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는 떠나는 것
골퍼들이 가장 많이 하는 변명과 핑계가 “나 어제 잠 못잤어” 입니다. 초보든 구력이 좀 있는 골퍼든 비슷한 핑계를 댑니다.
프로선수조차도 인터뷰에서 “어제는 잠 잘 자서 컨디션이 좋아요”라고 하는 것을 보면 라운드 전날 평소처럼
잠을 편하게 자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저 역시 라운드 전날 잠이 안 와서 맥주 한 반만 먹여야지 했다가 만취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새벽 라운드니까 아침에 못 깰까봐’라고 말하지만 그게 다일까요?
‘내일 잘 쳐야지’하는 긴장감이 일단 있겠죠. 하지만 그 보다도 필드에 나간다는 설렘과 기대감이 우리를 잠 못 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어린 시절 수학여행 전날이나 소풍 전날 그랬던 것처럼요
수학여행 때 버스를 타고 가듯,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을 차로 달려 도착한 골프장은
클럽하우스 부터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잘 지어진 건물에 가끔은 지나치게 럭셔리한 클럽하우스의 전경은
내가 어제 있었던 사무실의 풍경과 사뭇 다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안의 풍경과도 다르죠. 락카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스타트하우스에 나가면
코스의 전경이 보입니다.
맞습니다
이때 우리는 너 나할 것 없이 골프장에 소풍 간 아이가 됩니다
라운드를 자주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골프장에나 오니까 꽃을 본다” “골프장에 와보니 봄인지 알겠네”
봄 라운드는 골퍼들에게 봄 소풍이고 가을 라운드는 가을 소풍인 셈이죠
남들보다 먼저 벚꽃을 보고 남들보다 늦게까지 벚꽃을 봅니다.
철쭉과 진달래가 아른다운 코스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와 같은 경고 푯말이
골프장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푸른 잔디를 밟으며 ‘골프 하길 잘했다’고 느낍니다. 소풍 가서 도시락을 까먹듯이
그늘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학교 동창들과 라운드를 나가면, 어릴적 함께 소풍 갔던 느낌이
한결 더하겠죠. 같이 가는 차 안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카트 안에서 골프장의 풍경을 감상합니다
대한민국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인 이유라고 우리는 배웠지요
사계절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골프장만한 데가 또 있을까요?
가을의 골프장은 어떻습니까? 제가 다녀본 대한민국의 골프장 중에 단풍이 없는 골프장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간척지를 메운 골프장이나, 새로 생긴 몇 개의 골프장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모든 골프장의 가을엔
단풍이 있습니다
단풍이 물듯 듯이 우리의 좋은 시관과 관계도 은근하게 물들어 갑니다
어쩌면 골프란, ‘떠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쁘고 지루한 나의 일터로부터 푸른 자연으로 떠나는 것,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새로운 시간을 향해 떠나는 것, 골프장에만 가면 승부욕이 넘치는 또 다른 나에게 떠나는 것 말입니다.
이런 골프를 매일 즐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골프 역시 일상이 돼버려서 ‘골프라는 소풍’을 제대로
못 느낄지도 모릅니다.
라운드 전날 잠이 안오면 ‘아, 내가 골프를 아직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세요
‘아, 내가 아직도 설레는 무엇이 있구나’하고 생각하세요. 설레는 것이 없어지면 우리는 이미 늙은 것이니까요.
저는 지금도 라운드 전날 설렙니다.
‘골프라는 소풍’을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도 또 내일의 소풍을 기다립니다