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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건 Jun 30. 2024

봉숭아 물들이듯

 가느다란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는다 성실한 아이들이 고개를 든다 오뉴월 햇살이 녹음의 늦잠을 깨운다 이 시기를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퍽 난감하다 복슬복슬한 네 머리를 정돈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까 싶어 보기 좋게 다듬는다     


빛이 바랜 물건에는 소중한 추억이 깃든다고 진심을 다해 보고 만지고 간직했기 때문에 마음이 물든 거라고 연설가 흉내를 내며 말하더니 호통을 치고 눈을 부릅떴다 익숙한 나는 그러지 말고 마저 봉선화 물이나 들여달라고 했다 넌 봉선화가 아니라 봉숭아라 투덜거리면서 금방 내 손톱에 집중했다      


조용하고 시끄러운 큰 집에 살고 싶다고 말했다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술잔을 기울임에 오롯이 마음을 쓰고 싶다 했다 새와 하루살이를 동무 삼아 순환하고 싶다고 했다 우린 두 손 모아 나마스떼 합장하고 크게 더 크게 웃었다 취객이 되어 부끄러움도 잊고 아이처럼 서로를 헝클어뜨렸다     


넌 소주를 고집했고 난 소주를 싫어했다 희석주야 말로 싸게 취할 수 있다는 네 주장에 나까지 소주를 마시게 되었다 너만큼 강하지도 너 같은 신념도 없었지만 나까지 소주 애호가가 되어버렸다     


한 잔 –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두 잔 – 영원할 줄 알았다

석 잔 –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웃어대는 너

넉 잔 – 넘실거리는 바다를 보며 논했던 철학

다섯 잔 – 산을 오르며 연신 투덜대던 숨

여섯 잔 – 재치 빼면 시체라는 입

일곱 잔 – 벌레는 잘 잡으면서 강아지는 무서워하고

여덟 잔 – 진창 취하겠다는 호기의 청춘을 함께했다

아홉 잔 – 솔직하고 명석하고, 순진했다

열 잔 – 많은 시간을 함께할 줄 알았다

열한 잔 – 세상에 그런 건 없지만

열두 잔 – 우린 예외이지 않을까

열세 잔 – 하지만 넌

열네 잔 -     

애써 참으며 일어선다

봉숭아 피어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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