내게 아낌없이 내어준다는 것을.
<월간에세이>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나서 기고 요청도 받고, 실제로 출판이 되는 경험도 하게 되네요.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관심 가져주시는 작가님들이 많아 생긴 일입니다.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