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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라 May 23. 2024

누군가의 사인을 본다는 것

타인의 사망진단서를 처음 보았다


B2C 사업의 cs를 담당했던 적이 있었다.

고객들이 불만이나 문의를 해결해 주는 업무를 했다.

문의의 대부분은 “앱이 이상해요.”라던가,

“계약하고 싶어요.”라던가,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요.”였다.

잘 훈련받은 앵무새처럼 답변 멘트를 그대로 돌려주면

곧 문의는 해결되곤 했다.


그러다 하루는 30대 정도 돼 보이는 여성 고객으로부터 문의 전화가 왔다.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요.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000인데요. 저는 형제관계입니다. “


“계약해지는 본인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망자입니다.”


순간 적절한 답변은 무엇일지 머리를 굴렸지만 이미 나의 당황스러움은 찰나를 넘어서버렸다.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정리가 되면 저에게 알려주시겠어요? “


망자의 형제라는 그분은

나보다 훨씬 더 침착하고, 익숙해 보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회사에서 몇몇 분과 일어서서 짧은 회의를 가졌다.

제삼자가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서는

가족관계증명서와 사망진단서가 필요했다.


가족관계증명서는 제삼자가 실제 망자와 가족관계에 있는 것이 맞는지,

사망진단서는 실제로 망자가 된 것이 맞는지를 증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필요서류 확인을 마치고 그분께 다시 전화를 걸어 설명을 마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팩스기로

서류 2개가 도착했다.


사망진단서는 처음 보는 서류였는데, 읽자마자 느낀 것은 ’ 서류 한 장이 집요할 수도 있구나.‘ 였다.

사망 날짜, 사망 장소, 사망의 종류, 의사의 소견,

사망의 의도성 여부까지

망자의 마지막 순간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적은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앙다문 입술 근육이 위로 올라갔고 입꼬리가 주욱 내려갔다.


나는 서류를 잘 받았으며, 해지 절차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참고해 달라는 말을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그리고 문자메시지 마지막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을 쓸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다

끝내 쓰지 않고 발송 버튼을 눌렀다.


생명이 죽었을 때 남기고 간 것들.

그것이 사람이던 물건이던 돈이던

혹은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던

그것들을 마지막에 정리하는 사람은 가족이다.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는

감히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남기고 가는 것들을 보게 되는 사람이

가족임은 틀림없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갈까.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남기고 간 것들이

가족에게 더 큰 슬픔을 주지는 않았으면 한다.

사망진단서에 적힌 내용이 심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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