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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건 Nov 01. 2024

옆구리의 작은 비늘

 갠 하늘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장마철 습기 더운 날씨도 싫었지만 파란 하늘을 가린 채 며칠이고 자기과시를 해대는 먹구름이 가장 미웠다. 맑고 청명한 하늘이 나를 웃게 만든다. 꼬리를 흔들면서 총총 산책하는 강아지를 봤을 때. 티 없는 높은 소리를 내며 웃는 아이들과 주위를 신경 쓰느라 정신없는 유치원 선생님의 무리를 보았을 때도. 먹구름이 당연하지 않게 만든 건 알아서 마르는 빨래뿐 아니라 웃음도 포함되어 있다. 약간 짜증이 난 상태임을 느끼면서 신발에 발을 꾸겨 넣는다. 곧 젖어질 발과 바지에 심심한 사과를 예약하며.  

   

 이런 날씨엔 유명한 한남동 카페도 여유롭다. 장마의 유일한 장점이랄까. 사람들이 꺼리는 시기에 나서면 사람들이 붐볐던 곳에서 이득을 챙길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집 밖으로 나가게 만든다. 사람들과 반대로 행동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까. 시류에 편승하면 편승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음. 꽤나 멋진 말이었는걸? 이런 좋은 뷰에 멋진 생각,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이 북적이는 유명한 카페를 전세 낸 듯 사용하려면 지금이다.     


 창밖으로 흐르는 물에 더 많은 물이 내리고 있다. 장마는 그런 시기다.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속적인 과잉공급이 이루어진다. 오랜 기간 그런 일을 겪은 도시에는 충분한 대비책이 준비되어 있다. 대부분의 장마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문제는 한계를 넘어 내리는 단 하나의 예외. 카페 사장이 집이 침수됐다며 내쫓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돌아갈 길이 침수되는 걸 창밖으로 직관했거든.    

  

 여유로움은 그 카페에서만 존재했다. 아니, 사실 여유롭다는 환상도 내 안에서만 가득했다. 카페 밖으로 펼쳐진 광경은 재난 영화에 가까웠다. 도로에는 배수관으로 채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차기 시작했고 강 주변의 지하 도로는 전부 침수됐다. 언젠간 뚫겠다는 집념을 담아 내리는 빗물이 드릴처럼 느껴진다. 도로는 마비됐고 대중교통은 전부 중지됐다. 돌아갈 수단이 없어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장마가 오고, 강이 넘치고, 돌아갈 길은 보이지 않는데, 여기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하나요.      


 곧 찢길 기세로 흔들리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무심한 척 주변을 둘러봤지만 초조했다. 잠시 건물에 들어가 비를 피하다가 발목까지 들이차는 빗물을 보며 체념했다. 건물은 의미가 없다. 다시 밖으로 나와 대로 한가운데에 서서 우산을 버렸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대로 한가운데서 비를 맞아 보려나. 미치려면 지금이 적기다. 미친 상황에서 어울려주지 않으면 반대로 그가 미친 사람이 된다. 쏟아지는 빗물이 아프다가도 이내 적응이 된 듯 전신을 시원하게 안마해주는 숙련된 마사지사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한국의 마사지사는 시각장애인에게만 합법이라는데 이들도 눈먼 비인가.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려놓을 차례다.


 도착지. 범람 구역. 신발과 옷을 벗어 곱게 접어 던짐. 눅눅해진 몸을 이끌고 점점. 

 안으로. 숨을. 

 모두 

 뱉어.   

  

 장마가 끝났다. 하늘은 파랗고 대중교통은 회복됐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강이 아름답게 햇빛을 반사하며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카페 사장은 침수된 집과 차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에 통화를 돌리며 손해를 메꾸기 위해 애쓸 것이다. 잠겼던 지하 도로와 집에 갇혀 있던 강아지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웃음도 해방됐다.  

    

 강 근처에 팽개쳐진 옷을 주워 입는다. 옷과 신발이 너덜너덜하지만 어쩔 수 없나. 벌거벗지 않고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하자. 이번 여름은 꽤 성대했다. 휩쓸려 떠내려갔으면 어쩔 뻔했는지. 시에서는 연일 복구 계획 및 피해 보상 방안에 대한 소리로 시끄러운 모양이다. 자신의 손해에 대해 외치는 시위의 규모가 어찌나 큰지 시청 일대의 도로가 전면 마비됐다. 규모로면 보면 2002 월드컵과 비슷하다나. 아니면 촛불시위랑 비슷하려나?   

  

 세상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정확히는 변화했었다가 돌아왔다. 아니, 사실 돌아오지 못했어. 그 변화는 비가역적이었거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말하자면 진화랄까? 아니, 애초에 그런 거창한 표현보다는 성장했다고 말하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해. 미쳐가면서, 강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다양한 것들을 느꼈고, 변해야만 했으니까.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옷과 신발이 나를 꾸며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물에 젖으니까 그렇게 무겁고 방해가 될 수가 없더라고. 심지어 그 뒤엔 이렇게 심한 주름까지 생기지. 그에 반해 우리는 그런 만들어진 것들관 다른, 아주 탁월한 능력이 수도 없이 있어. 인간만큼 적응에 능하고 순발력 있는 동물이 없지. 우리는 더 자신을 믿고, 믿어주어야 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해야 해. 그러면 네 몸은 상응하는 완벽한 결과를 보여주며 화답할 거야.     


그래 가령 예를 들자면, 이 옆구리에 있는 비늘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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